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올레길 18번- ‘제주 4·3’의 상흔이 있는 곤을동

 5.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주…”

경찰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이는 다섯 살 난 소년이었다. 소년 뒤로 그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와 두 살짜리 계집아이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경찰은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 그러면 살려주마.”

소년은 무슨 말인가 싶어 경찰을 올려다봤다. 미소를 거둔 경찰은 권총 든 오른손을 들어 한라산 쪽을 가리켰다. 소년은 일어섰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고 어느 사이 오줌을 지렸는지 바짓가랑이가 다 젖어 있었다. 한 발짝을 겨우 떼어 경찰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담장 너머에서 숨죽인 주민 몇이 훔쳐보고 있었지만 그들 또한 겁에 질려있어서 어떤 방패막이도 되어주지 못했다. 소년이 막 대문을 나서려고 할 때 총소리가 울렸다. 총탄을 등에 맞은 소년이 문도 나서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별도봉을 지나 곤을동 터에 도착했지만 내내 뭔가가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위 이야기 속 소년 진우의 아버지, 이덕구였다. 부인 양후상과 두 살 딸도 죽었다. 주민들은 당시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이 '아버지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라고 해서 산 쪽으로 뛰어가는 아이를 뒤에서 쏘았다고 했다.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서 태어난 이덕구(李德九, 1920년~1949년 6월 7일)는 ‘제주 4·3’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어릴 때 일본에 유학했고 학병으로 관동군에 강제 입대한 적이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한라산으로 입산했다. 1948년 7월과 8월 사이에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이자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자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경찰은 이덕구의 항복을 촉구하면서 가족들을 위협했다. 항복하지 않자 그의 가족을 거의 몰살시켰다. 일본에서 4·3 진상규명운동에 앞장섰던 ‘재일본 4·3유족회’ 회장 강실(이덕구의 생질)은 울음을 삼키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48년 12월 26일 삼촌 가족과 친인척 20여명이 몰살되었습니다. 그들이 찾아온 것은 12월 20일경이었습니다. 경찰은 우리 어머니를 포함해 삼촌의 가족과 친인척 20여명을 연행했습니다. 처음에 끌려간 곳은 조천지서이고 곧 읍내 제1구서로 옮겨졌다가 약 일주일만인 48년 12월 26일 별도봉에서 학살당했습니다…”

1949년 6월 7일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이덕구의 주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주검은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걸쳐 있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얼굴이 기울어져 있고 한쪽 입가에는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다. 잠자는 듯 표정은 평온하다. 앞가슴 주머니에 집행인이 일부러 꽃아 놓은 듯한 숟가락 하나가 있다. ⓒ자료사진

명당 설화가 전해오는 별도봉이 한 가족의 몰살 장소가 되었다. 내내 내 뒤통수를 잡아당겼던 것은 그들의 영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 속 제주 4·3은 곤을동에서도 아직 떠나지 못한 혼령들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겨울인데도 푸른 풀들이 예전 집터와 돌담 아래, 올레길 사이사이에서 무성하게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오히려 슬픔이 몰려왔다.

비록 정부군(정부군에 반하는 유격대, 무장대를 토벌한다 해서 토벌군이라고도 한다. 경찰, 군인 및 민보단이라는 민간인이 조직한 단체들이 이에 속한다)이 쫓는 유격대이지만 제주도 주민이나 어린이들에게 유격대원들이 잠시나마 영웅으로 대접받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아래는 현기영의 장편소설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물론, 우리는 재산(在山) 유격대의 활동이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을 산군이라 불렀고, 산군 대장 이덕구를, 날아오는 총알도 날쌔게 몸 비켜 피하고, 무릎관절에 스프링이 들어 있어서 지붕도 훌쩍 뛰어넘고,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축지법을 하는 신출귀몰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덕구 대장이 아이들 마음속에 강렬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던 것은 그가 전투에 잘 싸우고 있는 동안인 두 달 정도에 불과했다.

(중간 생략)

그리하여 아이들 사이에서 ‘산군’, ‘산사람’이란 용어는 잠깐 사이에 ‘산폭도’로 바뀌어버렸다. 다른 사고, 다른 행동은 철저히 따돌림 받는 아이들 세계에서, 식구들 중에 누군가 토벌대에 희생된 아이는 그 사실을 계속 숨기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 역시 내 친척, 동네 사람들을 폭도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현기영의《지상의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 刊), p73~75

6.

