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올레길 19번-이야기 속 《순이삼촌》

4.

동복 마을에서 김녕 마을로 이어지는 올레길 곁의 채소밭. 높은 밭담이 인상적이다. ⓒ차노휘

밤이 되면서 비바람이 연신 낮은 지붕을 쓸고 가는 소리가 거세진다. 동네 어귀에 있는 헐벗은 당산나무가 둔하게 몸을 비튼다. 뒷마당에 걸쳐진 이중 빨랫줄이 거센 바람에 겨워 윙윙 소리 내 운다. 비바람 치는 제주도의 시골 밤은 일찍 내리고 오밀조밀 게스트하우스 거실에 모인 객들은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인데도 오랫동안 함께 해온 것처럼 그들이 겪었던 ‘무용담’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는 일반 단층 주택을 개조했다. 방 세 개가 복도를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2인실이 기본인데 한 사람 당 3만원을 받는다. 조식 포함이다. 주인 남자가 직접 요리한 음식이 개인 쟁반에 밥과 반찬 몇 가지로 아주 깔끔하게 제공된다. 30대 중반의 키 큰 미남형의 주인은 서울에서 이주해온 이주민이며 신혼이다. 신혼집은 따로 있다고 한다.

주인남자가 새벽부터 올레길을 걷고 들어와 늦은 아침을 먹는 내게 제안했다. 오늘 저녁 작은 파티를 할 참인데 참석할 수 있냐고. 알고 보니 오늘 밤에 특별한 손님이 온다는 거였다. 특별한 손님은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이곳에서 묵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든 올레길을 걷고 난 '오늘' 찾아오는 거였다.

주인남자는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각자 먹을 만큼 술과 안주를 준비해오라고 한다. 주인도 몇 가지 음식을 서비스로 제공하겠단다. 그렇지 않아도 비수기여서 올레길을 걷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던 나는 이야기가 고팠던 참이었다. 흔쾌히 승낙했다.

6시가 조금 지나자 각자 사온 술과 안주, 주인장이 내 온 음식이 거실 앉은뱅이 식탁에 근사하게 차려졌다. 나는 식탁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둘러앉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올레길을 완주하고 온 손님은 아담한 키에 얼굴빛이 검은 삼십대 초반의 남자다. 

부르기 쉽게 그를 A라고 칭한다. A는 직장을 그만둬서 시간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내 왼쪽에 앉아서 주인남자와 그동안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안부를 묻고 있다. 맞은편에는 과거 보험사에 다녔다는 사십대 후반 남자가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서 하루 묵는다고 했다. 그를 B라고 칭한다. B는 주인 남자 옆에 앉았다. 내 오른쪽에는 대학 교수라고 하는 오십대 후반 남자가 앉았다. 그를 C라고 칭해본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소개가 끝나자 그동안의 일들이 유수 폭포처럼 쏟아졌다. 섬 속의 섬 세 군데(우도, 가파도, 추자도)까지 다 돌아 올레길 전 코스를 완주했다는 A는, 제일 마지막에 돌았던 추자도 이야기부터 꺼낸다(아,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추자도가 아득하게 멀기만 했다. 그래서 피부로 직접 전해지지는 않았다. 나도 그처럼 추자도를 제일 마지막에 돌았다). 

“추자도가 마지막 코스였는데 그곳에서 5일 동안 꼼짝없이 잡혀 있었어요. 도착하자마자 비가 오는 거예요. 3일 동안 정말로 꼼짝없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있었다니깐요. 그 뒤, 날이 개더군요. 그때서야 올레길을 돌 수 있었어요. 딱, 돌고나자 비가 다시 오는 거예요.”

그가 추자도를 돌 때 나는 막 올레길 첫 코스인 18번을 돌았을 때였다. 그날만 반짝 해가 났고 연속 비바람이 쳤다. 이번 주 일기예보도 맑은 날이 없다. 오늘도 비가 와서 새벽에 첫 버스를 타고 함덕 서우봉 해수욕장으로 가 얼마 걷지 않아서 온통 옷이 다 젖어버렸다. 

