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아니다

2014년 처음 작가를 만났다.

광주에서 열린 비엔날레의 참여작가였고,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검은 긴 머리의 작가는 한국의 몸을 가졌지만 미국인이었다.

생태적으로는 한국인이었지만 제도 속 몸이 있는 곳은 미국이었다.

그래서 더 설명할 필요 없는 그녀의 국적은 미국이었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대학을 마치고 현재는 포틀랜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소수민족으로 여성, 엄마, 그리고 이민자로의 삶을 자신만의 언어로 조형한다.
 

내가 떠나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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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 김(Una Kim). ⓒ광주아트가이드

무용평론가로 일생을 살았던 어머니의 영향이 작가의 생(生)을 지탱하게 했다.

작가는 “젊은 날엔 어머니의 완고함, 밀고 나가는 당찬 힘, 어디서나 부당함을 향한 발언 등이 나를 힘들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어머니가 곧 나였음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말하지 않은 가운데 언제나 부조리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 “한국을 떠날 때 즈음, 내가 살았던 근교를 지나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장갑차를 보았고, 시간이 지나고 미국에서 박정희의 총격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 자신의 성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늘 경계였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무엇, 이곳의 국적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들의 뜻에 따라 저곳으로 이동해 버린. 흑인도 백인도 아닌 소수민족. 키가 크지도, 날렵하게 달리지도 못하는 경계에서 소수민족의 당연한 소외 속에서 견딜 수 있을 힘은 어머니에게 배웠다는 것도 결별 후에야 알았다.

낯선 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맞닥트려야 할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고독과 인내, 쓸쓸함과 분노와 우울감이 자아(自我, identity)를 전적으로 구성할 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고독에서 작가를 버티게 한 것은 색(色)에 관한 갈증과 표출이었다.

작가는 “중학교 때 서예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하얀 화지에 검은 먹이 화려하게 와 닿았다. 날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왔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는데, 빨리 붓글씨, 서예를 하고 싶어서였다”. 고 말했다.

이민 생활에서 작가를 버티게 한 것은 그림이었다.

붓글씨가 진화해 검은 먹에서 칼라가 첨가되면서 우울하고 분노하며 부조리한 경험들이 늘어갈 때마다 그림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이 시간들이 축적되어 현재의 작가를 있게 했다.
 

그림 속에 내가 있다.

미국에 있으면서 어머니로부터 광주의 오월항쟁 이야기를 접했다.

뉴스도 광주의 소식을 알게 했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한국의 작은 도시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 진실을 믿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고 수년 전, 한강의 『소년이 온다』 소설을 읽었고, 전율했다.

그리고 광주의 오월항쟁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며 관련자료를 찾았다.

마침내 어떤 지점에 이르렀을 때 자신만의 언어로 발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의 편린이었다.

트라우마(trauma)라고 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부조리한 현실과 맞닥트린 트라우마를 작업 속에 완성한다.

두상만이 존재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형체가 불분명한 두상은 눈을 감기도, 눈이 아예 없다.

몸통이 사라진 두상은 완전한 두상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소소하게 울림으로 들려준다.

I Will Leave the Light on for You, 44”x30”, Mixed media on paper, 2023. ⓒ광주아트가이드
I Will Leave the Light on for You, 44”x30”, Mixed media on paper, 2023. ⓒ광주아트가이드

때로는 비스듬히 누워서, 각자의 트라우마 안에서 절규하듯 깨졌거나 존재하지 않을 듯한 형태로 말이다.

신비한 색감 역시 트라우마의 한 조각이다.

무채색의 블랙과 찬란한 색으로 완성된 작품이 작가의 기억 속에서 쉽게 치료되지 않을 트라우마를 읽게 한다.

드로잉 하듯 무심하게 채색된 모든 작품은 트라우마가 갖는 평범성과 쉽지 않은 삶의 과정을 보여기에 충분하다.

일상 속 신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물성(物性)으로의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

숨길 수도 없이 불현듯 시간의 틈새에서 솟구치는 나 아닌 나의 물성, 트라우마.

광주의 오월은 이 지역, 그 시간에 부적절하게 있었던 우리들 뿐 아니라 멀리 타국의 작가에게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갖게 했다.

작가는 대학에서 벽화를 가르친다.

특히 대부분의 벽화에 혁명이란 단어가 들어간 멕시코의 벽화에 집중한다.

디에고 리베라, 시케이로스. 호세 클레멘테 오로코스 등의 벽화 속에서 광주의 오월항쟁을 찾아내고 읽는다.

작가는 “벽화는 하나의 사회운동, 혁명, 변화에 대한 열정과 갈망을 표현한 것”이며 “정치적 격변기였던 1980년대의 걸개그림이 그런 것 같다. 어떤 사회적인 요인에 의해 탄생하고 역할을 해내는 것이 예술의 존재 이유이며 벽화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덧붙였다.


**윗 글은 월간 <광주아트가이드> 166호(2023년 9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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