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바 없이 머물다 갈

아련하다. 기억 속에서 지워진 풍경들이 불쑥 튀어 오른다.

어린 시절 골목의 풍경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재도 이어지는 풍경일 뿐 아니라 생활도 보여준다.

김냇과에서 전시 중인 작가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다.

오래전 살았던 양림동 풍경뿐 아니라 제주도의 풍경도 바라보는 눈을 풍요롭게 한다.

풍경 속에 바람이 보이고 직선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기억 속의 아련함을 더 재촉한다.

사직도서관, 펭귄마을부터 양림버거와 미광 의상실 등 지금은 사라진, 그림 안에만 존재하는 공간들도 보인다.

작가는 “어린 날 양림동에서 생활하며 느꼈던 추억을 회화와 판화기법을 섞는 ‘판타블로’라는 독창적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고 자신의 작업에 관한 설명을 덧붙인다.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것들

이민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이민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시간이 다녀갔다.

무엇이 작가에게 판타블로라는 독창적인 그만의 기법을 완성하게 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판화와는 완전하게 다른 형식을 취한다.

판화의 특징은 인쇄기술을 조형작업에 끌어들인 결과로 회화와 조각, 디자인을 모두 갖춘다.

판에 찍혀 나온 결과물이 완성품이고 하나의 완성된 판으로 다수를 찍을 수 있으며, 판재와 압력, 제작 방법에 따라 판화만의 독특한 매력을 갖는다.

작가가 해당하는 작업 중 판화의 형식에 해당하는 것은 판에 찍히는 결과물과 압력 외에는 거의 해당하지 않는다.

심지어 단 한 점의 작품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오랫동안 비구상 작업을 했고, 판화작업에 천착했던 작가가 마침내 다다른 ‘판타블로’는 ‘회화와 판화를 모두 포함하는 그림’을 뜻한다.

판(Pan)은 라틴어로 ‘모든 것을 포함하는’이란 의미이고, 타블로(Tablaeu)는 프랑스어로 ‘그림 이미지’를 뜻하는 합성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자신이 확장할 수 있는 작업의 경계를 스스로 무너트리며 재조합의 결과로 새로운 회화의 형식을 재발견한 것이다.

어떤 것이든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구축은 그만의 고통과 실패 속에서 꽃피운다.

마침내 작가의 작업이 그렇다.

오히려 새로운 형식과 기법 안에서 확장된 작업은 오히려 빛을 발한다.

전시장 내부의 거친 벽에 화려한 색감의 작품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룬다.

돋보인다. 벽처럼 거친 듯 침잠하는 그림 안에는 시간의 흔적이 만연하다.

기존의 다색판화와는 다른 명도와 채도가 눈길을 끈다.

작가는 “판화와 서양화의 기법을 결합한 최적의 상태를 연출했으며 우드락 보드판에 프레스를 쓰지 않고 손의 힘과 롤러만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한 결과다”고 자신의 작업에 대한 애정을 보인다.

2018년부터 2021년 9월까지 완성된 99점의 양림동 연작은 사연이 많다.

이중섭 미술관의 레지던스로 보낸 제주 작업 역시 시간의 흔적들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울음을 다독이며 나아간다

이민-펭귄마을 53X72cm 판타블로 (캔버스+아크릴) 2020. ⓒ광주아트가이드
이민 작가-펭귄마을 53X72cm 판타블로 (캔버스+아크릴) 2020. ⓒ광주아트가이드

고향인 광주를 지극하게 사랑한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있던 디아스포라 같은 쓸쓸함은 무등산을 풀어낸 「설산M」(33.5×19cm, 2019)으로 표현된다.

푸른 들과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무등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다.

어머니 죽음 앞에서 막막한 슬픔이 그대로 드러난 「2021.107」(80×40cm, 2021)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내리는 눈으로 알게 한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인 친형의 이야기에 천착한 「H씨 오월 기억」(162×130cm, 2018)은 삶을 관통한 오월항쟁에 관한 의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에 충분하다.

작가는 고3 때 오월 항쟁을 맞닥트렸다.

작가로 살아오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물리적 기억의 총체로서 오월항쟁은 그림 속에서 순정하게 결과물로 되살아났다.

작가는 “직접적 표현과 형식으로 항쟁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날의 분노는 선명하다. 내 안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MBC방송국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았고 「M씨의 5월 기억」(162×130cm, 2020)으로 당시를 풀어냈다. 오월항쟁 관련 5점을 완성할 생각이며 이제 두 점을 해냈을 뿐이다”. 고 말했다.

작가를 더 아름답게 만든 것은 지난 2018년부터 2021년 9월 완성된 99점의 양림동 연작의 판매대금 전액에 자신의 호주머니까지 털어 1억 원을 미혼모시설 등에 기부, 광주전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스 회원(1억원 이상 기부자)이 된 것이다.


**윗 글은 월간 <광주아트가이드> 160호(2023년 3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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