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올레길 18번-북두칠성의 맥과 제주인의 기상이 살아 있는 땅

8.

불탑사 경내에 있는 오층석탑. ⓒ차노휘

기(奇)씨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걸을 때마다 비단 치맛자락이 사각거렸다. 며칠 전에 황제가 선물한 옥 귀걸이가 양귀에서 찰랑거렸다. 옥 귀걸이를 걸었다고 시샘한 제1황후에게 매질까지 당했다. 비록 매질과 욕을 먹었다지만 고려에 있었으면 꿈도 꿔보지 못할 사치였다. 그녀는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었다. 그녀의 부모가 원나라에 바칠 공녀(貢女)로 그녀를 내놓았다.
 
1333년 8월 그녀는 원나라에 끌려왔다. 살아남아야했다. 다행히 다른 처녀들보다 미모가 빼어나 눈에 띄었다. 고려출신 환관의 도움으로 혜종 황제에게 차를 따르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 일을 맡은 게 천운이었다. 운에만 의지할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 황제에게 은혜를 입은 몸이 되었다. 한순간의 분노로 그동안 이뤄놓았던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숨 쉴 때마다, 회초리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일었던 치욕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복수하고 말리라. 그때까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모욕을 당할 때마다 웃었고 제1황후를 감쌌다. 황실에서 모범적인 언행을 보였고 돈이 생기면 모아두었다가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을 키웠다. 굶주리는 백성에게 식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선행과 지지세력 확대만으로는 그녀의 입지가 확실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권력을 굳건히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황제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황후는 되었으나 아들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황후 옷을 입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평소 의지하고 있던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그녀의 근심을 듣지 않고서도 근심을 덜어주었다.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산세를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불공을 드리시면 됩니다.”

그녀는 천하에 이름난 풍수사들을 동원해서 삼첩칠봉의 산세를 갖춘 곳을 찾게 했다. 고려 풍수사한테 제주도 동북 해변에서 바라던 산세를 찾았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녀는 사신을 보내 오층탑을 쌓게 했다. 완성된 뒤에는 직접 가서 극진한 기도를 올렸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1339년 황후가 된 기씨는 원나라 황통을 이을 태자를 낳는다. 그 후 그녀는 원나라가 몽골 내륙으로 쫓겨 갈 때까지 30년간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한다. 1368년 명나라 군대가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점령하자 그녀는 가족과 함께 몽골 내륙으로 철수한다. 그곳에서 아들이 황제로 즉위한다. 바로 소종 황제(昭宗皇帝)이다. 드디어 기씨는 황후에 이어 황제의 어머니가 된다. 

위는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에 있는 원당사(元堂寺) 오층탑에 얽힌 이야기이다.

9.

삼양 검은 모래 해변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원당봉(170.7m)으로 향했다. 고려 때 오름 허리에 원당사(元堂寺)가 세워진 데서 유래하여 원당봉이라고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원당 봉수가 있어서 망오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당봉은 일곱 봉우리가 있는 오름이다. 주봉인 원당봉을 비롯하여 앞오름, 망오름, 펜안오름, 도산오름, 동부나기, 서부나기 등으로 구분이 된다. 오름 내에 사찰 세 곳과 봉우리 일곱 개가 있어 삼첩칠봉이라고 한다. 

사찰은 불탑사(조계종)와 원당사(태고종), 문강사(천태종)이다. 기황후가 기도를 해서 태자를 얻었다는 원당사지 5층 석탑(보물 1187호)은 불탑사에 있다. 고려 후기에 세워진 이 탑은 제주 유일의 5층 석탑인 동시에 세계에서 하나뿐인 현무암으로 만든 탑이다.
 
오르막길 양쪽으로 나 있는 주택가를 한참 오르다보면 원당 오름 삼거리가 나온다. 원당사와 불탑사는 왼쪽으로, 문강사는 오른쪽에 있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나는 오른쪽 주봉 굼부리 안에 세워진 문강사 표지판을 한참 쳐다보고는 왼쪽으로 향했다. 올레 리본뿐만 아니라 불교 성지순례길 리본도 나뭇가지에 나란히 묶여 있다. 이곳은 제주올레 길이면서 불교성지순례길이다. 2014년 11월에 개장한 ‘보시의 길’에 포함이 된다. 애월읍 대원정사에서 출발하는 이 순례길은 장장 45km를 지나게 되며 이곳 불탑사까지 이어진다.

