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올레길 19번-청빛으로 아침을 여는 함덕 서우봉 해변

1.

이른 아침 서우봉에서 바라본 함덕 해변. ⓒ차노휘

“와우!”

서우봉 중턱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절로 감탄사가 터졌다. 짙은 블루빛 바다는 어둠과 섞여 있고 해변에 몰려있는 건물은 각각 빛을 안고 있었다. 먼 곳에서 바라보니 보석처럼 빛이 났다. 

빛나는 별들. 해변으로 밀려드는 청빛 새틴 바다에 가라앉은 색색의 빛들. 듬성듬성 서 있는 해안가 가로등은 상대적으로 밝은 백색 빛을 품었다. 판초우의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관현악기 소리였다. 발아래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는 타악기 소리였다. 이 모든 광경을 지휘하듯 여명이 둥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6시27분 김녕 초등학교 버스정류장에서 첫차를 타고 함덕 서우봉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전날 묵었던 숙소가 김녕 초등학교 근처 버스 정류장이었다.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었지만 마냥 숙소에서 시간을 뭉개고 싶지 않았다. 함덕에 도착하자 잔뜩 흐려있던 하늘이 후두둑 빗줄기를 쏟아냈다. 승강장 박스에서 준비해온 판초우의를 입었다.

전날, 해가 저물 무렵 도착한 함덕 서우봉해변 모래사장에는 관광객들로 넘쳤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겨울 해변이지만 모래사장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바람에 모래가 유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모래사장에 망이 씌워져 있었다. 

관광객들 틈에서 여유를 부리고 싶었지만 어렵게 구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여섯시 이전까지만 세탁을 해줄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하루 종일 걷느라, 온통 땀으로 젖은 옷을 빨리 벗고 싶었다. 따뜻한 물이 그리웠다.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승강장으로 향했다. 

비오는 이른 아침 함덕 서우봉해변 입구. ⓒ차노휘

승강장 박스에서 배낭까지 완전히 판초우의로 덮고 모래사장으로 향한다. 올레길은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서우봉으로 나 있다. 빈 상가 앞에 가로등이 가는 빗줄기를 비추고 해변으로 향하는 도로변 나무들은 바람에 둔하게 흔들린다. 어둠에 낮게 움츠린 모래사장. 어둠 속에서도 위엄을 자랑하는 서우봉. 야자수 가로수길을 지나 서우봉 중턱쯤의 정자에서 잠시 빗줄기를 피하면서 지나온 길을 바라본다.
 
전날, 조천만세동산에서 2시40분에 19번 코스를 시작했다. 19번 코스는 조천만세동산에서 시작하여 신흥해수욕장, 함덕 서우봉해변, 북촌 포구, 너븐숭이 4‧3기념관을 거쳐 김녕 서포구에서 끝난다. 도상거리 18.6km이고 소요시간은 6~7시간이며 난이도는 중간정도다. 바다와 오름, 곶자왈, 마을, 밭 등이 있어 가장 제주도다운 곳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가장 제주도다운 곳(것)은 어떤 곳(것)일까. 제주도는 흔히 세 가지가 많다고 한다. 여자, 바람, 돌. 여다(女多)의 원인은 앞서 살펴본 현기영 선생의 산문집에 따르면 삼별초와 연합해서 여몽(麗蒙)에 대항하다 많은 남자들이 전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생활전선인 거친 바다가 앗아간 목숨들을 제외하더라도 저항의 역사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사면이 바다인 섬이라는 지형은 바람이 많은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제주 바람은 유독 사납고, 돌풍을 동반할 때가 많았다. 

사람으로 하여금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온통 구멍이 송송 뚫리고 까맣고 못생긴 돌, 현무암이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듯이 도처에 깔려 있다. 제주의 흙색을 닮은 이 돌이 내가 보기에 가장 제주를 제주답게 만들어주는 3多 중의 으뜸이었다.

