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톡톡] '시 읽는 시간' 신자유주의 시대의 초상
[영화 톡톡] '시 읽는 시간' 신자유주의 시대의 초상
  • 김수진 시민기자
  • 승인 2021.03.26 23:5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섯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불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일 스트레스로 신경안정제를 먹다가 결국 퇴직한 어느 평범한 30대.
20년간 한 직장을 다니면서 알 수 없는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어느 평범한 50대.
자유로운 예술가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게임에 빠진 어느 평범한 40대.
30년간 다닌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길에서 10년간 시위를 펼친 어느 평범한 50대.
시와 그림을 통해 약자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어느 평범한 20대.

모두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평범한 얼굴들이다. 이들이 각 세대를 절대적으로 대표한다고 볼 수 없지만, 각자의 사정을 들어보면 그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이야기에 이들이 있다.

제공 마노
제공 마노

이수정 감독은 <깔깔깔 희망버스>(2012)를 통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나쁜 나라>(2015)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재춘언니>(2020)를 통해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10년간의 싸움을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빌려 영화로 완성시켰다.

이 영화들이 벼랑 끝에 몰린 특정한 연대의 아픔과 인간적인 면모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면, 이번에 개봉한 <시 읽는 시간>(2021)은 다소 다른 결을 갖는다.

이 영화는 개인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수정 감독은 영화의 연출의도에 대해 “비참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고통은 아주 사소하다고 생각해 감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말문을 열고, 이 세상에 자신이 설 자리는 주어지지 않거나, 박탈된 지 오래되어서 이제 많은 것들에 무감각해진 사람의 잊었던 감각을 되살리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제공 마노
제공 마노

<시 읽는 시간>은 이러한 생각의 발로로서 2016년 <재춘언니>와 동시에 제작되었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라며 누군가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짓밟기 일쑤인 세상에서 “너도 힘들구나, 그럼 우리 서로 위로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종전에는 연대의 공통된 아픔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조용히 한 개인의 아픔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경쟁과 자본의 논리로 점철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고통스럽지 않은 개인이란 없다. 너도나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홀로 힘들다고 소리치기란 어렵다.

마치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기다리며 빼곡히 줄 서 있는 인간 군상들과도 같다. 하루하루 고단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이도, 내 뒤에 서 있는 이도 나와 같은 처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견디고 만다.

그러나 잠깐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점으로 바라보면 이들의 모습은 생경하기 그지없다. 과연 이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일까?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지? 의문을 품고 소리칠 사람은 적어도 줄 서 있는 이들 중에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제공 마노
제공 마노

이에 <시 읽는 시간>는 소리치기 대신 시를 통해 표현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시의 완곡한 표현이 직접적인 외침보다 더 날카로운 것은 우리 내면의 표상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불안장애, 공황장애라는 마음의 병들이 왜 생겨나는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획일화되고 관습적인 이성의 언어로 인해 진정한 ‘나’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시는 감각의 언어를 통해 차가운 이성의 언어를 뚫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20대 페미니스트 활동가 하마무 씨가 “시는 언어지만 언어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40대 일러스트레이터 안태형 씨는 한때 자신의 불확실한 삶에 지쳐 게임을 도피처로 삼았다. 게임이 좋은 이유는 지극히 단순한데 일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를 접하고 난 뒤에는 "시가 없으면 현실은 게임 속 세상처럼 될 것이다”고 말한다. 내가 배부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이러한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시는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한다.

‘1 더하기 1은 2다’ 이외에 답은 ‘틀렸다’고 구분짓는 이분법적인 사회. 이로부터 도망쳐 당도해야 하는 곳은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 바로 시적 사회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제공 마노
제공 마노

이렇게 다섯명의 출연자는 서로 비슷한 듯 다른, 다른 듯 비슷한 이야기를 훌훌 털어놓는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는 각각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씩 꼽는다.

《죄책감》(임경섭), 《살아있는 쓰레기》(하마무), 《나의 칼 나의 피》(김남주), 《슬픔이 없는 15초》(심보선), 《지금》(이정하)이라는 시다. 이들 중 하마무는 직접 자신의 시를 완성하고 일본인인 그녀의 시를 오하나 씨가 직접 번역한다.

프레임 안을 부유했던 각각의 이야기는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어지고, 각 개인들이 소통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영화는 다른 이들과 시를 공유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까지 펼쳐 보인다. 누군가가 쓴 시를 두 번 세 번 낭독하는 것에서 더욱 나아가는 일이다.

이는 시를 읽고 ‘내가 무엇을 느꼈느냐’ 만큼 중요한 일처럼 보여진다. 단순히 내 고통을 스스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의 고통 역시 이해하는 것. 바로 여기까지가 시 읽는 ‘시간’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제공 마노
제공 마노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을 담아낸 영화는 시의 또 다른 이름으로 완성된다. '시'와 '시를 읽는 시간'은 영화라는 복합 예술을 통해 한층 더 감각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신경안정제를 달고 살았던 오하나 씨가 평온하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 20년간 한 직장에 다녔던 김수덕 씨가 날아가는 새떼를 묵묵히 바라보는 모습 등. 교차편집으로 불현듯 등장하는 이 같은 이미지는 영화가 실천하는 시적 은유다.

더 나아가 우리 삶 자체가 은유적이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오하나, 김수덕, 안태형, 임재춘, 하마무 씨는 곧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로서 가슴 속에 자리할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그 얼굴들을 결단코 잊지 말아야 한다.

 

《살아있는 쓰레기》 
    하마무
 

무엇 하나 희망은 없었다
너는 하늘이 시커멓게 보이지 않는가
아픔마저 잊어버릴 만큼
얼마나 뺨을 더 내밀었었나
이것은 낮이었나, 밤이었나
너무도 밤이 길어 빛조차 잊어버린다

무엇 하나 희망은 없었네
일해도 일해도 무엇 하나 생겨나지 않았네
생겨난 것은 시체였네
저 말(馬)의 뼈
저 여자의 피
저 아이의 눈알
내가 일하고 일해서
생겨난 것은 무엇도 없었네
사면 살수록 울렁거렸네
내가 낳은 것은 결국 희망이 없다는 사실
거기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네

** <시 읽는 시간>은 현재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Jun 2021-03-31 02:35:54
기사 잘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있는 시가 가슴에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