곤을동은 한라산이 발원지인 화북천이 바다를 향해 흐르다 별도봉 동쪽에서 두 갈래로 나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천 안쪽에 있던 마을이 ‘안곤을’이라고 불리고, 하천과 하천 사이에 있던 마을을 ‘가운데곤을’, 바깥을 ‘밧곤을’이라고 했다. 

밧곤을과 가운데곤을 주민들은 ‘덕수물’이란 용천수를, 안곤을 주민들은 ‘안드렁물’이란 용천수를 식수로 사용하였다. 곤을동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처럼 물이 풍부했다. 

작지만 마을 공회당도 있고 안곤을과 가운데곤을에는 말방앗간도 있던 전형적인 자연마을이었다.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으면서 생계를 꾸리던 이곳 주민들이 희생된 것은 1949년 1월 4일 불시에 들이닥친 토벌대에 의해서였다.

곤을동에 있는 방사탑과 곤을동 4‧3유적지 조감도. 방사탑은 마을과 마을 주민들을 액운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운 탑이다. ⓒ차노휘

1949년 1월 4일 오전 열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다 해진 옷을 입고 입술이 벌겋게 부어터진 청년이 곤을동 마을로 달려왔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봐도 겁에 질려 말을 걸지도 못하고 쫓기다시피 내달렸다. 

마을 사람들도 분명 그 청년이 군인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섣불리 도울 수도 없었다. 발각되면 재판 없이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그 자리에서 총살당할 것이 뻔했다. 당사자만 죽이면 다행이었다. 일족 모두 같은 죄목으로 죽일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청년이 마을 골목길에서 사라졌을 때 서북청년단 두 명이 나타났다. 골목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과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노인들에게 다짜고짜 총부리를 들이밀며 금방 도망간 빨갱이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하지만 모두들 고개를 흔들었다. 그 청년을 쫓아간 것도 아니었고 상황을 판단하기 전에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서북청년단은 마을 사람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집안 곳곳을 살폈다. 심지어 방안 이불까지 들췄다. 신발을 신은 채였다. 그래도 도망간 청년을 찾을 수 없자 모여든 동네 사람들을 향해 빨갱이를 숨겨준 폭도 집단이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물러갔다.

사건이 터진 것은 점심시간이 지난 뒤였다. 군인 1개 소대(42명가량)가 곤을동을 포위하고 또 다시 집을 수색했다. 도망간 청년 대신 젊은이들 10여 명을 앞바다로 끌고 가 총살했다. 마을(안곤을, 가운데곤을)까지 불태워버렸다. 나머지 남자 어른들을 화북초등학교에 있는 지서로 끌고 갔다. 그들은 다음날 연대 바닷가에서 총살당했다. 동곤을(화북천 동쪽마을)마저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곤을동으로 도망갔다던 무장대는 실제로는 곤을동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근처인 별도봉에 숨어 있었다. 곤을동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곤을동에서 화북천을 건너 화북동 금산마을로 연결된 작은 길이 사진 속에 보인다. 지금 곤을동에는 불타버린 집터와 올레길(집과 마을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만이 남아 있다. ⓒ차노휘

1998년에 제주 4·3 50주년을 맞으면서 ‘제주 4·3 제50주년 학술 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회는 4·3 때 가장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마을 가운데 주민들이 돌아와 마을을 이전처럼 복원하지 못해 버려지거나 단순 농경지로 바뀌어 더 이상 마을로 존재하지 않고 사라진 마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제주의 마을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시기는 1948년 가을부터 겨울 사이이다. 4·3이 발생하면서 군대와 경찰은 해안지에 주둔하였고, 무장대는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자연스럽게 무장대와 중산간 마을은 왕래가 잦았다. 무장대가 필요한 식량을 대어 주거나, 연락을 맡기도 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같은 마을 사람들이거나 안면이 있어서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정부군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모두 해안지대로 내려 보내고 무장대가 은거할 수 없도록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린다는 전략을 세웠다. 명령을 어긴 채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처단하기로 했다. 이런 요지로 1948년 10월 17일에 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포고문을 발표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대로 간주하여, 강력한 토벌작전을 전개한다.”