오름 허리까지 시멘트 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시멘트 양 옆으로 해송과 잡목이 우거져 있고 나무 밑동에 낙엽이 쌓여있다. 햇살이 나뭇가지로 비집고 들어와 쌓인 낙엽에 찬란하게 비춘다. 눈이 부시다.

이곳에서 기도해 기황후가 잉태하자 아들을 낳지 못한 수많은 고려와 조선 여인들이 기도하러 왔다고 했다. 기황후 전설과 사찰이 세 군데나 되는 오름. 땅심이 좋은 걸까. 이 좋은 땅을 밟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올레꾼 한명 보이지 않는다. 내내 18번 코스를 걸을 때도 그랬다. 인기 없는 올레코스일까. 아님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일까. 겨울이어서 그럴까.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느릿느릿 걷다보니 불탑사와 원당사가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불탑사와 원당사가 마주보고 있는 골목. ⓒ차노휘

내륙 올레길 21개 코스를 완주하고 난 다음 날, 나는 제민일보 기자시절부터 제주 4·3을 30년 동안 취재하며 제주도 4·3 대책위원장을 지낸 K 선생을 찾아뵈었다. 그분은 여러 이야기 중 내가 제주도 사찰이 화려하며 장식적인 요소가 많다고 하자 이렇게 답변했다.

“제주도 사찰은 일찍 지은 게 50년이나 51년 정도예요. 4·3 때 중산간 지대를 소개하면서 거의 타버렸거든요. 제주도의 대표적 사찰이라고 할 수 있는 한라산 중턱에 있는 관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K 선생 말처럼 불탑사도 마찬가지였다.

불탑사 경내에 있는 오층석탑. ⓒ차노휘

고려 시대 사찰 터인 원당사지에 1914년 무렵 불탑사가 중창되었다. 하지만 1948년 ‘제주 4·3’이 일어났을 때 파옥되어 삼양리 마을로 소개(疏開)되었다가 1953년에 재건되었다. 소개될 당시 승려들과 함께 피신했던 불상과 탱화들도 다시 불탑사로 되돌아왔다. 

현재의 모습은 1960년대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듭한 뒤, 마침내 1991년 4월 12일에 전통 사찰로 지정되면서 꼴을 갖추었다. 기황후 전설이 깃든 오층석탑과 고려 시대 창건되어 원당사의 맥을 잇는 전통 사찰로서 의의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오층석탑은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불탑이다. 이색적이면서도 시골 민박집 나이 드신 어르신처럼 정겹고 소담하다. 뭐랄까, 젊은 시절 일만하다 나이 들어 깡마른 몸피에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어 병원을 자주 드나들면서도 자식들 남편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마음 씀씀이라고나 할까. 

그 이미지는 이곳에서 아주 간절히 삶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던 한 여인, 30년 동안 권력을 잡았던 그 여인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 여인에 의해 만들어진 불탑이 긴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 사이 제주도 아낙들의 풍파를 닮아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웅전 벽면에 쓰인 글귀가 눈에 꽂힌다. 다 허망한 것을(空). 불탑사 앞에서 잠시 다리를 풀고 앉아 쉬어가기로 한다.

10.

걷는 것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한발을 내밀고 다른 발을 내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럴 때 온 몸이 앞으로 진행하면서 가벼운 리듬을 만든다. 리듬은 혈관을 따라 뇌에 전달된다. 뇌는 생각을 가동시키며 끊임없이 동력작용을 한다. 

한 가지씩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화두를 꺼낸다. 또 다른 한발 그것에 꼬리를 물고 물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고 결론 아닌 결론을 내리고는 ‘공(空)’을 만든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끄집어내며 말을 건다. 발걸음이 쉴 새 없이 움직일 때마다 생각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등이 젖어들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목덜미도 땀으로 축축하다. 생각은 생각을 낳다가 곧 아무런 생각이 없어지고 머릿속이 환해진다. 

아름다운 풍광이 바로 눈앞에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본다. 혈관은 다시 리듬을 타고 머리는 박하사탕을 깨문 것처럼 환해진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린다.

