"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고려 현종 이후 전라도 정명 1천년을 맞아 2018년 광주ㆍ전남ㆍ북도가 24억원을 들여 편찬한 '전라도천년사'(전 34권)가 친일식민사관이 짙게 배어 있다는 비판과 폐기여론이 거센 가운데 평소 한국고대사 분야에 깊은 연구를 해온 김상윤 선생이 최근 자신의 SNS에 연재한 '<전라도천년사> 무엇이 문제일까요?'를 본지에 18회 연속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문헌을 왜곡하고 심지어 고고 유물까지 날조했다는데, '지금 한국 주류 강단사학자들은 어떤가', 하고 묻는 분이 계셔서 한 꼭지 첨가합니다.

최재석 교수는 <삼국사기 불신론 비판>에서, 김원룡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비판했는데, 그가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에 대해 비판한 것은 아주 정확한 비판이었다고 합니다.

ⓒ김상윤
ⓒ김상윤

첫째, 이마니시 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전혀 전거가 없는 가정이라 주장하면서도, 왕명은 가짜가 아니라고 하는 등 여러 논리적 모순이 있다.

둘째, <삼국사기>는 무시하면서 극히 간략한 중국쪽 기록만 신봉한다.

셋째, 낙랑군은 작은 조계지와 같은 것이며, 그 시기에 예•맥족과 한족(韓族)이 자유롭게 활동했다.

넷째, 풍납리 토성은 서기전 1세기부터 쌓기 시작했으며, 발굴에서 나타난 백제 초기의 문화 수준이나 토기 모습이 <삼국사기>의 연대를 뒷받침해 준다.

즉 삼국의 건국은 서기전 1세기나 서기 1세기 무렵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이마니시 류에 대한 김원룡의 비판은 매우 정확한 것으로, 특히 김원룡이 풍납토성 발굴에서 얻은 고고학적 성과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고고학에 의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정확함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한 것이었다고 이덕일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원룡은 그 후 이병도와 그 제자들의 압력을 받아 발표 결과를 철회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식민사학 카르텔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이후 김원룡은 180도 변신하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뒷받침하는 '원삼국시대'라는 걔념을 만들었습니다.

최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은 삼국시대 초기 유물을 모두 '원삼국시대' 유물로 표시했습니다.

김원룡이 1964년에 풍납토성을 제일 먼저 발굴했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도 1997년에 풍납토성 안쪽의 현대아파트 건축 예정지에서 나온 목탄과 목재•토기 등 13점을 방사성 동위 원소 측정을 했습니다.

그 결과 중심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서기전 199년으로 나타났고, 가장 늦은 것은 서기 231년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풍납토성은 서기전 2세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지요.

그러나 '서기전 2세기에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발표하지 말라'는 압력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심하게 들어왔다고 합니다.

주류 강단사학자들에게는 '방사성 동위 원소고 뭐고 다 소용없다'는 게 이덕일의 설명입니다.

이형구는 이때 아파트 공사를 중지시키고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하여금 긴급 발굴 조사에 나서게 한 장본인인데, 그의 제안에 따라 발굴을 한 결과 풍납토성 초축(初築)이 서기전 2세기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0년에 풍납토성 동벽에 대한 재발굴을 실시하여, '풍납토성은 3세기 후반에 축조되었다는 고고학 자료가 새로 나왔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굴조사 자문위원회에 어마어마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여기에 1997년 아파트 공사를 중지시키고 발굴하게 한 선문대 교수 이형구의 이름도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풍납토성을 재발굴한 경위는 앞선 발굴 조사 결과를 뒤집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이덕일의 탄식입니다.

주류 강단사학계는 왜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뒤엎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오기만 하면 기를 쓰고 반대할까요?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계승한 자들이 한국 강단을 모두 차지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나라 역사가 망가져도 '나몰라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상윤
ⓒ김상윤

그런데 지금의 역사학계는 아예 자체 검열을 통해 '스스로 알아서' 주류 강단사학계의 가이드 라인을 지키고 있는 느낌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강단에 서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용역 과제에 참여할 수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라남도 영암군 장천리 청동기시대 2개 주거지 유적에서 수집된 숯에 대한 방사성 탄소측정 결과 그 교정 연대는 서기전 2630년과 서기전 2365년으로 나왔다고 합니다.(<영암 장천리 주거지>2, 목포대학박물관)

그런데 얼마전 남도일보 토론회에서 조법종 교수는, "그것은 시료가 잘못되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시료로 측정된 결과이니 믿어서는 안 되는 연대라는 주장이겠지요.

그렇다면 측정 결과를 아예 발표하지 말았어야지, 왜 지금 발표한 연대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까?

조 교수의 말은 영암군 장천리에서 나온 청동기 유적이 서기전 27세기에서 서기전 24세기가 아니라, 훨씬 후대라는 주장이겠지요.

주류 강단사학계의 카르텔이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역사학계를 지배하게 되니, 이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주류 강단사학계의 가이드 라인을 지키려고 하는 작태겠지요.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가야사 복원 정책에 힘입어 무려 1조원이 넘는 국비가 투여되어 가야사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 연구 결과를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의도였겠지만, 2019년 12월 3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야특별전인 '가야본성'이라는 전시가 열렸습니다.

'가야본성'이라는 일본식 제목을 쓰고 있어서 비판을 받았지만(<전라도천년사> 역시 '봉정식'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썼습니다), 그보다는 벽면을 채우고 있는 연표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369년 가야 7국(비사벌,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백제•왜 연합의 공격을 받음(서기)'

369년에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가야 7국을 공격했다는 내용인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지요.

가야 6국이 느닷없이 가야 7국으로 바뀌어 있고, 금관가야나 대가야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름도 생소한 비사벌이나 탁국, 다라, 탁순 등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악명 높은 신공왕후 49년 기사를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신공왕후 49년은 249년인데, 연대가 맞지 않으니 2주갑 120년을 더해서 369년에 "탁순에 집결해 신라 공격을 깨트리고, 비자벌•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했다."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지요.

<삼국유사>의 가야 6국은 우리가 알다싶이 '금관•아라•고령•대•성산•소가야'인데, <일본서기>의 가라 7국은 '비사벌•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로서 같은 국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삼국유사>의 가야 6국은 버리고, <일본서기>의 가라 7국을 진짜라면서 연표에 써놓았으니, 이런 나라 망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369년에는 야마토왜는 아직 국가도 아니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가야 왕계가 10대로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야본성' 전시 연표에서는 5대 이후의 연표가 없습니다.

5대 이시품왕은 재위 연대가 346-407년입니다.

<일본서기> 신공왕후 49년인 369년 이후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김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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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가야 10대 구형왕의 재위 연대는 521년부터 532년까지 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전시는 일본정부에서 주관한 전시인가요?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일본이 패망한 후 조선을 떠나면서 했다는 발언이 떠올라 소름이 끼칩니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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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천년사> 누리집: http://www.jeolladoh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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