판초우의를 입어도 소용없었다. 비바람은 옷섶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공격했다. 그렇게 비바람 속에서 세 시간을 걷고 와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주인 남자가 챙겨주는 늦은 아침을 먹었을 때, 그 포근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려는 내게 주인 남자는 놀리듯 말했다.

“오늘 바람세기가 시속 40km예요. 해안가를 걸으면 날아갈 정도인데, 그래도 걸으시려구요?” 부른 배와 피곤, 나른함으로 몸이 늘어질 대로 늘어질 때, 왜 게으른 변명이 안 생길까. 주인남자 말처럼 날아갈 정도로 비바람이 쳤다. 핑계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은 그냥 게스트하우스에서 뒹굴뒹굴하며 지낼까? 하지만 나는 판초우의를 입고 길을 나섰다.

“지금은 좀 괜찮은데요, 전에는 어땠는지 아세요? 저는 올레길을 걷지는 않았어요. 여기 오신 손님들 이야기인데요, 어느 농로를 걷고 있었대요. 그러자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이 대뜸 하시는 말씀이, ‘비행기 타고 와가지고 왜 걸어, 힘들게?’라고 말하시더래요. 뭐랄까, 걷는 것을 이해 못하시는 거예요.”

주인남자가 추자도 이야기를 한참 꺼내는 A에게 한 잔 권하며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웃으면서 걸었던 경험을 풀어놓는다. 하지만 나는 걷는 것에 아직 새내기여서 이들의 말을 경청하기만 한다. 그러다가 제주도 문화 중 ‘괸당 문화’가 떠올랐다. 주인 남자도 외지인이라 겪었을 것 같아서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 저도 그 말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게스트하우스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가 이곳에 3년 전에 오픈했는데, 정말 그래요. 옆집 옆집이 이 집 주인 할머니 이모 되거나 고모 등 다 친척 분들이세요. 친척 분들이 한 동네를 이루고 사세요. 한 분한테 미움 받으면 다 미움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말 나온 김에 이 집 전 주인 할머니 따님이 결혼을 했대요. 북촌이라고 알아요?” 주인남자는 북촌을 말하며 내 얼굴을 쳐다본다. 북촌은 아침에 걸었던 19번 초반 코스에 포함되어 있었다.

함덕 서우봉 해변에서 새벽을 맞이하고 서우봉을 오르던 올레길은 정상 못미처서 왼쪽 숲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숲길을 한참 걷다보면 다시 탁 트인 바닷가 절벽에서 서우봉 둘레길과 올레길이 만난다. 해안가를 끼고 돌 때 잠시 소강상태이던 비가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판초를 입었지만 얼굴을 보호할 장비가 없었다. 비는 얼굴로 목덜미로 흘러들어왔다. 비는 비일 뿐 몸은 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안팎의 비. 땀. 그리고 흐뭇함. 얼마 전에 산 등산화는 방수가 된다 해서 비싸게 사서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지가 무릎부터 젖어들면서 발목 사이로 비가 새어 들어갔다. 판초 밖으로 나온 소맷부리도 마찬가지였다. 해 뜨는 시각이 7시 30분이라고 했는데, 여전히 시야는 밝지 않았다.

해안가를 십여 분 걷다보니 맞은편에 바다를 낀 마을이 보였다. 북촌 포구였다. 해안가를 낀 마을이 이 마을이 저 마을 같고 저 마을이 이 마을 같을 법도 한데, 늘 새롭게 다가왔다. 여행을 하면 얼마나 많은 변수가 생기는가. 

날씨뿐만 아니라 마주치는 사람들 표정에 따라 감정이 미묘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여행의 묘미 아닌가. 북촌에 발을 디디고 마을 초입에서 올레길 화살표시를 본 뒤 어느 민가 추녀 밑에 서서 옷매무새를 새로 하고 있을 때에야 주위가 밝아졌다. 8시 20분이었다.

비바람을 뚫고 서우봉 둘레길을 걷고 나서 들어 선 북촌포구 일대. ⓒ차노휘

주인 남자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북촌에 시집을 보냈나 봐요. 그랬더니 이웃에서 와서 왜 그렇게 먼 곳으로 시집을 보내느냐고 그러더래요. 실은 먼 곳이 아니거든요. 버스 타면 십분 정도 걸릴 거리인데도 먼 곳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들, 앞집 뒷집 옆집에 모여 살거든요.”