삼양 사람들이 신촌으로 가는 옛길. ⓒ차노휘

길은 계속 이어진다. 삼양 사람들이 신촌으로 가기 위해서 걸었던 길이니 신촌 사람들이 삼양에 일이 있을 때도 걸었을 길이다. 나는 그 옛길 위에 발을 디딘다. 제사가 있는 날이면 젯밥을 먹기 위해 오갔을 길. 제사가 끝나면 든든한 배와 다리로 수다는 좀 더 늘었겠지 싶다. 손에 ‘떡반’도 들려있었을 테지.

제주도에서는 집안의 제사에 직계가족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일가친척 및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풍습이 있다. 현기영 선생의 작품 속에 제사가 끝나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참여한 사람이든 외지에 일이 있어 오지 못한 사람이든, 그 숫자에 맞게 만들어서 한 개씩 공평하게 나눠 먹는다는 ‘떡반’이 나온다. 배곯던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그때만 고기맛을 볼 수 있었던 어린 화자는 제삿날이 기다려지기만 한다. 

아, 그 구수한 냄새! 명절 전날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추렴해서, 돼지 한 마리를 그슬릴 때, 털 타는 그 구수한 누린내가 지금도 코 끝에 맡아지는 것 같다. 맛뿐만 아니라 냄새도 이렇게 기억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지난날의 사물‧사건들 중에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 허다한데, 배곯던 시절의 그 냄새는 내 후각에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그 냄새는 돼지고기 한 점의 맛과 연관되어 있다. 한 점의 돼지고기를 나는 얼마나 먹고 싶어 했던지! 1년 중 고기라고 생긴 걸 입에 대보기는 명절이나 제사 때뿐이었다.

우리 집 제사는 음력 8월에 몰려 있어서, 나는 1년 중 그달을 제일 좋아했다. 추석 명절에다, 1년 차로 돌아가신 증조부님과 조부님의 제사가 그달에 있었다. 제사 끝난 다음, 흰 쌀밥과 함께 받아먹은 떡반은 너무도 맛있는 별식이었다. 

특히 한 점의 돼지고기 맛은 잊을 수 없다. 입에 살살 녹는 비계 맛이라니! 더도 덜도 아니고 딱 한 점이 내 몫이었다. 돼지고기‧구운 생선 각각 한 점, 송편 한 개, 메밀묵 두 점, 사과‧귤 각각 한 조각. 

이렇게 자손들에게 돌아가는 떡반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양이 똑같았다. 집안의 제일 연장자인 할머니 몫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마저 당신은 묵 한 점만 먹는 시늉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손자들에게 나눠줘 버리곤 했다. 불심이 깊은 분이라 돼지고기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

(중간생략)

조상의 제상 앞에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큰아버지가 나를 가르쳤다. 한쪽 귀퉁이가 불에 탄 병풍이 세워져 있었고 불타는 고향집에서 증조부의 위패와 함께 병풍을 구해낸 할아버지가 그 제상 위에 신위로서 좌정해 있었다. 제상에 엎드려 절하는 나에게 큰아버지가 근엄하게 훈계하셨다.

“똥고망을 하늘로 쳐들지 말고, 얌전히 내려! 두 발을 얌전히 포개고 그 위로 엉뎅이를 살짝 놓아라. 그렇지.”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 刊), p130~131

억새풀 사이로 보이는 신촌 포구. ⓒ차노휘

제주도는 겨울이어도 겨울이 아니다. 신촌 옛길 길가에 풀들이 시퍼렇게 나 있고 길 주위 밭에는 결구된 푸른 배추, 무가 밭 가득이다. 담장 너머 아직까지 노란 귤이 매달려 있다. 햇살은 목덜미를 간질이고 하늘은 높고 코발트빛이다. 걸을수록 배낭이 무게를 더해 어깨가 결리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박타박 발걸음이 리듬을 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아주 먼 옛날 바다 한가운데 섬이 생겼어. 땅 속에서 잠을 자던 뜨거운 용암이 바다위로 용솟음쳐서 흘러내리다 굳어져 바위가 되었지. 덜 굳어진 용암은 다시 흘러내려 동굴을 만들었어. 

비도 내리고 눈도 내렸어. 햇살이 땅위로 납작하게 엎드렸지. 흙이 숨을 쉬면서 들썩였어.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거야.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졌어. 새들이 날아오고 짐승들이 모여들었지.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였어.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세 개의 구멍(지금의 삼성혈)에서 세 사람이 솟아 나왔대. 이들은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라고 부르는 세 명의 신이었어.  이들은 벽랑국의 세 여인을 얻어 혼례를 올리고 곡식의 씨와 짐승을 얻어 섬에서 살게 되었지. 이것이 제주도의 탄생 신화야.