19코스 시작점인 만세동산을 지나가면 농로가 나온다. 농로 양 옆으로 잡초 넝쿨이, 넝쿨을 가로지르며 돌담이 있다. 돌담 사이사이로 밭들이 이어진다. 돌담은 대충 쌓아올린 것 같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처음 제주도에 왔을 때 이 까맣고 못생긴 돌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 조선시대에 제주도를 방문했던 선비는 끝없이 이어지는 제주도의 돌담을 보고 ‘흑룡만리(黑龍萬里)’라 표현하기도 했다.

만세동산에서 관곶으로 향하는 농로. ⓒ차노휘
집 주위 돌담. ⓒ차노휘

농로를 걷다보면 밭 사이로 쌓아놓은 낮은 돌담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밭담’이라 한다. 밭을 경작하면서 나온 돌을 다른 밭과 구분 짓기 위해 쌓아놓는다. 그러고도 또 나온 돌을 밭담과 거리를 두고 또 쌓는다. 

그것을 ‘잣담’이라고 한다. 잣담은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 되거나 도시락이나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가 된다. 집 주위를 에워 쌓은 담은 ‘집담’이다. 집담은 바람과 이웃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처마 아래 높이로 쌓는다. 방목하는 말 등이 불쑥 들어오는 것도 막을 수 있다. 해안과 가까운 가옥은 파도에 의한 염해(鹽害)를 막는 기능도 한다.

해안가 돌담1. ⓒ차노휘
해안가 돌담2. ⓒ차노휘

‘산담’은 묘지 주위로 쌓은 돌담이다. 우마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산불이 났을 때도 방지할 수 있다. 원래는 사자(死者)의 영혼이 깃드는 공간 혹은 사자의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쌓았다고 한다.

그밖에 원담(갯담), 잣성, 성담, 환해장성(環海長城)등이 있다. 올렛담(큰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돌담), 우영담(택지 옆에 붙어있는 텃밭의 돌담) 또는 통싯담(돼지우리를 둘러놓은 돌담)처럼 돌담이 쌓인 장소나 위치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들도 있다.

언뜻 보기에는 어수룩하게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강한 바람에도 끄덕 없다. 돌과 돌 사이의 구멍 덕분이다. 바람을 완전히 막지 않고 통하게 한 조상의 지혜가 엿보인다. 화산활동으로 생긴 현무암의 활용. 척박한 자연환경을 활용한 생활의 힘이 지금은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되었다.

산소 주위의 돌담. (자료사진 김형훈)

하지만 과거 제주를 찾은 이방인들은 돌담을 썩 좋게 보지 않았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충암 김정(金淨)이 제주도로 유배를 와서 돌담을 보고는, 거무튀튀하고 볼썽사납다고 했다. 1901년에는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지그프리트 겐터(Sigfried Genthe)가 제주도를 찾았을 때, 그는 시가전을 대비하듯 벽을 쌓아놓고, 검은 도장을 찍어 놓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돌담을 따라 아스라하게 바랜 잡초들을 보며, 먼 언덕에 발가벗은 나무 실루엣에 눈길을 고정한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다. 지는 해는 공기의 움직임을 느리게 한다. 느린 템포 속에 수면제가 들어있는 듯 나른해진다. 누그러진 햇살이 바래지는 동안, 파도소리가 먼 곳에서 들린다. ‘관곶’이다.

2.

관곶. ⓒ차노휘

화산섬 제주도의 해안선은 대게 검은색 현무암 지대다. 화산 용암이 바다로 흘러들면서 식은 현무암인데, 그것이 거대한 검은 수컷처럼 바다로 날카롭게 뻗어 들어간 곳을 토속어로 ‘코지(곶)’라 하고, 물속 바위와 물 밖으로 돌출한 바위를 ‘여’라고 한다. 

코지와 여의 검은 암괴는 거기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포말 때문에 우쭐우쭐 살아 있는 수중 동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그 물속에 해물이 많다. 해초들이 숲을 이루어 너울거리고, 형형색색의 물고기들과 전복·소라 등 온갖 해물들이 풍성하게 자란다. 

