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 칸'은 로사 릭솜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작품으로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기차는 영화와 같다. 빠른 속도로 펼쳐지는 창밖의 풍경을 시적으로 은유한다면 영화다.

1895년 최초의 영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시작으로 영화사에서 기차는 영화적 체험의 대명사로 인식된다.

기차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범죄물 <대열차 강도>(마이클 크라이튼, 1979)를 거쳐, 가깝게는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2013)에서 기차의 공간적 특성을 활용해 계급문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를 선보인다.

최근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제임스 맨골드, 2023)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면 좁고 긴 기차의 칸과 칸을 넘나들며 혈투를 벌이는 초반시퀀스다.

한편으로 기차는 ‘비포 시리즈’처럼 생전 남이었던 남녀가 인연을 맺게 하고 필연적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로맨틱한 장소로 변용된다.

이번에 소개할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6번 칸>(2023) 역시 기차의 영화적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우선 이 영화만이 지닌 애매한 지점이 있다.

장르적으로 로맨스인 듯 아닌 듯한 모호한 기류가 그렇다.

ⓒB-Plan
ⓒB-Plan

쿠오스마넨 감독은 로맨스를 표방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이야기로 발전시킨다.

이는 여타 로맨스물(‘비포 시리즈’ 같은)과 극명한 차이를 두는 지점이다.

이 감독만의 로맨스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아이러니다.

이 영화가 시도하는 ‘비틀기’는 관객에게 전혀 익숙치 않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주인공 라우라는 성소수자인데 동성 연인과 머지않아 이별할 것임을 스스로 직감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같은 기차 칸에 동승한 이성 료하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서서히 가까워진다.

관객은 ‘과연 이 두 사람이 각각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심지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수렁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다.

이 모두 단순한 성애적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문에 기인한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6번 칸’일 정도로 기차라는 공간은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무엇보다도 인물들이 몸을 싣고 있는 기차는 그 넓은 시베리아를 횡단한다.

지극히 폐쇄적인 공간 안에서 지속적으로 유발되는 흔들림은 의도치 않게 서로의 신체가 부딪히게 만들고, 덩달아 이들의 감정 또한 마구 흔들리고 부딪히며 뒤섞이게 만든다.

절대 뒤로 무르지 않고 전진만 하는 기차의 속성 역시 서사 안에 편입된다.

설령 라우라가 과거 애인과의 추억이 담긴 캠코더를 도둑맞더라도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차는 다음 역(단계)을 향해 차분히 달려갈 뿐이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의 연속에서 두 사람은 억지로 인연을 엮기 위해 노력하진 않는다.

그저 기차에 몸을 맡긴 채 순간순간의 흐름에 순응한다.

이쯤 되면 라우라가 애초에 목표했던 무르만스크 암각화는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에서 서서히 멀어진다.

최종적으로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마음이 무엇일지 규명해내는 것이 새로운 목표로 자리한다.

물론 이 영화의 모든 서사가 기차라는 공간적 특성에만 기대어 있는 것은 아니다.

ⓒB-Plan
ⓒB-Plan

이 영화는 기차의 안팎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들을 꽤나 공들여 그려내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기차 꼬리칸에서 카메라로 창밖을 비추어 점차 멀어지는 플랫폼을 담아낸 장면이 있다.

어쩌면 실제 레일 위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트래킹숏으로 구성된 이 장면에서는 라우라가 지난 과거를 회고하며 내뱉는 대사가 핵심이다.

자신의 전 애인이 여성이었다는 사실과 고고학과 교수가 직업이라는 사실은 거짓말이며, 이는 전 애인의 직업이고 그녀의 삶을 줄곧 선망하며 지내왔음을 털어놓는다. 이 용기 있는 고백 이후, 묘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역전된다.

라우라는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모두 내보임으로써 료하에 대한 감정과 신뢰가 더욱 커졌음을 증명하는 한편, 료하는 그녀에게 더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이후 대화로 더 풀어볼 새도 없이 야속하게도 기차는 종착지에 도착한다.

이는 마치 감독이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잔뜩 기대했던 관객들을 향해 ‘하이스타 비투’(Haista vittu, 핀란드어로 ‘엿먹어’라는 뜻)를 날리는 것만 같다.

라우라의 고백을 들은 료하는 종착지에 당도하자마자 홀연히 그녀 곁을 떠나 버린다. 

당연하게도(?) 감독은 왜 그가 떠났는지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관객의 머릿속 규정되지 않는 혼란함으로써 남은 여백을 채워나가도록 할 뿐이다.

차라리 그렇게 관계도 끝나고, 영화도 끝이 났다면, 두 사람의 관계성은 더욱 확실해졌을 수 있다.

그런데 말없이 떠난 료하가 다시 라우라를 보러 온다.

그녀의 본래 목표였던 '암각화 찾기'를 도와주기 위해서다.

이 사실로 인해 관객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정말 단순히 라우라의 목표(영화의 목표)인 암각화를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사실 료하가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서였을까.
 

라우라에 대한 료하의 감정을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타 로맨스 영화와 차별화된다.

암각화를 찾아가는 택시 안에서 다정히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거나, 그 추운 설원에서 눈싸움을 하며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를 감정을 나눔에도 두 사람의 관계성은 지독히도 규정되지 않는다.

그렇게 또 한번 마주한 이별의 상황, 료하는 본인이 ‘사랑해’라고 이해한 핀란드어 ‘하이스타 비투’를 쪽지에 적어 라우라에게 전한다.

이는 긍정적인 결말을 상상해볼 수도 있는 마지막 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그 말뜻을 뒤늦게 알아차린 료하가 본래의 의미 그대로 “엿먹어”라는 메시지로써 마치 우정의 표식마냥 건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나의 기표에 공존하는 정반대의 기의들은 마치 두 사람의 관계성처럼 끝날 때까지 고정되지 않은 채 틈새 사이로 빠져나간다.
 

ⓒB-Plan
ⓒB-Plan

사실 두 사람의 인연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좁고 길었던 기차 칸에서의 잠깐의 시간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 순간, 그 기억, 그 자체만으로 행복한 걸 수도 있다.

혹한을 느낄 새도 없이 서로의 곁을 따뜻하게 해준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이스타 비투’라는 두 사람만의 언어를 새롭게 창출해냈지만, 이 역시 결국 ‘사랑해’ 아니면 ‘엿먹어’라는 한정된 의미 안에서만 기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품은 것이 정확히 성애적 감정인지, 무엇인지 끝까지 답을 내릴 수 없지만 이를 표명하는 일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결국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잠시나마 나눈 따뜻함,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며 우리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전부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