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이홍길 교수님과 마지막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佛家의 말처럼 우리는 깊은 슬픔과 무상함으로 이승을 떠나시는 교수님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근래 병원의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거부하시고 생노병사의 자연 순리에 운명을 맡기신 교수님의 가시는 길에 우리는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깊은 애도의 마음을 올립니다.

고 이홍길 교수 생전 모습.
고 이홍길 교수 생전 모습.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제공

돌이켜보면 고 이홍길 교수님과 대학에서 사제의 연을 맺으면서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유신 독재시절 대학은 경찰의 감시와 탄압으로 얼어붙은 동토였습니다.

당시 열혈 청년이었던 우리 젊은 학생들에게 이 교수님은 시국을 한탄하면서도 늘 불안과 걱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시국에 대한 이 교수님의 고뇌는 1978년 6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 때 송기숙 교수 등 뜻있는 교수님들과 교육지표 선언을 비밀리에 준비하여 언론에 발표,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후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 교수님은 다시 투옥과 해직, 복직하는 고난 속에서 질곡의 역사로 점철된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가 암담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교수님은 “역사는 반복되는가”라고 늘 화두처럼 되뇌이며 후학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강조하셨습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저는 교수님과 많은 대화와 연구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대학원 첫 학기에서 중국의 대사상가 풍우란(馮友蘭)의 저서 <중국철학사> 책을 소개하면서 공부하자고 하셨습니다.

당시 어렵게만 생각했던 동양철학사를 접한다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같은 서양 사상가들이 있다면 동양에도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훌륭한 철학자들이 있으며 이들의 사상적 전통을 말씀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학원에서 이 교수님의 풍우란 중국철학사 강의는 사실 제가 중국 사상사에 관심을 갖고 전공을 선택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이 교수님은 은퇴 후에는 이 땅에 민주주의 씨앗을 뿌리고자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의 초대 대표를 맡아 직접 참여하시고 시민운동에도 열정을 다하셨습니다.

말년에 이 교수님은 가끔 술자리에서 자신을 “고독한 인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독을 극복하고자 지리산 피아골 서재에서 날마다 악화 되어가는 병마의 고통 속에서도 손에 책을 놓지 않으셨던 고 이홍길 교수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아아, 님은 갔지마는 우리는 님을 결코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비록 육신은 가셨지만 이홍길 교수님은 우리들 곁에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合掌焚香

2024년 3월 5일

제자 신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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