기름진 ‘바당밭(바다밭)’이다. 이렇게 마을 앞바다에 해물이 풍성하다보니, 연못이 있으면 개구리가 생기듯이 자연히 잠녀들이 생겨났다. 제주에서 가장 잠녀가 많은 곳이 하도리(제주 올레길 21번 코스에 있다)인데, 앞바다 전체가 흰 거품의 백파로 덮일 정도로 물속 여들이 많고, 그래서 해물이 많다. 그 백파의 흰 거품 속에서 잠녀는 태어난다.
-현기영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다산책방 刊), p.42~43

농로를 벗어나자 아주 조용하고 작은 해안가가 나온다. 표지판에 ‘관곶’이라고 쓰여 있다. 관곶은 제주에서 해남 땅끝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곶(83km)이자 한라산과 제주시의 야경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날씨가 쾌청할 때에는 추자도와 남해 도서까지 조망할 수 있다고 하니, 대륙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임이 분명하다.

곶의 토속어인 코지(제주도에서 코지가 바로 지명이 된 곳은 섭지코지일 것이다). 거대한 검은 수컷처럼 현무암이 바다로 날카롭게 뻗어 들어간 곶이 형성된 곳. 조천 포구로 가는 길목에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 각종 선박이 기항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이곳을 관곶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천 포구가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함으로써 제주 목사, 선비, 유배자, 상인, 일반인 왕래와 도민의 상거래도 성행했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송시열, 추사 김정희, 최익현, 김윤식, 박영효 등 많은 사람들이 유형 생활을 한 유배지였다고 하니 학문 발전에도 기여를 했으리라. 

무속 신앙 때문에 좀처럼 뿌리 내리기 어려웠던 이곳에 유학을 전파했을 것이다. 유배지로서의 학문 수혜의 땅. 지리적으로 근접한 곳에 먼저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으로의 유학 등. 제주도는 대륙에 비해 더 깨어있는 지식인이 많았으리라. 이들은 항쟁의 한가운데에 섰으리라.

오후의 쓸쓸한 바람이 뺨을 훑으면서 땀을 걷어간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발밑이 소란스럽다. 이 관곶에서, 착취당해 육지로 도망가려는 백성들이 불안에 떨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유배 온 지식인들이 육지를 그리워하며 해남 땅끝 마을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리움은 때로는 순풍을 달고 때로는 폭풍을 등에 업고 대륙으로 항해했을 것이다. 나는 이들의 한숨과 불안과 그리움을 그림자 삼아 벗하다가 아주 다급하게 발걸음을 뗀다.

신흥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관곶. ⓒ차노휘

다급한 걸음걸이가 땅을 진동시켰다. 학생모를 쓰고 급히 달려가는 이는 서울 휘문고보에 다니던 김장환이다. 그는 제주 조천 출신의 항일운동가 김시학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그 사실을 숙부에게 알리기 위해 제주도로 서둘러서 내려왔다. 하지만 주역들을 검거하기 위해 날 서 있는 일본경찰들을 피하고 원할하지 못한 배편 때문에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보름이나 지나서야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에게 서울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알리고는 품속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냈다. 김시범은 독립선언서를 찬찬히 보더니 손을 떨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니?”

이렇게 김장환, 김시범, 김시은이 중심이 되어 제주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한다. 김시범이 제주의 유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결정한다.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한다(보편적으로 시위 거사일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에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굳이 김시우의 기일로 택한 이유는 시위 주동자의 대부분이 조천의 세력가인 김해 김씨 집안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3월 21일 아침 조천리 미밋동산(현, 만세동산)에서 김장환 김시범 외 21명이 주축이 되어 조천리 주민과 인근 함덕·신촌·신흥 등지의 서당 생도 등 약 150여명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벌인다. 3월 24일까지 4일 동안 연달아 전개된다.