제주도의 옛 이름은 ‘탐라’야. ‘깊고 먼 바다의 섬나라’라는 뜻이지. 그밖에 탐모라, 서모라, 섬라, 담라, 둔라, 모라, 탁라, 영주, 제주 등으로 불리었어. 아주 예쁜 이름들이지. 영주는 중국의 신선설에서 비롯되었어.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도 해. 탁라의 ‘탁’자는 ‘풀잎 책’이며 ‘라’자는 ‘벌릴 라’로 ‘나라’를 뜻해. 그래서 탁라는 ‘풀로 짠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의 뜻이었지.

전에 읽었던 제주도 신화가 걸음걸이에 맞게 박자를 맞추며 이야기가 된다. 그 사이 신촌 옛길을 벗어나 신촌 해안가에 다다른다. 시커멓게 뾰족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바위로 파도가 들이친다. 하얗게 이는 포말. 파도. 억새풀을 뒤흔드는 바람. 환상의 나락으로 안내하는 억새풀 군락. 그곳에 닭모루 전망대(팔각정)가 정좌하고 있다.

11.

닭모루 언덕에 있는 전망대(정자). ⓒ차노휘

바람결에 몸을 뒤척이는 억새풀을 헤쳐 전망대로 향한다. 구릿빛 햇살이 누런 억새풀에 비춘다. 쨍그랑 하며 거울 깨지는 소리가 들릴 것도 같은데 바람만 무성하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마을 사람들이 버섯바위라고 부르는 기암괴석을 내려다본다. 기암괴석이 오히려 더 벼슬이 있는 닭 머리 같다.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서쪽 해안에 있는 닭모루. 마을주민들이 예로부터 닭모루(표기상 ‘모’의 아래아(ㆍ)를 ‘ㅗ’로 쓴다. 불리는 이름도 당머루, 닭머루 등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닭모루’라고 표기한다)라고 불러온 언덕이다. 명칭 표기도 제각각이고 유래에 대한 정설도 없다. 마을에서는 이 일대 해안이 닭이 알이나 새끼를 품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닭모루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전망대에 서 있으니 탁 트인 제주 북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경과 검은 현무암 기암괴석, 한라산도 보인다. 경치가 좋아 산책로로 많은 사랑을 받을 만한데도 사람은 없다. 파도소리만 지척에서 들린다. 

먼 바다 수평선을 향해, 고함 한번 지르고는 잘 만들어진 데크를 따라 해안도로로 눈길을 준다. 닭모루 해안에서 신촌 포구를 거쳐 신촌어촌계까지 가는 1.8㎞ 구간은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 걷기 좋은 해안길인 ‘해안누리길 50번’ 길이기도 하다.

닭모루 언덕에 있는 전망대(정자)에서 바라본 억새풀 군락. ⓒ차노휘

지금의 제주란 명칭은 고려 고종(1214년)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바다를 건너가는 고을’이란 뜻이다. 하지만 통일신라에도 ‘고을’이 아니라 고을라의 후손 2인이 통일 신라에 입조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사용한, 한 나라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476년 4월 ‘탐라국이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쳤다.’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 시대 1105년(숙종 10년)에 탐라 국호가 폐지되고 탐라군으로 고쳐져 중앙 관원이 파견되어 민정을 관장하였다.

앞으로 펼쳐질(펼쳐졌던) 제주도 저항의 역사. 그것은 고려시대 탐라라는 국호를 잃은 시점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제주도 출신 소설가 현기영 선생의 산문집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본의 아니게 현기영 선생의 작품을 많이 인용하게 된다. 아무래도 제주도 출신이라는 점이 당시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국호를 잃고 고려에 복속된 이후, 크고 작은 민란을 간헐적으로 일으키며 중앙정부에 저항하던 탐라는 서기 1267년 몽고(元)에 굴복한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김통정의 삼별초 군사가 입도하자 거기에 합류하여 여몽 연합군과 치열한 항쟁을 벌이게 된다. 