“그럴 만도 해요. 예전에는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평생 한 번도 안 가본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니까요.”

소주 ‘한라산’을 연거푸 마시던 대학 교수라는 C가 끼어들었을 때 나는 ‘정말요?’라고 반문했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 사오십 분이면 닿는 거리인데 평생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아주 쉬워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려면 한라산을 넘어야하는데, 오죽 높아요. 그래서 가보지 못한 거예요. 그 당시 이렇게 도로가 잘 나지는 않았고 한라산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 주위를 빙 돌아서 가야했는데, 그것이 더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래서 아주 급하면서 중요하게 가야 할 일이 아니면 안 가본 사람도 많았다는 거죠.”

내가 "아하", 라며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자, 계속해서 그는 경험담을 곁들여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말하자면, 16번코스를 걸을 때 다른 생각을 하다가 중간 스탬프 박스를 지나쳐 버렸어요. 다시 걸어 돌아갈까 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택시를 타고 갔죠. 택시 기사한테 물어봤어요. ‘아니 제주도 지도를 보면 왼쪽, 즉 한라산의 서북쪽은 오름도 많지 않아 돌도 적은 것 같고 너른 구릉지가 많아 밭도 넓고 그래요. 밭담도 높지 않고 낮아요. 반면에 동북쪽은 오름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돌도 많고 밭들도 오밀조밀하고 그렇더라구요. 개간한 땅도 적은 것 같고, 왜 그렇죠?’하고 물은 거죠. 그러자 기사 아저씨는 내가 봤던 것들이 맞는다면서 확인을 해주는 거예요.

동북쪽은 오름이 많고 땅이 척박해서 먹고 살기 어려우니 다들 바다로 나간다고 하더군요. 바닷가도 동북쪽은 항포구가 비교적 적은데 비해 서북쪽은 잘 발달해 있구요. 그래서 동북쪽 사람들이 억세고 강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환경이 사람을 강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강인한 성품. 가난하다. 반면에 서북쪽은 오름도 적고 평야지대가 많아요. 농토가 많아서인지 사람도 넉넉한 것 같고. 밭담도 높지도 않고 돌 고르는 것이 적으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농토가 넉넉하니 주머니 사정이 좋아 유복하다고 할 수 있지요.”

나는 C의 말이 끝나자 오전에 걸으면서 보았던 밭담에 대해서 말했다. “아, 오늘 제가 북촌 포구를 지나 김녕에 올 때까지 거의 농로를 걸었는데, 밭 주위 담이 다 높았어요. 그럼, 이곳도 척박한 곳이었나 보죠?”

그는 내 말을 바로 받아치며 말했다. “그럼요, 김녕도 동부에 속해요. 올레길 18번 코스부터 21번까지, 그리고 1번부터 5번 코스까지가 동부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도 한번 생각해보셔야 해요. 제주도는 한라산이 섬 가운데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고구마처럼 길게 누워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남북으로 나누고 있어요. 해발 1950미터나 되는 한라산이 있어서 도로나 교통사정이 요즘 같지 않던 예전에는 왕래하기가 어려웠어요. 동쪽이든 서쪽이든 한참을 돌아서 가야했으니까요. 그래서 교류가 없을 수밖에요. 말도, 기후도, 식생도 달랐구요. 평균 기온이 몇 도 차이가 납니다. 귤도 서귀포 일부 지역에서만 자생적으로 재배했어요.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개발이 되어 여러 곳으로 많이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연료비가 비싸서 북부 지역에서는 잘 안 합니다. 상대적으로 추운 북동부에 사는 사람들은 제주목이나 관청이 있어서 행정과 육지와의 교류와 상거래의 중심이었다면, 남서쪽에서는 따뜻한 날씨를 배경으로 농작물을 키우며 안온하게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동부는 척박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하늘에서 본 북촌 포구와 북촌 마을 전경. ⓒ포털 네이버 갈무리

대학 강의처럼 일목요연하게 말하는 C는 다시 한라산 소주를 연거푸 들이킨다. 주인남자는 21도 한라산 소주가 독하다며 올레소주를 고집한다. 나는 한라산에 맥주를 섞어 소맥을 만들어 마신다. 새삼스럽게 오늘 걸었던 밭과 숲 사이로 이어지던 올레길을 되새김질한다. 

