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구금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 결성
올해 91세인 장기수 서옥렬 선생을 북한으로 송환하는 운동이 본격화된다.
광주전남시민사회와 통일.인권단체 등은 25일 광주 동구 와이엠시에이(YMCA)에서 '장기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오는 10.4선언 이산가족상봉을 1차 송환시기로 보고 본격적인 운동을 펼친다고 밝혔다. 공동대표단은 현지스님, 정영일, 장세레나, 류봉식, 장헌권, 노영숙 씨 등이 맡았다.
서 선생은 1927년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해 6.25전쟁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면서 북한으로 간다. 이후 북한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으며 김일성 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1961년 월남하여 가족을 만난후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돼 30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1991년 석방돼 광주에서 통일운동을 해오고 있다.
서선생 송환추진위는 기자회견에서 "조국을 조금 더 사랑한 죄, 시대의 양심으로 심장이 파닥하는 고뇌하는 젊은이였기에, 험난한 조국과 민족의 풍랑 맨 앞에서 맞바람 맞으며 처절한 아픔으로 이제 90년을 살아온 노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또 "서옥렬 선생은 30대에 장벽이 가로 막힌 남북을 오고간 혐의로 넬슨만델라보다 많은 30여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고문과 협박 강요로 한쪽 눈이 멀고 성치 않은 몸과 전향서 강요로 인한 정신적인 고충까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단한 삶이었다"고 선생의 삶을 전했다.
현재 서 선생은 소박하게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며 살아오다가 현재 심장질환, 관절에서 발까지 온 몸이 불편한 독거노인으로 2017년을 살고 있다.
송환추진위는 "서 선생의 질긴 목숨은 올 봄 생사의 고비를 넘긴 후 살아생전 처자식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은 가장 인간적인 소망의 실타래가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일지 모른다"며 "이생을 마감하는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른다며 살고 있는 서옥렬 선생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조국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고 송환 이유를 밝혔다.
또 "그 어떤 이념도 사상도 장벽도 잠시 걷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행복을 지키려 노력하는 국가의 통 큰 아량을 기대한다"며 "서옥렬 선생의 한 많은 인생,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부디 북쪽 가족 품에 안겨 마지막 가는 길 평온하게 눈감을 수 있게 가장 인간적인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정부의 전환적으로 조치를 기대했다.
장기구금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청와대, 통일부에 송환촉구서한 보내기, 이산가족상봉 신청, 온오프라인 송환청원운동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한다고 밝혔다.
‘장기구금양심수 서옥렬 선생 90년 전 전남 신안 안좌면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교육열 높은 시골 부모의 지극정성으로 서울에서 초등시절부터 학창시절을 보내기 시작한 영특한 소년은 책을 무척 좋아했고 시름하는 조국의 훌륭한 인재가 되리라 맘먹으며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공부하고 또 공부하며 자신을 갈고 닦았습니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해 나라를 살리는 경제학도의 꿈을 키워갔던 청년에겐 뜻하지 않게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다가왔고 의협심이 많았던 청년은 학도의용군으로 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굴곡진 현대사의 한 가운데 인생을 맞게 된 인간 서옥렬 이름 석자를 지닌 한 남자는 평탄하게 자신의 숨은 능력을 발휘하며 평범한 삶을 평온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조국을 조금 더 사랑한 죄, 시대의 양심으로 심장이 파닥하는 고뇌하는 젊은이였기에, 험난한 조국과 민족의 풍랑 맨 앞에서 맞바람 맞으며 처절한 아픔으로 이제 90년을 살아온 노인이 되었습니다. 서옥렬 선생은 30대에 장벽이 가로 막힌 남북을 오고간 혐의로 넬슨만델라보다 많은 30여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고문과 협박 강요로 한쪽 눈이 멀고 성치 않은 몸과 전향서 강요로 인한 정신적인 고충까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단한 삶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본인이 선택한 삶의 나침반이었지만 너무도 혹독하고 가혹한 청장년시절이 송두리째 갇힌 감옥에 저당잡힌 세월이었습니다. 