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톡톡]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미싱타는 여자들’
[영화 톡톡]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미싱타는 여자들’
  • 윤여리 시민기자
  • 승인 2022.03.25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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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기를 노력하면 무엇이든 안 되는 게 없다고 한다. 노력하다 못해 10년이 되도록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뭔지 몰라도 잘못된 게 틀림없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김정영 감독은 2018년 서울시 봉제역사관 디지털 영상 아카이빙 작업에 참여하면서 봉제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 출신 노동자들을 만나 기록되지 않았으나 기억해야 할 수많은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영화가 탄생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은 대부분 ‘지식인’에 의해 쓰여졌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포스터.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포스터. ㈜영화사 진진 제공

그러나 운동사와 사건사 중심으로 서술된 기존 연구는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주체였던 여공들이 무엇을 경험했고,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노동자로 되어갔는지를 다루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여공들의 생생한 육성과 경험에 근거한 노동사 연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때문에 노동자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인들에 의한 노동사 해석은 ‘불쌍한 여공’이 어떻게 노동운동의 ‘주체’가 되었으며, 또 ‘보이지 않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신순애, 「13살 여공의 삶」)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은 기록되지 못하고 잊혀진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로 들려준다.

신문과 방송의 자료화면과 사진 대신 출연자들이 가져온 사진과 편지가 화면을 채운다.

그들은 ‘불쌍한 여공’이 어떻게 노동운동의 ‘주체’가 되었는지 생생하게 증언한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당시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전태일의 ‘누이’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만 하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했던 그들에게 공장과 집 외에 다른 세상을 알 기회는 없었다.

그저 공장장이 한 말대로 ‘깡패놈이 일하기 싫어서 몸에 불붙이고 죽었다’고 생각했고,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찾아간 모란공원 추모회에서 비로소 전태일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다.

전태일의 분신 후 탄생한 청계피복노조와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평생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아간 이소선 여사의 노력으로 여공들은 노조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1973년 5월 21일에는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 새마을노동교실’이 개관한다.

이 새마을노동교실은 “부녀부장이었던 정인숙이 새마을운동 공로자로 청와대에 초청받아 간 자리에서 영부인 육영수에게 청계노조의 실정을 설명하였고, 이야기를 듣던 영부인이 무엇이 필요한지 묻자 “근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교실이 필요하다”고 말해 영부인이 시장에 노동교실을 만들도록 지시한 것이다.”(유정숙 외, <나, 여성노동자 1>)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박정희 정권은 노동교실 개관식에 영부인을 참석시켜 그 공적을 칭송하려 했으나, 함석헌 선생을 초청한 것 때문에 계획은 무산된다. 이후 노동교실의 운영은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1975년 노동교실 운영권을 노조가 되찾게 되면서 노동교실이 청계천 유림빌딩에서 다시 열리고 이후 청계피복노조의 황금기가 펼쳐진다. 임미경 출연자 역시 이 시기에 노동교실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소선 여사를 주시하던 박정희 정권은 1977년 그를 법정 모독죄로 구속하고 노동교실도 폐쇄한다.

건물주가 노동교실의 퇴거시한을 9월 10일까지로 명시한 내용증명을 보내자 노조원들 50여 명은 노동교실로 들어가 이소선 여사 석방과 노동교실 복구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 정권 수립일인 9월 9일에 맞춰 농성을 한 ‘빨갱이’가 되어 구속된다.

이것이 1977년 9월 9일 벌어진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사수 농성사건이다.

자신의 이름 대신 '7번 시다', '1번 오야 미싱사'로 불리며 하루 15시간 이상씩, 잠이 오면 타이밍을 먹어가며 일해야 했던 그들에게 열악한 일터와 낮은 임금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세상의 차별이었다.

농성사건으로 구속된 그들은 경찰들이 대학생들이 화장실 가는 것은 허락하면서도 자신들에게는 욕설을 하며 화장실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학교에 다니는 같은 또래는 반값으로 회수권을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은 성인 요금을 내고 버스를 타야 했다.

노동교실은 ‘공순이’로 무시받던 그들이 당당한 노동자로 자기 자신을 정립할 수 있게 만든 소중한 공간이었다.

임미경 출연자는 "노동교실은 그때 당시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곳이었다.

그걸 사람들이 못 가게 차단했을 때, 정말 목숨을 던져서라도 노동교실을 꼭 지키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다락방에서 선풍기 날개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먼지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일했던 그들은 이제 파란 하늘 아래 탁 트인 공원에서 웃음 가득한 얼굴로 미싱을 돌린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그 시절 그들이 꿈꿨던 삶은 이처럼 즐거운 노동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들이 꿈꾸던 즐겁고 이상적인 노동은 아직도 멀리 있다.

996,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동안 일하는 근무행태를 뜻한다.

알리바바의 창업주 마윈은 "만일 당신이 젊었을 때 996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느냐"며 "996을 해 보지 않은 인생이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또한 “알리바바와 함께 하려면 당신은 하루에 12시간을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루에 편안하게 8시간 일하려고 하는 이들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996은 중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T업계의 ‘크런치 모드(게임 출시 전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에 이르는 야근과 밤샘근무)’, 방송 노동자의 ‘디졸브(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없을 정도로 지속되는 장시간 밤샘 촬영)’,

사회복지 공무원의 ‘깔때기 현상(증가하는 복지사업과 한정된 담당 인력으로 인해 깔때기처럼 업무가 집중되어 가중되는 현상)’,

화물운송노동자의 ‘따당(서울-부산 등 장거리 구간을 하루 만에 왕복 운행)’, 직장인들의 ‘카톡 감옥’ 등등 996은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된다.

“우리의 시간구조는 삶과 생명을 박탈하는 수준이다. ‘버티고 또 버티기’를 주문할 뿐이다. (…) 다른 상상, 다른 감각, 다른 교육, 다른 주체, 다른 삶, 나아가 다른 미래를 그리기 위한 총체적 기획과 실천이 뒷받침돼야 한다.”(김영선, <존버씨의 죽음>)

흔히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 “나 때는 더 심했다”며 젊은 세대의 인내력을 탓한다.

다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내 자식은 풍족한 삶을 살기 바라며 열심히 일했던 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이 흘린 땀방울이 고통스러운 노동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13살 여공들이 꿈꿨던 사회도 이 악물고 버티고 참아내야 하는 노동이 미덕인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

평범한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로 살아간다. 우리들 대부분은 노동자로 살아가고, 우리 다음 세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자의 삶은 자부심보다는 벗어나고 싶은 삶에 가깝다.

함께 연대했던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자본이 아니라 서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모두가 행복한 노동자로 살아가는 세상, 그곳은 유토피아처럼 불가능한 꿈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미래에 우리가 만들어낼 세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아직 여기에 없을 뿐이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이,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며 함께함으로써 우리의 세상은 조금씩 그곳에 가까워진다.

1931년 노동자 강주룡이 죽기를 각오하고 평양 을밀대에 올라간 이유,

1977년 14살 임미경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 한 이유,

2011년 김진숙이 40미터 크레인 위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인 이유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 의지들이 ‘흔들리지 않게’ 모두 모여 함께 하나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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