검은 땅 색깔과 같은 높은 돌담이 밭 주위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는 말을 사육하기도 했다. 비를 맞으며 풀을 뜯고 있는 말 잔등이 빗물에 매끈했다. 빗속에서도 하늘을 덮은 잿빛 하늘과 먼 곳에서 서서 천천히 돌아가는 풍차가 조화를 이루며 겉은 검은 흙속에 파묻힌 당근의 붉은 뿌리와 새파란 잎의 조화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농로 너머 밭, 밭 너머로 보이는 풍력발전단지의 풍차. ⓒ차노휘

“이런 말이 있잖아요, 곳간에서 인심난다! 동북쪽이 거칠고 척박하듯 제주시내도 동부와 서부로 나눠진다고 합니다. 한라산 쪽에서 흘러내리며 제주 시내를 동서로 가르는 산지천을 중심으로, 즉 동문로터리를 기준으로 동부와 서부로 나뉘는데 동부는 동북 쪽 성향을, 서부는 서북쪽 영향을 많이 받아 산다고 할 수 있지요. 서부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 동부로 이사하지도 않아요. 문화가 다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살아온 방식도 다르구요.”

‘척박하다’라는 말. 농토가 척박하다는 것은 옛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었던가. 그래도 바다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현기영 선생의 책에 곶과 여가 많은 곳이 하도리라고 했고 하도리는 올레길 21코스에 속한다. 

“맞아요. 전에 제가 여기에서 2년 반 동안 보험회사 팀장을 했거든요. 확실히 제주시에 사는 보험설계사 분들의 영업 실적이 좋았어요. 생활력이 상당히 좋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얌전히 맥주를 들이키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B가 C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5.
주고받는 이야기는 제주 올레길에서 시작해서 전 제주로 넓게 확장되었다. 가까우면서도 먼 곳. 먼 곳이면서도 가까운 섬, 제주도. 농로를 걸어 동복리 마을운동장 곁의 중간 스탬프 박스에서 스탬프를 찍고 빗속 숲길을 계속 걸었다. 

그리고 만났던 ‘너븐숭이 4‧3 기념관’. 기념관에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이 있었다. 내가 막 순이 삼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주인남자가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하는지 제주도에서 불리는 ‘삼촌’에 대해 말했다.

“다들 아시죠? 이곳에서는 여자든 남자든 나보다 나이든 사람을 삼촌이라고 칭한다는 것을요? 이곳에는 이모가 없어요. 왜 인줄 아세요?” 주인남자는 웃으면서 모여 있는 사람의 얼굴을 일별한다. 그리고 아무도 답을 않자 설명을 이어간다.

“옛날부터 이곳에는 남자가 적었어요. 왜구나 육지 세력들의 남자 공출과 바다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해서. 하지만 자식을 낳아야 하니깐, 한 남자가 몇 여자를 책임져야 하는 일도 있었대요. 그것 때문이라고 알고 있어요. 한 밤중에 누군가가 다녀갔는데 아이가 깨어서 물어요. 엄마 지금 누구예요? 그러면 남자라고 말하기가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한 가지 호칭으로 통일해서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는 구실을 만들었다는 거지요. ‘삼촌’이 다녀갔다고.”

옆에서는 '아하', 라는 말이 터지기도 했다. 나도 실은 공감했다. 그 비슷한 문화를 일본 전국시대에 끊임없는 전쟁으로 남자가 줄어들자 한 마을에 남자가 여러 여자를 상대해야 하는 문화를 어느 책에서 읽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웃고 지나가는 호칭 이야기가 아니라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는 옴팡밭에 세워진 너븐숭이 기념관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기영의 ‘제주 4.3’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은 조천면 북촌리에 있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세워진 터가 공간적 배경이다. 1949년 1월 너븐숭이 일대에서는 북촌리 마을 인구 1천여 명 중 절반가량인 약 5백 명이 희생되었다. 남자는 다 죽었고, 어머니를 따라나선 어린아이들이 희생되거나, 집에 있다 토벌대들이 지른 불에 타 죽은 노인들도 있었다.