이와 같이 전개된 조천만세운동은 시위 주역들이 체포되면서 종료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을 뜬 청년들이 늘어난다. 또한 박세현과 김여석 등이 중심이 되어 궐기한 ‘기미격문의거’와 서귀포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후의 제주 민족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운동이 바로, 제주도 항일운동의 모태인 '만세운동'인 것이다.

3.

신흥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해녀 조형물. ⓒ차노휘

어둔 청빛이 한 꺼풀 씩 빛을 받아들인다. 비는 이울었다가 다시 시작된다. 다행히 짐 일부를 게스트하우스에 덜어놓고 왔다. 이틀을 같은 숙소에서 머무르기 때문에 큰 짐은 놔두고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챙겨서 작은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왔다. 겨울 비수기여서인지 영업하는 숙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김녕에 있는 모 게스트하우스에 방이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세 번째 숙소를 구하기 위해 전화를 한 뒤였다. 저녁 여섯시까지 세탁도 할 수 있다고 했다. 할인 등 조율할 만한 심적·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이틀을 거기서 머무르기로 했다. 버스를 타면 올레길 걷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오늘도 비가 오니 옷은 금세 다 젖을 것이다. 젖어도 걷기로 결심한 이상 불평은 하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맛보는 풍광은 저녁의 잔잔한 슬픔과 다른 삶의 활력이 공기 중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날 신흥해수욕장을 걸으면서 내내 접했던 에메랄드 빛 바다와 밀물에 해안가에 세워진 두 개의 방사탑이 잠기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가슴을 떨리게 한다.

이른 아침 공기는 상쾌함이 있다. 사람이 없어서 혼자 그 모든 것을 가진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 해도 따뜻한 기운이 돈다. 집 떠나있을 때면 더욱 그리움이라는 온기로 가득 찬다. 늘 함께해온 강아지들의 체온과 같다.

오른손으로 침대에 뛰어오르려는 강아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손아귀에 체온이 가득 차 있는 볼록한 삼각형 두개골이 들어온다. 양손으로 녀석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침대에 올려준다. 밤새 자면서 흘렸던 눈물이 말라 만들어낸 눈곱을 떼어주고 삼각형 귀 뒤쪽을 긁어준다. 이때 즈음이면 녀석은 나른하게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배를 쓱, 쓰다듬는다. 조금 전에 소변을 본 흔적이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시 앞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 시선에 녀석을 올려놓는다. 말똥한 녀석의 반질반질한 눈동자와 코. 녀석의 코에 내 코를 비빈다. 입 냄새가 맡아진다. 

다시 번쩍 들어 공중에 한번 띄웠다가 가슴에 꼭 품는다. 그리고는 침대 아래에 내려놓는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새벽 공기를 헤쳐 걸어갈 때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파노라마 같은 감정이다.

신흥해수욕장 도로 변에 목재와 각종 어구들로 멋을 낸 주택. ⓒ차노휘

 

함덕 서우봉 해안가에 있는 전통 고기잡이를 재현한 조형물. ⓒ차노휘

함덕(咸德)은 동네이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덕’은 너럭바위를 뜻한다. 함덕을 직역하면 함씨 할머니가 놓은 돌다리가 된다. 실제로 ‘함다리’라고 불리던 다리가 함덕해수욕장 입구 쪽에 있었다고 한다. 서우봉은 해수욕장 옆에 있는 오름 이름이다.산의 모양이 살찐 물소가 물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서우봉이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아도 캄캄한 오름이 버티고 있을 뿐, 물소 모양의 서우봉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확인할 수는 없다. 에메랄드 빛 바닷물, 검은색 현무암과 하얀 백사장도 자세히 볼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래도 나는 서우봉 둘레로 나 있는 올레 화살표를 따라 발을 내딛는다. 어스름. 빗방울. 판초. 사진을 많이 찍고 싶어도 손이 젖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새벽 여명에 몸을 떤다. 혼자 이 모든 세상을 전세 낸 것처럼 흥분된다. 지금, ‘오늘’이라는 시간을 내가 제일 먼저 열고 있는 것이다. (계속)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는《기차가 달린다》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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