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문 [전문]

기록 없다고 발뺌하더니 이번에도 99엔인가!
 

76년이 넘도록 사죄 한마디 없는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지 물어야 할 때다. 다시 한번 혀를 내 두를 상황이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2019년과 2020년 일본 기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가운데,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은 일본 지원단체 ‘나고야소송지원회’를 통해 지난 3월 <일본연금기구>에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된 11명에 대한 후생연금 가입 기록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밈모임이 7일 오전 광주광역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 쪽의 일제동원 발뺌을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예제하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밈모임이 7일 오전 광주광역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 쪽의 일제동원 발뺌을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예제하

그동안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 정부나 전범 기업들은 기본적인 자료 제공은커녕, 강제동원 사실마저 대 놓고 부정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당시 5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라면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의무적으로 가입했던 ‘후생연금’ 기록은, 피해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연금기구는 지난 6월 조회를 요청한 11명 모두 구체적인 사유도 밝히지 않은 채 “해당 가입 기록이 없다”고 일괄 통보해왔다. 그러나 백번 양보하더라도, 정신영(鄭信榮.1930.2) 할머니에 관한 <일본연금기구>의 결정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왜냐면, ‘나고야소송지원회’가 2008~2009년경 후생노동성 산하 사회보험청(일본연금기구 전신) 아츠타(熱田)사무소 관계자 입회하에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 대한 일부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근거로 지난 3월 아츠타사무소에 조회를 신청할 당시에도 정신영 할머니에 관한 ‘연금번호’까지 이미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에 ‘나고야소송지원회’는 모토무라 노부코((本村伸子) 중의회(衆議會) 국회의원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모토무라 의원은 지난 8월 후생노동성에 재조사를 요구했다.

그 결과 지난 10월 후생노동성은 모토무라 의원에게 “전쟁 때 후생연금 피보험자 명부를 소실해 해당 사업소의 대장은 보관되어 있지 않다”면서도 “‘재해 등으로 피보험자 기록이 멸실된 경우의 피보험자 기록 회복 기준 사무 취급 요령’에 기초해, 정신영씨의 후생연금 가입을 인정한다”고 회답해 왔다.

처음에는 ‘기록조차 없다’고 발뺌하더니, 국회의원이 나서자 뒤늦게야 관련 규정을 적용해 정신영 할머니의 후생연금 가입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연금기구의 이번 처사는 무책임함을 넘어 괘씸하기 짝이 없다. 후생연금 기록은 일제에 의해 청춘을 빼앗긴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숨값이나 다름없다. 피해자들이 한과 눈물이 서린 기록을 찾겠다는데, 피해자들의 애타는 심정은 본체만체 이토록 무책임하게 대할 수 있는가!

ⓒ예제하
ⓒ예제하

국가가 가입시켰으면, 자료를 보존하지 못한 책임도 국가에 있다. 설령 전쟁에 의해 자료가 소실 됐다고 해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가입시킬 때는 강제로 가입시키더니, 이제 와서 ‘기록이 없다’며 ‘나 몰라라’ 하면 그뿐인가!

처음부터 자료가 왜 없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관련 규정을 적용했어야 맞지, ‘기록이 없다’고 발뺌하다가 뒤늦게 국회의원이 나서자 규정을 적용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정신영 할머니의 경우, 2008~2009년경 아츠타 사무소 관계자 입회하에 확인했던 창씨개명 이름과 연금번호까지 제시한 상태였다. 구체적인 연금번호까지 내밀어도 이렇게 내팽개치는 마당인데, 단서 하나 없는 나머지 대다수 피해자의 조회 요청을 어떻게 대해 왔을지는 더 물어볼 필요 없다. 처음부터 코웃음 치며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이것만이 아니다. <일본연금기구> 이번 조회 결과에 의하면, 정신영 할머니의 후생연금 가입 기간은 11개월이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은 이후 반환 절차를 밟아 탈퇴 수당금을 반환받을 계획이다.

그러나 규정을 새로 적용하지 않는 한, 2009년 양금덕 할머니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99엔’(한화 약 1,040원)이 될 처지다. 뼈 빠지게 강제노역한 대가가, 고작 1,040원 껌 한 통 값이다.

광복 76년이 지나, 92세 할머니가 ‘껌 한 통 값’ 수모를 겪는 데는 기막힌 이유가 있다. 놀랍게도 일본 정부는 1973년 후생연금 보험법을 개정해, 이후부터는 화폐가치 변동에 따른 ‘물가향상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재일동포나 일본인한테 연금을 지급할 때는 화폐가치 변동을 감안해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유독 해방 후 귀국한 한국인에 대해서는 관련 규정이 없다며, 당시 액면가 그대로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은 규정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규정을 한국인한테만 적용하지 않아 온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2009년 ‘99엔’ 사건이었다. 그리고 12년 만에 또다시 ‘99엔’ 사건이 재연된 것이다. 자신들이 필요해 전쟁 소모품으로 동원할 때는 ‘일본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떠들어 댔던 일본이다.

ⓒ예제하
ⓒ예제하

그랬던 일본이 연금을 지급할 때 돼서는 한국으로 귀환했기 때문에 액면가 그대로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을 가진 태도인가? 이것이 진정 일본의 양심인가!

특히, 일본연금기구는 탈퇴 수당금을 대리인을 통해 지급해 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담당 기관이 <사회보험청>일 때(~2010년)는 해외 신청자의 경우 일본인 대리인 계좌를 통해 송금이 가능했지만 <일본연금기구>로 바뀐 뒤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명백한 거짓이다. 2014년 김재림 할머니 등 4명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대리인을 통해 199엔을 지급한 사례가 있는데, 그때도 담당 기관이 <일본연금기구>였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또 있다. 돌연 대리인 계좌로는 지급할 수 없다는 일본연금기구가, 거듭된 문의에도 아직까지 구체적인 반환 절차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대리인을 통한 지급이 안 된다면, 99엔을 찾으러 직접 일본까지 오라는 것인가! 거동조차 힘든 92세 할머니한테, 돈 천 원 받기 위해 직접 오라는 것인가!

92세 할머니가 다시 이런 수모를 겪는 데는 우리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회복 문제에 관한 모든 것을, 피해 당사자한테 떠넘기고 있다. 소송도 피해자의 몫, 후생연금 찾는 것도 피해자의 몫이다. 국민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데, 도대체 우리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예제하
ⓒ예제하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2009년 ‘99엔 사건’이 있었고, 2014년엔 ‘199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99엔 사건’이 재발한 것이다.

그래서 정부에 정말 묻고 싶다. 그동안 일본 정부와 어떤 협의라도 해 온 사실이 있는가? 협의가 잘 안 된 것인가, 제안조차 안 한 것인가? 언제까지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할 것인가? 피해 당사자들이 개별적으로 이런 수고를 들여야 하는가?

2021년 12월 7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