그 무섭던 소까이(疏開). 온 섬을 뺑 돌아가며 중산간 부락이란 부락은 죄다 불태워 열흘이 넘도록 섬의 밤하늘을 훤히 밝혀놓던 소까이. 통틀어 이백도 안 되는 무장폭도를 진압한다고 온 섬을 불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든 격이었다. 그래서 이백을 훨씬 넘어 삼만이 죽었다. 대부분 육지서 들어온 토벌군들의 혈기는 그렇게 철철 넘쳐흘렀다. 특히 서북군은 섬을 바닷속으로 가라앉힐 만큼 혈기방장하였고 군화 뒤축으로 짓뭉개어 이 섬을 지도상에서 아주 없애버릴 만큼 냉혹했다.
―현기영의〈해룡이야기〉《순이삼촌》(실천문학사 刊), p149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에서 자행된 소개(疏開)에서도 살아남은 곤을동은 다음 해에 마을이 불타고 동네 사람들이 총살당했다. 초토화된 유일한 해안선 마을이다. 무장대라 추정되는 청년이 곤을동에서 사라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주민들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정부군에 잘못 보이면 바로 죽음이었다. 살아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살아내야 할 세월이었다. 그 당시가 얼마나 살벌한 시대였는지, 현기영의 소설 중에서 한 대목을 발췌해본다.

이 소설 속 화자인 소년은 매일 관덕정을 지나 등교해야 했다. 관덕정에는 반란군(유격대, 무장대라 칭하는 저항군을 말한다) 주검을 전시하기도 했다. 어떨 때는 검게 그을린 얼굴만 뎅그러니 내걸렸다. 그 이유에 대한 화자의 회상 장면이다.

나는 장성한 다음에야 그 끔찍한 만행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하긴 내막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은폐되어 있거나 복잡하기는커녕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친다. 증언자들은 더 보탤 것 없는 한마디 말로 이렇게 설명한다.

“최단 시일 내에 제주사태를 마감하라는 것이 상부의 명령이었지. 그러자 시간에 쫓긴 토벌대 사령부는 일계급 특진이라는 미끼를 걸어놓고 말단들을 살육 경쟁에 내몰았던 거야. 처음엔 사살한 폭도의 한쪽 귀를 잘라오라고 했는데 말이야, 양쪽 귀를 잘라와 전과를 두 배로 부풀리는 놈이 없나, 심지어 노인, 여자들을 죽여 귀를 잘라오는 놈들도 있었거든. 산에서 귀 잘린 노인, 여자들의 시체가 많이 발견되었단 말이야. 그래서 아예 목을 잘라오라고 한 거라구.”

“그러면 까맣게 그슬린 머리통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그건 또 이렇지. 민보단이라고, 왜 죽창 들고 토벌대 뒤따라 다니는 민간인들 있었지 않은가. 토벌대가 산사람을 생포하면 직접 죽이지 않고 민보단에게 시킬 때가 종종 있었어. 왜 그런고 하니, 그게 다 상부의 지시인데, 섬 백성으로 하여금 제 동족을 죽이게 하여 공범자를 만들자는 책략이지. 하여간 총을 들이대고 죽창질을 하라고 위협하는데 안 할 도리가 있나. 그리고 죽창에 사람이 금방 안 죽거든. 그래서 죽창질한 후에 불태워 죽이는 거지. 참으로 처참한 일이야.”
  ―현기영의《지상의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 刊), p78~79


7.

화북 옛길. ⓒ차노휘

한라산이 발원지인 화북천은 겨울이라 말라 있었다. 하천으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화북 비석거리’로 우회해야 한다. 다행히 마른 천을 건너 화북동 금산마을에 도착했다. 아쉬운 듯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봤다. 이른 아침에 비가 왔는데, 정오 햇살은 이마에서 소금처럼 빛났다. 눈을 감았다. 귓전으로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시간이 흘러 마을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다. 안곤을은 복원되지 않았다. 하천과 별도봉 사이에 있어서 비가 오면 고립되었다. 다른 마을과 떨어져 있어서 다시 피해를 볼까 두렵기도 했다. 먹는 물이 멀어서 길어다 먹는 불편함도 있었다. 땅을 팔아 버린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떠난 곤을동 마을이 이렇게 서서히 잊혀져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아픈 진실은 영원히 묻히기 싫었나 보다. 올레길 18번 코스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빈터를 보며 그 당시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올레길은 화북포구를 끼고 돌았다. 