더구나 부모 형제들에게 연좌제가 씌워져 더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모든 걸 잃고 비운 탓일까 30년 감옥에서 나와 가장 소박하게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며 살아왔던 노년은 탈장에 심장질환, 관절에서 발까지 온 몸이 불편한 독거노인으로 91살 2017년을 살고 있습니다. 질긴 목숨은 올 봄 생사의 고비를 넘긴 후 살아생전 처자식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은 가장 인간적인 소망의 실타래가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이생을 마감하는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른다며 살고 있는 서옥렬 선생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조국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 민족, 외세의 강압에 움츠리고 파란만장한 질곡 많은 역사의 큰 강줄기의 변곡점을 맞은 2017년, 촛불 민심이 탄생시킨 문재인 정부, 그 어떤 이념도 사상도 장벽도 잠시 걷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행복을 지키려 노력하는 국가의 통 큰 아량을 기대합니다. 서옥렬 선생의 한 많은 인생,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부디 북쪽 가족 품에 안겨 마지막 가는 길 평온하게 눈감을 수 있게 가장 인간적인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에 빛고을 광주 행동하는 양심들의 장기구금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 결성을 알립니다. 작은 행동이 촛불처럼 많은 파동을 일으켜 불운한 조국과 민족의 현대사에서 너무도 모진 삶을 산 가슴 아픈 한 노인의 삶에 촉촉한 단비가 되는 날을 손꼽아 봅니다. 오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장기구금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는 청와대, 통일부에 송환촉구서한 보내기, 이산가족상봉 신청, 온오프라인 송환청원운동 등을 지속적으로 벌이며 여론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처절한 삶을 산 구순의 노인과 60이 훌쩍 넘었을 아들 둘, 살아있을지 어쩔지 알 수 없는 부인의 상봉이 견우직녀 오작교되어 만날 날이 열려 얼어 붙은 남북관계의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뜻있는 광주시민들이 오늘 이 자리에 뜻과 마음을 함께 모았습니다. 광주의 작은 행동이 나비효과가 되어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의 숙원 통일의 물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7년 7월 25일 장기구금양심수 서옥렬 선생 |
서옥렬 선생 걸어온 길 서옥렬 어르신을 처음 뵌 것은 91년이었습니다. 어느덧 27년이 지났네요... 서옥렬 어르신은 1927년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아버지 서계술 씨와 어머니 이경심 씨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장손으로 소학교 4학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미동초등학교, 경기상고를 마치고 고려대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셨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자가 되어 부유한 국가를 만드는데 이바지하겠다는 청년경제학도의 꿈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물거품이 됩니다. 1961년 8월. 남북이 서로 공작원을 보내던 그 시절. 어르신은 고향집을 방문하여 남한정보를 얻고 동생들을 포섭하라는 임무를 가지고 5살, 3살 어린 두자식과 부인을 뒤로하고 남파되었습니다.(김하기의 소설 완전한만남 '해미'편이 어르신의 당시 이야기입니다) 예전 의문사위의 조사로 밝혀진 유신시대의 깡패를 동원한 야만적인 전향공작에 의해 반강제로 직인이 찍힌 준법서약서는 어르신의 희망을 한 번 더 꺾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92년 이인모 어르신의 송환이후 2000년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송환되었으나 선생님은 직계가족이 모두 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향장기수'라는 딱지에 의해 송환이 좌절된 것입니다. 그 뒤 노무현정권때 '강압에 의한 전향은 무효'라는 국가기관의 판단에 따라 28명의 장기수들과 함께 송환을 요구했으나 될듯 될듯하다가 무산되었습니다. |
활동경과 2017년 6월 17일(토) 저녁 7시 7월 2일(일) 저녁 7시 7월 5일(수) 저녁 7시. 7월 12일(수) 저녁7시. -. 제안단체 최종확정: 6.15공동위원회 광주본부, 6.15시대길동무‘새날’, 7월 15일(토) 저녁 6시 7월 24일(월) 저녁7시.
□ 대표자 회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