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반복되는 것들

영화 <울산의 별>의 주인공 윤화는 배테랑 용접공으로, 20년 전 남편이 죽은 후 조선소에 들어가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제 아들딸 두 자식도 거의 다 키워놓았지만, 조선업계에 불황이 닥치자 해고 통보를 받는다.

해고를 통보받은 자리에서 나한테 왜 그러는지’(, ‘왜 나인지’) 묻는 윤화에게 부장은 난처하고 미안한 얼굴이 되어 대답한다.

,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게 아이고누굴 그럴지도 내가 정하는 게 아니고예, 시스템이 그런 기라 시스템이.”

ⓒ네이버 영화
ⓒ네이버 영화

금융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퇴거를 명령받은 자가 시스템이라는 말 앞에서 입을 다물게 되는 장면은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 분노의 포도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땅을 담보로 은행에 빚을 졌던 소농들은 경제가 위태로워지자 퇴거 명령을 받는다.

소농들이 직접 개간하고 여태껏 지켜내었던 땅으로 거대한 트랙터가 들어온다.

집이 트랙터에 밀려나갈 상황이 된 농부는 운전사가 다름 아닌 이웃집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다가가서 항의한다.

자네한테 명령을 내린 놈이 누구야? 그놈을 잡아야겠어. 그놈을 죽여야겠어.”

아저씨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그 사람도 은행에서 지시를 받은 거예요은행이 그 사람한테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면 그 사람이 쫓겨날 거라고 말했단 말이에요."

그럼 은행 총재가 있을 거 아냐. 이사회도 있을 거고. 총에다 총알을 가득 채워서 은행으로 가야겠다.”

누가 그러는데 은행은 동부에서 지시를 받고 있대요. ‘땅에서 이윤을 내지 못하면 은행을 폐쇄해버리겠다.’ 이랬대요.”

그럼 어디가 끝이야? 누굴 쏴야 되는 거냐고? 난 굶어죽기 전에 날 굶기는 놈을 죽일 거야.”

저도 몰라요 (존 스타인 벡. 『분노의 포도』 5장에서)
 

한편 윤화의 아들 세진, 가족과 상의 없이 집을 담보로 삼아 은행에서 1억 원을 대출받았다.

윤화는 세진이 장남이라는 이유로 집의 소유권을 세진 앞으로 돌려두었던 것이다.

세진은 대출받은 돈을 가상화폐에 투자한 상황이다. ‘부지런히 일해도 연봉 4천만 원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며 친구들에게 열변하는 그의 심경에 영향을 미친 것은, 어머니 윤화의 생애를 가까이서 지켜본 20년 세월의 경험이었을 터다.

윤화는 조선소의 고된 용접공 생활에 신체 이곳저곳에 흉터가 없는 곳이 없고, 언제부턴가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벌컥벌컥 화부터 내는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투자한 코인이 가격이 폭락한다.

세진은 가상화폐 개발업체 운영자를 찾아가 돈을 돌려달라고 부탁했다가 뺨을 얻어맞는다.

"파이낸스 아니냐, 파이낸스.” 멀끔한 얼굴을 한 운영자가 세진을 내려다보며 "너 똑바로 영업했느냐"며 도리어 추궁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세진이 투자한 코인이라는 것이 실은 다단계에 가까운 사기였음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세진은 자신이 평소 열심히 투자를 권했던 친구가 거기 돈을 넣어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진은 사기에 속아서 돈을 잃은 피해자이지만, 친구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가해자이기도 하다.

피해자가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구조.

이 잔인한 착취 원리가 사기꾼의 논리에서 금융원리(파이낸스)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착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금융 자본주의의 세부적인 특징 일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회사에서 잘리거나 집이 트랙터로 밀리면 생계가 무너지지만, 해고를 통보하는 일과 트랙터를 운전하는 일에도 생계가 달려있다.

시스템의 하수인 역시 가난하기로는 마찬가지인데, 가장 얄궂은 점은 그들이 대개 친숙한 동료와 이웃을 밀어내도록 요구받는다는 데에 있다.

ⓒ네이버 영화
ⓒ네이버 영화

언제까지 우리는 전근대?

 윤화가 정리해고 통보를 받을 무렵, 그들 가족이 사는 집으로 윤화의 작은아버님(남편의 작은아버지) 댁이 찾아온다.

죽은 남편의 기일이 가깝다.

함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매년 있는 행사인 듯한데, 이번에 윤화네를 찾아온 이 가족에게는 평소와 다른 목적이 있는 눈치다.

이들은 친척들과 공동명의로 두었던 선산을 팔고자 윤화의 동의를 얻고자 한다.

윤화의 사촌시동생(남편의 사촌동생) ‘인혁전근대적이야라는 말을 버릇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인물이다.

두 가족이 모인 식사자리에서 남녀가 분리된 좌석배치가 그의 눈에는 불편하다.

그는 또한 세상의 모든 몰상식전근대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 같다.

ⓒ네이버 영화
ⓒ네이버 영화

근대적인 것전근대적인 것의 구분은 영화의 전체적인 구도를 형성하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분노의 포도는 소농을 주된 형태로 했던 기존의 농업구조에서 자본집약적 형태로 전환되는 분기점에 놓인 시대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시골 농민들은 시대의 변화(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들은 총으로 터전을 지키겠다는 발상을 한다.

분노의 포도에서 총이었던 것이 <울산의 별>에서는 돈 봉투가 된다.

사적인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상이라는 점에서, 뇌물은 총과 유사하다.

윤화는 은행에 빚을 내어 부장에게 뇌물로 주려고 시도한다.

해고될 위기를 뇌물로 해결하려는 윤화의 시도를 알게 되었다면, 그에 대해서도 인혁은 전근대적이라며 멸시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야기가 흥미로워지는 부분은 선산을 팔고 생긴 돈이 필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인혁이라는 점에 있다.

젊은 영화감독인 그는 가족의 선산을 팔아치운 돈으로 재기하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전근대적이라는 말버릇은, 문중의 땅을 개인적인 이유로 팔아야 한다는 데로부터 비롯된 심리적 부담을 덜기 위한 방어기제였을 것인즉, 실상 그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실패한 사람으로 비춰보일지 지대하게 의식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조카 세진의 당신처럼 살고 싶다는 말에 나는 어른이었던 적이 없어라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인혁의 모습에서, 인혁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는 이전 세대가 감내해야 했던 책임을 자신은 질 수 없다는 자조가 묻어난다.

ⓒ네이버 영화
ⓒ네이버 영화

'전근대이후를 전망하기 위해

2015년 이후 한국 조선 산업에 닥친 불황은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과 그에 따른 국제 유가 폭락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다.

만약 국제유가 폭락을 농업 구조의 변화와 같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시차원의 항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거듭 바뀌는 시대의 흐름에서 변화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시대적 조건이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사실, 변화가 반복된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 사실이다.

그리고 매번 위태로운 생활로 내몰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

살고자하는 이들이, 총이든, 돈 봉투든 가리지 않고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가며 발버둥치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직 시스템만이 건재한 세상이다.

시스템은 저 홀로 근대에서 현대로, ‘4차산업혁명시대로 멀리멀리 간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더는 사람들이 버려지지 않는 세상, 바로 그런 세상이 우리들의 전근대이후가 될 것임을.

관련기사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