고려의 김방경과 원의 혼도가 이끄는 여몽 연합군이 전함 160 척에 군사가 만명이었다니 그 전쟁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싸움에서는 언제나 패배한 쪽이 훨씬 큰 희생을 치르는 법이니 삼별초 군사와 도민의 인명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제주의 산야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야말로 병과(兵戈)가 바다를 덮고 인간의 간뇌(肝腦)가 들판을 뒤바른 처참한 싸움이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부터 여다(女多)가 시작되었고, 여인들이 부르는 민요가 슬픈 가락을 띠게 되었단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이 섬에 대한 조정의 가렴주구는 여전했다. 그러니까 제주는 이른바 조선의 내국식민지였던 셈이다. 특히 제주 삼읍에 수천 명의 관노비들이 크게 시달림을 받았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섬 밖으로 도망가는 수가 늘어 한때 해외 유망자 수가 만명에 달했다고 한다(《헌종실록》). 

그래서 인조 7년부터 도민에 대한 출륙(出陸) 금지령이 내려져 순조 말에 이르기까지 무려 이백 년간 도민들은 바다 한가운데 갇혀 유폐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평선에 갇힌 원악도(遠惡島), 제주섬은 한마디로 물 위에 떠 있는 감옥이었다. 유배객은 물론이고, 그 섬에 사는 양민들마저 수평선에 갇힌 수인(囚人)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기영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다산책방 刊), p.218~219

신촌포구 까페 앞에 있는 소녀상. ⓒ차노휘

앞서 살펴봤던 환해장성. 삼별초를 막기 위해 관군이 세운 것이지만 오히려 제주도민과 연합한 삼별초가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을 맞서 싸우는 장소로 탈바꿈된다.

위의 내용처럼 1271년(원종 12년)에 삼별초군이 제주로 와서 항파두리성을 쌓고 김통정 장군을 앞세워 항쟁을 일으켰으며, 1273년(원종 14년)에 여ㆍ몽 연합군이 삼별초군을 평정한다. 이때부터 1374년(공민왕 23년)에 최영 장군이 원나라 출신 목동들이 일으킨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여 영토주권을 회복하기까지 원나라에서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약 100년간 직ㆍ간접적 탐라를 지배한다.

이렇듯 제주도는 고려시대부터 약탈의 대상이 된다. 현기영의 표현대로 내국식민지였고 원악도였다. ‘나(우리)’ 가 아니면 돌봐줄 수 없었던 곳. 제사풍습에서 볼 수 있었듯 도외지로 나가는 사람까지도 챙겨서 ‘우리’를 잊지 않았던 일종의 ‘괸당문화’도. 

핍박 받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우리)’가 뭉쳐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나(우리)’를 돌봐주지 않았다.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뜻있는 ‘한명’이 희생하는 ‘장두’의 역사를 낳았다.

올레길 18번 코스 종점이자 19번 코스 시작점인 조천리 만세동산.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김장환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현 만세동산)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조천만세동산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저항정신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하나의 선 위에 전개된 결과이다. 그 정신은 ‘제주 4‧3’까지 이어졌다.

조천포구에 있는 연북정(戀北亭, 1590년 절제사 이옥(李沃)이 건축). 연북정은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제주에 부임해 오거나 귀양 온 관리가 한양에 있는 임금을 그리워하며 절을 하고 바라보던 곳이다. 조천포구는 화북포구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까지 관원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關門)이었다. ⓒ자료 사진 갈무리
올레길 18번 코스 마지막이자 19번 코스 시작점인,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김장환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21일 조천읍 미밋동산(현 만세동산)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던 것을 기려 세운 조천만세동산 기념관. ⓒ차노휘

나는 닭모루 언덕을 지나 천천히 데크 길을 걸으며 억새풀 속으로 걸어간다.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억새무리는 더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쉼 없이 흔들리는 줄기와 달리 깊고 단단히 뭉쳐 있는 뿌리는 어떤 바람에도 뽑혀나가지 않을 것이다. 강인한 제주인의 모습처럼 말이다. (제주올레길 18번 끝)

※ 제주도 올레길 18번 코스를 걸은 날짜는 2016년 12월 20일이었다. 참고한 책은 현기영의 《순이삼촌》,《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지상의 숟가락》등과 인터넷 네이버 지식백과 편과 기사 몇 편을 참고 했다.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는《기차가 달린다》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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