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규 열사 30주기 추모시

수선화 피는 망월28-2번지

조성국


1
늦눈 내린 북향에
한데 뭉쳐져
감싸듯이 희게 빛나서, 푸근한
무덤 앞
어매가 심었다는 수선화 촉에
금이 벌어졌다
벌어진 금으로 틈 생겨 땅거죽이 열렸다
좀 더 넓은
넓어서 좀 더 낳은
세상으로 가는 통로와 같이 어매의
수선화가 한껏 피었다


2
술 한 잔 치다가
막소주 한 모금에도 금세 붉어지는
얼굴이
문득 생각나 묏등에
쑤실쑤실 욱은 잡초 솎는데,
묘비명 읽던 딸애 눈동자 호동그레진다

매 맞고 불로 지져진 듯이 그을린 자국의
웃통을 드러낸 채
가까스로 왼눈동자
부릅뜬 너의 진상규명사진첩을 익히 보았던 터라
몹시 겁이 난 모양이다

얼마나 서운할까, 살아 있으면
저도 이만한 자식 두셋은 두었을 터인데
볕바른 무덤만
덩그마니 터를 잡았다

저도 늙는가, 무덤귀가 살짝 헐었다


3
나만 멀쩡해서 미안한,
살아남아서 더 아픈 한 시절
네가 살아남았다 한들
마음 편치 않긴 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몸 도사리듯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도
새맑게 웃는 버릇 여전하구나
앳된 흑백의 청춘과
붉은 산그늘 드리워진 영정 맡에 향 피우듯
담배 한가치 물려 놓고
예서 눈빛 치떠 뜨며 몇 발자국 떼면
확 붙었다 꺼져 가는 성냥개비의 뼈 그스름같이
고스란히 밴
비명소리, 그러나 증거 댈 수 없는 무등의
청옥동 4수원지 기슭을
후다닥, 쫓겨 뛰는 숨 가쁜 발자국 소리
여전히 들리듯 보이는데
보이듯 들리는데
어쩌자고 나는 너를 먼저 보내고 매번 바람의
조문만 받는 것이냐
너를 먼저 보낸 슬픔의, 분노의 무게는 자꾸만
자꾸만 아련해져 가벼워지는 것이냐 


* 28-2는 고(故) 이철규 열사 묘지번호. 열사는 1989년 광주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공안합수부의 수배를 받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광주 북구 청옥동 무등산 제4수원지 기슭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 윗 시는 사이버 문학광장 <웹진 문장> 4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조성국 시인의 허락을 받아 재게재했습니다. https://webzine.munjang.or.kr/
 

 

조성국 시인.
조성국 시인.

** 조성국 시인은 전라도 광주 염주마을에서 태어나 대동고, 조선대학교를 졸업했다.
1990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수배일기」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15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해일」 외 1편을 발표하며 동시도 쓰기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슬그머니』 , 『둥근 진동』과 동시집 『구멍 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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