나는 비릿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나른하게 귓전으로 밀려오던 파도소리가 ‘멜(멸치) 후리는 소리’를 동반했다. 

엉허야 뒤야
엉허야 뒤야 
어기여뒤여 방애여 
동깨코라근(동쪽 그물일랑) 등곱은 여로 
서깨코라근 소여콧들로 
당선(조업을 지휘하는 배)에서 멜발(멸치떼의 움직임)을 보고 
망선(그물배)에서 후림을 노라
닷배에서 진을 재왕
추안골(추자도 근해) 사수안골(사서도 근해) 궤긴(고기는) 
농궹이와당(동김녕 앞바다)에 다 몰려 놓고
앞궤기랑 선진을 놓고
뒷궤기랑 후진을 노라 
배에 터위(떼배) 놈덜은 
웃베리를(윗벼릿줄을) 실작 들르라 
한불로 멜 나간다
그물코의 삼천코라도 
베릿배가 주장이여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동김녕리에 사는 김경성(1930년생) 녹음 소리 채록(1989년)

화북 포구는 조선시대 조천 포구와 더불어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으로 관에서 처음으로 축조한 포구이다. 수많은 유배자와 관원이 이곳을 거쳐 갔다. ⓒ차노휘

멸치 후리는 소리는 모래사장이 발달한 바닷가에서 ‘후리질’로 멸치를 잡으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후리질이란 긴 그물로 고기떼를 둘러친 다음 뭍에서 그물 양 끝을 끌어당겨 잡아내는 방법을 말한다. 지역에 따라 ‘멜 후리는 소리’ 또는 ‘멸 후리는 소리’라고도 한다.

곤을동은 바다에 ‘원담’을 만들었다. 원담은 살짝 만(灣)을 이룬 지형에 돌담을 쌓아 밀물에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그 안에 갇히게 하여 그물로 고기를 쉽게 잡는, 자연을 이용한 어로시설이다. 주로 멸치잡이에 유용하다.

곤을동 원담. ⓒ차노휘

곤을동에는 ‘멸치 후리 계(契)’가 두 곳이 있을 정도로 멸치잡이가 성황이었다. 야간에 횃불을 밝히고 멸치후리는 노래를 부르며 그물을 잡아당겼다. 

해안가를 걷고 있으려니 원담 안에서 무릎까지 걷어 부치고 멸치그물을 잡아당기며 부르던 ‘멜 후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가 사라지면 뒤이어 따라오는 파도처럼 또 다른 소리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섞이는 것이었다.

“박박 얽은 그 얼굴
덕구 덕구 이덕구
장래 대장가심(대장감)!”

별도 연대. 연대는 불빛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는 봉수대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봉수대가 높은 봉우리에 설치되었다면 연대는 해변이나 구릉에 설치된 차이점이 있다. 환해장성과 별도연대 모두 복원된 유적이다. ⓒ차노휘
제주도의 천리장성 환해장성. 고려 때 관군이 삼별초를 막기를 위해서 쌓기 시작했다. 삼별초는 진도 진영이 무너지자 마지막 장소로 제주도를 택했다. 이곳에서 1년을 버텼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왜구를 막는데 활용되었다. 제주도에 300여리에 걸쳐 축조되었다. ⓒ차노휘
삼양검모래해변은 금릉 해변과 협재 해변이 조개껍데기가 많이 섞인 은빛 모래라면 삼양동, 쇠소깍, 수월봉은 제주에서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차노휘
삼양 해변 정자에 설치된 18번 코스 중간 스탬프 박스. ⓒ차노휘

곤을동의 비극은 좌우로 갈라져 이념전쟁을 하다 남과 북으로 나뉜 우리 역사의 아픔이었다. 언제 무엇이, 아니면 누가 이 아픔을 치유하고 온전히 용서와 화해의 역사책을 쓸 수 있을까. 이제 별도(別刀)연대와 제주도의 만리장성인 환해장성을 지나 삼양 검은 모래 해변으로 가야하는 내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지기만 했다. (계속)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는《기차가 달린다》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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