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역사 3부작 <바바라>(2012), <피닉스>(2014), <트랜짓>(2018)을 통해 독일의 비극적 역사와 사회 현실을 작품 속에 꾸준히 녹여온 독일의 대표적인 감독이다.

이후 그는 원소 3부작이라는 타이틀 아래 물을 소재로 한 <운디네>(2020)를 시작으로 불을 소재로 한 <어파이어>를 최근에 선보였다(다음은 공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3부작’이라는 모종의 목표를 설정하여 작품활동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스스로 늘 채찍질을 가하는 페촐트 감독. 그의 페르소나를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번 작품도 어김없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며 그의 저력을 입증했다.

ⓒM&M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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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원소라는 모티프로 다소 변화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무언가에 대해 질문한다.

우선 ‘사랑’은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세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통할 법한 서사이기 때문에 결단코 놓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는 질투심, 집착, 죄책감, 수치심과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편이다.

이것은 바로 페촐트 감독의 작품이 (조금 과장해서)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비법일지도 모른다.

차마 부정하고 싶은 마음 깊은 곳의 옹졸함과 이기심 덩어리들을 친절히 관객의 눈앞에 펼쳐내어 처절하게 해체하는 것이 바로 페촐트 감독의 작품이 지닌 주된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다.

<어파이어>는 특히 중심인물의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감정과 심리를 서사의 골자로 가져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젊은 소설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의 집에서 얼마간 머물며 집필활동을 하기로 한다.

멋진 발트해변 근처의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여름 별장과도 같은 집이다.

이 고뇌하는 젊은 작가에게 무궁무진한 창작의 영감을 안겨줄 것만 같은 이 공간은 안타깝게도 온전히 그에게만 허락되지 않는다.

빨간 원피스를 애정하는 여자 나디아(파울라 베어) 역시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그녀의 연인처럼 보이는 잘생긴 인명구조원 데비드(에노 트렙스)의 존재는 레온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왜 이들이 신경 쓰이는 건가?

단순히 집필활동을 방해해서?

설마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해서? 레온과 이들 사이에서 교묘한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후반부의 비극적인 산불 사고 시퀀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건들은 얼핏보면 대단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익숙하게 봐온 상업영화와 비교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큰 사건으로 자리잡을 산불 사고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는 이야기의 주변부에 잠재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고 있지만 오히려 저항하려는 듯한 태도다. 

매일 같이 마당에서 맛있는 굴라쉬를 먹고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바다 수영을 즐기면서 자신들의 여유있는 삶에 더 집중한다.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라는 이름으로 젊은 영혼들을 점차 옥죄는 각박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 같다.

실제 페촐트 감독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더 꿈을 펼치기 어려워진 청년들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이런 의도를 고려하면 인물들 주변에서 도사리고 있는 산불의 위험은 우리의 현실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이와 더불어 인간 누구나 느낄법한 온갖 감정들이 인물들 사이를 부유한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질투와 수치심 등과 같은 감정이 스물스물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표출되는 것을 관전하는 것도 나름 흥미롭다.

그도 그럴게 레온만큼은 불구덩이 같은 현실 속에서 낭만을 즐기는 이들과는 다른 부류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소설을 완성하여 출판계약에 성공하는 것뿐이다.

일에만 매몰된 그에게 있어서 펠릭스, 나디아, 그리고 데비드의 하루하루는 한심하게 보이기만 한다.

그러다 어떨 때는 부러운 마음도 든다.

이 중에서도 나디아는 낡아빠진 고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넘어져도 언제나 즐거워 보이고, 포장된 굴라쉬가 바닥에 처참히 떨어져 소스가 질질 새더라도 그저 맛있다는 이유로 알뜰하게 저녁으로 챙겨먹는 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낱 아이스크림 판매원일 뿐인 그녀인데, 어느 날 자신의 원고를 읽고선 별로라고 평가를 하자 레온은 “그런 건 비평이 아니다”며 가차없이 면박을 준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판매원 주제에’ 선을 넘었다며 화를 낸다.

그러나 곧 그에게 뒤늦은 수치심이 밀려온다.

알고 보니 그녀는 문학을 전공한 박사과정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영화가 이 정도 전개되었을 때, 모든 부정적 감정과 편견을 일체 소거라도 하듯 산불이 일어난다.
 

ⓒM&M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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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욱 명징해진다.

이 모든 것이 불에 탄 뒤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일도, 직업도, 계급도 결국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한낱 종잇조각과 같다. 

하지만 사랑과 온갖 복합적인 감정들로 범벅된 ‘삶’은 사라지지 않고 소생되어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이 어떠한 형태든.

결국 영화는 줄곧 주변적인 관찰자의 위치에 놓였던 레온을 마지막에서야 중심에 위치시키며 그가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았음을 보여주면서 마무리된다.

 그 깨달음의 결과는 출판사 편집자의 마음에 꼭 드는 진실된 소설 한 권을 펴낸 것이다.

나디아에 대한 자신의 오만과 편견을 속죄하며 혹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담아 그녀의 이야기를 한 편의 예술로써 완성해낸 것이다.

그렇게 페촐트 감독은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승화의 예술을, 나아가 소생의 삶과 이 작품 자체를 완성시킴으로써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가치의 소중함을 한 번 더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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