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순간들을 통과하는 인간적인 기량을 지닌 사람
인간적인 기량을 지닌 사람을 품어내는 인간적인 기량의 영화

목적 없이 살아가다 관계를 형성하게 된 청년들에 주목했던 일본 감독 미야케 쇼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로 국내 관객과 만난 바 있다. 

그는 신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한 인물이 겪고 통과하는 삶의 궤적을 요란한 장치들을 동원하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하게 담아낸다.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네이버 영화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네이버 영화

영화는 호텔 객실을 청소하는 생업을 이어가면서 프로 복서로 데뷔하여 경기를 치르는 선수이기도 한 주인공 케이코를 비추며 시작한다.

한 생활인 복서를 소재로 한 영화이면서 복싱이 주된 화두가 아니기도 한 이 작품이 어떠한 지향점으로 향하는지 암시하는 듯, 영화는 케이코가 방안에 앉은 채 무언가를 적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를 시종 채우며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건 긴박한 복싱 경기 실황이나 번잡하게 돌아가는 도심의 전경이 아니다.

오프닝처럼 일상의 고요한 순간들, 회상하기도 전에 어느새 흘러가버린 것만 같은 대목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쁜 일상 속 오가는 장소들, 풍경들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지만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경미한 소음들조차 사뭇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선천적 청각장애로 양쪽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는 듣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별다른 청각적 효과를 주지 않고 화면에 담기는 일상의 소음을 재료로 삼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역설적으로 사운드가 매우 중요한, 청각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케이코가 치르는 실전 경기를 다루는 대목이 두 번 나온다.

그런데 프로 복서 생활을 시작하여 경기를 이어나가는 케이코가 치르는 시합의 승패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영화에서는 복싱 영화에서 곧잘 도드라지는 경쾌하거나 묵직한 액션의 쾌감이 배제돼 있다.

프로 무대 첫 번째 매치에서 승리를 거둔 건 케이코다. 그런데 어쩐지 승리를 쟁취한 것 같지 않게 다가온다.

케이코가 상대를 몰아세우며 타격하는 순간을 볼 수 없다.

작은 체구를 지녔고, 경기를 치룰 때 주요한 현장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부터 매우 불리한 조건에 있는 케이코에게 육박해오는 실전의 중압감, 무게감이 도드라지는 것만 같다.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네이버 영화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네이버 영화

프로 무대를 승리로 장식한 후에 이뤄진 체육관 회장과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케이코의 재능과 소질에 관해 묻는다.

그러자 회장은 케이코가 재능은 없으며,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친구라는 말을 덧붙이며 인간적인 기량을 지녔다고 말한다.

통상 초월적인 기량을 지닌 이에게 이러한 수사를 붙이진 않을 것이다.

프로 선수가 가진 역량, 기량, 재능에 대한 찬사가 아닌 한 자연인이 지닌 품성을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언사는 무엇을 함의하는 걸까. 

인간적이다 라는 개념이 무엇인지에 관해선 각자 한참 다르게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 있진 않을까.

우리 곁을 일구는 평범한 이들의 조각들이 모이고 쌓여 형성된 삶이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야말로 외관상으로 특별함이 도드라지지 않을지언정 어떻게든 삶에서 길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과 그의 곁을 지키고 함께하는 인간을 품어내는 인간적인 기량의 영화다.

반세기도 전인 1940년대까지는 도쿄 내에서 부흥하던 지역구였으나, 현대에 접어 들어 인구가 급격히 쇠퇴한 아라카와 부근을 배경으로 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사람이 떠나가고 쇠락해가는 도시 외곽의 공간에서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고민하고 지키며 생을 묵묵히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에 시선을 두는 작품이다

하루하루 분투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과 주변인들의 행로를 천천히 따라가는 영화는 그렇기에, 장애를 가졌음에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 류의 드라마가 전혀 아니다.

프로 복서가 될 특출한 재능으로 체육관에 스카우트가 된 것도 아니며, 청각장애로 인하여 실전 경기에서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는 케이코. 그리고 일상에서 살아가는 자연인으로서의 케이코.

영화는 어떤 드라마틱한 삶의 굴곡과 성패의 틀 속에 인물을 끼워 넣지 않는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감정을 고조시키는 대목은 도리어 이런 장면들이다.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네이버 영화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네이버 영화

딸이 프로 데뷔로만 만족하고 그만 두길 바라면서도 막상 시합을 놓치지 않고 보려고 안달복달 하는 케이코의 엄마, 적막한 체육관에서 함께 연습하는 케이코와 트레이너, 정든 체육관을 곧 떠나야하는 상황에 눈물을 머금는 트레이너, 케이코와 체육관 회장이 나란히 거울을 마주한 채로 섀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 등이다.

케이코는 인근에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복싱 체육관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다음 시합을 준비한다.

그러다 가족과의 관계 등 일상에서의 끊이지 않는 고민과 말로 쉬이 표현할 수 없는 생각들이 연이어진다.

결국 체육관 회장에게 당분간 쉬고 싶다는 편지를 썼지만 끝내 붙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지만 그는 일상을 이어나가야 한다. 

영화의 종반부, 케이코는 자주 찾던 다리 밑 천변에서 자신이 패배했던 시합의 상대 선수와 마주친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그와 악수를 나눈 뒤 잠시 골똘히 어딘가를 바라보던 케이코는 실루엣으로 비치는 강둑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 올라간다.

고정된 카메라의 화면은 빛이 서서히 들어차며 점차 선명해지는 행인들을 지나쳐 가는 케이코를 담아낸다.

이내 화면은 암전되어 크레딧이 올라오고, 16mm 필름의 아득하고 따스한 질감으로 도시의 전경 곳곳이 연이어 펼쳐진다.

삶에 대한 무한한 찬가나 끝없는 비관을 말하는 이야기는 넘쳐난다.

그런데 구체적 개인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생애를 그렇게 양극단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살아가다 보면 멈출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어떤 순간을 시시각각 마주하게 된다.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네이버 영화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네이버 영화

그렇다면 제한된 조건 속에 놓인 인간은 무슨 선택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의 말미에 강둑에서 케이코를 지나치던 이들의 삶은 어떠할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이에 해답을 내놓거나,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영화는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교류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이들 내면의 삶에 침잠하게 만든다.

얼핏 너무나 사소하고 소담하게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굳건히 잇고 지탱하는 관계와 감정에 관하여 차분히 들여다보기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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