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에서 한반도 유물이 나오면 곧 야마토정권이 한국 침략을 통해 약탈했다거나 한국에서 진상한 것이라고 해석"
"조선총독부는 '조선 역사는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으며, 북쪽은 한사군이, 남쪽은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는 점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부각시키려고 했다"

고려 현종 이후 전라도 정명 1천년을 맞아 2018년 광주ㆍ전남ㆍ북도가 24억원을 들여 편찬한 '전라도천년사'(전 34권)가 친일식민사관이 짙게 배어 있다는 비판과 폐기여론이 거센 가운데 평소 한국고대사 분야에 깊은 연구를 해온 김상윤 선생이 최근 자신의 SNS에 연재한 '<전라도천년사> 무엇이 문제일까요?'를 본지에 18회 연속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황국사관에 입각한 일본 학자들은 모든 고분이 긴기(近畿) 지방에서 출발했다는 전제 아래, 북규슈나 기비(吉備) 지방에 있는 거대한 전방후원분들이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야마토왜의 세력 범위가 확대되면서 다른 지역에도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등장했다는 주장이지요.

게다가 고분에서 한반도 유물이 나오면 곧 야마토정권이 한국 침략을 통해 약탈했다거나 한국에서 진상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김상윤
ⓒ김상윤

그러나 고고학적 진실은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고분떼는 북규슈에서 출발하여 기비 지역과 세토내해 부근으로 전파된 후, 마지막으로 근기 지역으로까지 전파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합니다.

최재석에 의하면 고분의 '수릉'은 다이쇼와 쇼와 시대에도 빈번히 행해졌지만, 주로 도쿠가와 시대 말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행해졌으며, 그 수는 100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릉' 작업을 한 왜왕의 묘는 야마시로에 34개, 야마토에 24개, 가와치에 12개, 이즈미에 3개, 셋쓰에 1개, 단바에 2개, 도합 76개나 된다는데, 이들은 주로 오사카부의 나라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최재석의 설명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야마토정권 근거지에 거대한 고분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재석에 의하면, 일본 정부는 묘의 규모를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묘 주변에 연못을 새로 조성하거나, 연못을 이중 삼중으로 만들고, 연못의 면적을 확장하거나, 둑을 높게 축조하여 저수 능력을 높이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마토왜는 다른 왜보다 비교적 늦게 출발하였고, 특히 4세기 중엽에는 북규슈 등 서부 일본의 세력이 훨씬 강했기 때문에, 야마토왜가 그들을 누르고 서부 일본을 거쳐 가야를 정복한다는 것은 소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조희승은 <초기조일관계사>1-2권에서, 일본 열도에 정착한 가야-백제계 이주민들이 북규슈를 거쳐 세토내해 부근과 기비 지역으로 세력 범위를 넓히고, 긴기 지방으로 옮겨 야마토왜의 중심 세력이 되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마토왜의 지배세력은 당연히 백제계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김상윤
ⓒ김상윤

<일본서기> 조메이(舒明) 11년(639)조를 보면, 일본왕(천왕)의 지시에 따라 야마토 지방에 있는 '백제천' 근처에 '백제궁'을 지어 그곳으로 이사를 하였고, 13년(641)조에는 일본 천황이 백제궁에서 죽자 백제궁 북쪽에 빈(殯, 관을 안치하는 곳)을 설치하고 이를 '백제대빈'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어떤 일본학자는 이 기록을 읽고 큰 아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떻게 천황의 궁전이 다른 나라 이름인 '백제궁'일 수 있고, 천황의 장례를 '백제대빈'에서 거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백제가 야마토왜를 직접 지배하고 있지 않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겠지요.

최재석은 이런 사실로 미루어 조메이는 바로 백제 사람이 분명하다고 단정합니다.

일본의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는 최근 그의 책 <백제에서 도래한 응신천황>(2001)에서, 오진 천황은 백제인이며 동시에 야마토 일본의 초대 천황임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면서 이곳에 비정한 지명들은 모두 허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 고고학자들은 가야를 200년간이나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의 유물을 가야 현지에서 단 한 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각지에 조선식 이름이 가득하고, 여러 곳에 조선식 산성이 있으며, 조선 사람을 모시는 신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에서 조선식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조선총독부가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면서 내부적으로 정한 방침이 아직도 한국 주류 강단사학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에서 그 실례를 들어 설명해 보았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역사는 매우 늦게 시작되었고 영역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으며, 북쪽은 한사군이 지배했고, 남쪽은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는 점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김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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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까지 필자가 검토한 바대로, 우리 주류 강단사학계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전라도천년사>의 일부 내용도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대도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들은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식민사관이냐'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뻔뻔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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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천년사> 누리집: http://www.jeolladoh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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