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이다. 당시 문민의 정부를 표방하며 김영삼 정부가 발표한 이른바 5.13담화는 5.18민주화운동의 명예회복과 더불어 그 정체성을 오늘에 있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성격을 규정하고 자신의 정부 역시 그 연장선에 있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5.18문제 해결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정부가 직접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적 보상과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념사업을 지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5.18관련단체가 망라된 '5.18민중항쟁연합'은 김영삼 대통령의 5.13담화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 빠졌다는 이유로 이를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발하였다. 5.13담화 내용 중에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은 역사에 맡기자는 것 때문이었다.
5.18민중항쟁연합(이하 오민련)은 즉각적으로 5.18학살책임자들을 고소하기 위한 실무에 착수하였고, 일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당시 서울의 민주사회를 위한변호사모임과 함께 이듬해인 1994년 서울지검에 학살책임자 12명의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이 고소가 발단이 되어5.18학살책임자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를 실현하기 위한 국민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전국 주요대학의 법대 교수들이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항의하는 성명이 봇물처럼 터져나왔고, 5.18단체회원들은 일년이 넘도록 명동성당 입구에서 천막농성을 하며 학살자들의 처벌을 향한 국민투쟁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 결과 마침내 학살책임자들이 법정에 세워져 사법적 단죄를 받게 되었고, 5.18민주화운동은 비로소 그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20년 전 일이다. 당시 오민련이 진실은 역사에 맡기자고 했던 5.13담화를 그대로 수용했더라면 20년이 지난 지금의 5.18민주화운동이 처한 현실은 어땠을까?
진실을 묻어둔 채 기념사업과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만으로 문제를 미봉했다면, 더구나 학살책임자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요즘 특정 언론 매체들까지 나서서 왜곡과 폄훼를 일삼는 상황에 직면한 5.18민주화운동의 현실은 얼마나 더 암담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2002년 제정된 5.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 법률에 의해 5.18민주화운동이 명실상부하게 법적, 제도적으로 명예를 회복하게 됨으로써 5.18민주화운동은 비슷한 경험을 치르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 희망과 롤 모델이 되었음은 몰론이거니와 국내의 여러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해서도 그 진실의 규명과 명예회복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5.18민주화운동이 일정한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지 20년도 지나지 않아 방송까지 나서서 무차별한 왜곡과 폄훼를 일삼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제는 왜곡과 폄훼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33년 전 광주학살을 자행한 신군부세력들이 5.18민주화운동을 은폐하기 위해 내세웠던 이념적 갈등과 지역감정을 똑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의 폭동!' 이것이 학살자들이 광주학살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광주시민에게 들씌웠던 오명이다. 최근 종편에서 탈북자들을 앞세워 북한군들이 광주에 들어와 상황을 만들었다는 주장과 인터넷 사이트에 넘쳐나고 있는 이런 종류의 왜곡들이 같은 맥락이다.
다행스럽게도 광주시장과 지역의 국회의원은 몰론, 지역의 행정기관과 법조계, 5.18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이 모두 나서 5.18민주화운동의 왜곡과 폄훼를 그냥 좌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확인하고 총체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명예훼손에 의한 법적 대응을 비롯한 다양한 대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오랜동안 5.18민주화운동 관련단체에서 실무를 경험했던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꼭 주문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국가기관의 공식적인 대응이 그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선양을 비롯한 유, 무형의 기념사업을 국가보훈처가 주관하고 있다.
이는 국가정체성 확립과 관련되는 여러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국가보훈처가 5.18민주화운동의 기념사업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5.18민주화운동의 정체성과 역사적 의미는 훼손될 수 없는 국가적 책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통령선거를 전후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특정세력의 왜곡과 폄훼는 마땅히 국가가 나서서 그 근원을 차단해야 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국가보훈처가 현재 주관하고 있는 각종 기념사업에 대해 왜곡된 주장으로 폄훼를 시도한다면 아마도 그 유관단체들은 국가보훈처를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이러한 비교추측을 하지 않더라도 국가보훈처는 마땅히 국가정체성 확립에 근간이 되고 있는 자유, 민주, 정의가 실현되기까지 우리 역사의 기념비적 사건들에 대한 정체성 관리는 당연히 책임져야 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폄훼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응책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국가보훈처가 직접 이러한 왜곡과 폄훼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도록 강제해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우선의 대책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럴 때만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에 관한 시비도 동시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5.18단체 역시 5.18관련단체의 추천인사가 국립5.18민주묘지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을 때와 국가공무원이 관리소장을 맡고 있을 때와 차이점이 어떤 것인지 다시한번 심사숙고해서 국가보훈처 공무원에게 자리를 빼앗긴 국립5.18민주묘지 관리소장의 개방형 임용도 반드시 되찾아 최소한 5.18기념식장에서 광주시민을 비롯한 5.18민주유공자들이 참석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는 일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