소설 속 화자는 8년 만에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여하러 고향 제주도로 간다. 그런데 순이 삼촌이 죽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삼촌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는데, 순이 삼촌은 나이 많은 여인으로 불과 두 달 전까지 1년 간 화자의 서울 집에서 식모처럼 밥을 짓고 집을 봐주다가 어느 날 문득 내려갔다. 

하지만 그렇게 일찍 죽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살했던 것이다. 자살한 연유는 곧 밝혀진다. 그녀는 끊임없이 환청에 시달려왔다. 환청의 원인은 바로 1949년의 제주 4·3 때문이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너븐숭이'는 넓은 바위라는 뜻이다. 일대에 넓은 바위가 많이 있다. ⓒ차노휘

30여 년 전 그 해 음력 섣달 열 여드렛날, 별안간 밖에서 연설 들으러 나오라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보통 때와 달리 군인들이 다니면서 재촉하였다. 군인들 가족과 순경 가족, 이어서 공무원 가족이 나머지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별안간 불이 났다고 소리쳤다. 동요하는 마을 사람들을 군인들은 총으로 위협했다. 마을 사람들이 군인들에 의해 돼지 몰리듯 하며 사람들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잠시 후 총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차례차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순이 삼촌도 행방을 알 수 없는 남편 때문에 도피자들 틈에 끼어 있다 자식 남매를 데리러 내려 왔다가 그만 화를 당한 것이다.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마을을 태우는 불빛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날 밤 사람들은 한길을 피해 모두 교실로 몰려 들어가 불안한 밤을 새웠다. 밤중에 도피한 사람들은 두 번 크게 놀란다. 한 번은 대밭이 타면서 터지는 소리를 총소리로 잘못 알고 놀랐고, 또 한 번은 죽은 줄만 알았던 순이 삼촌이 살아 돌아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렸을 때였다. 삼촌은 총살을 당하기 전에 기절을 한 상태여서 다행히도 살아서 돌아온 것이었다.

그 학살 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혼자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은 그 후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생겼고, 나중에는 환청증세도 겹치게 된 것이다. 평생 그날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 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30년을 과부로 살아오다가 그날의 일을 환청으로 듣게 되고, 마침내 그 살육의 현장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화자는 마을 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그 일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 달 전에 자살한 순이 삼촌의 삶은 이미 30여 년 전의 시간 속에서 정지해 버린 유예된 죽음이었다고 생각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가운데에 서 있는 비가 《순이삼촌》 문학비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누워있는 비석은 이곳에서 숨진 순이삼촌(음독자살)뿐만 아니라 그 당시 희생자들을 형상화한 듯 보인다. ⓒ차노휘

6.
방밖은 비바람이 거세져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술자리는 익어만 간다. 잿빛에 잠긴, 물안개에 잠긴, 숲길도 그리고 밭 둘레로 검은 현무암 돌담이 쳐진, 그리고 그 안에 아직도 새파랗게 자라고 있는 당근, 알타리 무우, 마늘, 파 등의 녹색 식물과 그 뒤로 아득하게 돌고 있는 풍차. 풍차 뒤로 검은 구름이 곧 내려올 듯 넘실거렸다. 그것 또한 아픈 과거 역사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저 나는 걸으면 됐다. 걷다보면 내가 목표한 곳(것)이 나올 것이다. 아무런들 어떠하리, 걷는 것 자체가 내게 새로운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것을. 약간의 배고픔은 걷는 자체의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일은 김녕 해수욕장에서 시작하는 20번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제주 올레길 19번 끝)

동복 마을을 지나는 농로 주변에서 마주친 간이 말 목장. ⓒ차노휘
동복 마을을 지나는 올레길 주변 채소밭의 푸르름과 잔뜩 내려앉은 비구름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차노휘
농로를 걷다가 본 풍경. ⓒ차노휘

※ 제주도 올레길 19번 코스를 걸은 날짜는 2016년 12월 21일이었다. 참고한 책은 현기영의 《순이 삼촌》,《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지상의 숟가락》등과 인터넷 네이버 지식백과 편과 기사 몇 편을 참고 했다.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는《기차가 달린다》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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