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시인, 세 번째 시집 펴내... '숙명처럼 짊어진 빚진 마음' 담아
친구 '이철규 열사' 그린 '수선화 피는 망월28-2번지' 등 수록

광주를 단단하게 딛고 살아온 조성국 시인이 최근 세 번째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문학수첩 출판)를 펴냈다.

조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대동고 2학년 때 목도한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과 1989년에 떠나 보낸 친구 이철규 열사 등을 그렸다. 

시인은 광주공동체 안에 살면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잊어서는 안 될 시대의 기억들과 부채감을 50대 중반 반백으로 '미안함의 공동체'로 담담하게 풀어 놓았다.     

조성국 시인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시집 표지그림. ⓒ문학수첩 제공
조성국 시인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시집 표지그림. ⓒ문학수첩 제공

특히 1989년 조선대학교 재학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다 숨진 채 발견된 이철규 열사와 함께 조선대 교지인 <민주조선>을 창간했던 시인의 이력이나 그가 등단하면서 창비에 발표한 시의 제목이 <수배일기>였음을 돌이켜볼때 시인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와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시대와의 불화라기 보다는 역사의 한복판을 질러온 청춘의 열정과 빛나는 좌절, 그리고 사반세기가 훌쩍 지나도 벗어날 수 없는 미안함과 편치 않음이 그가 걷고 있는 시의 자리다.

1990년 <창작과비평> 봄호로 등단한 그는 이제까지 두 채의 시의 집을 지었다. 등단 17년 만에 펴낸 <슬그머니>와 5년 후 펴낸 <둥근 진동>이다.

“풍경과 인사(人事) 속에서 어떤 절정의 순간을 포획하는”(고재종, <슬그머니> 추천글 중에서) 그답게 이번 시집에서도 조성국 시인은 그를 둘러싼 풍경과 사람들에 비낀 사연들을 농축된 토속 언어들로 채집해 내었다.

시의 집짓기를 일컬어 "발견하는 자의 노래”라고 말하는 시인은 과연 눈과 마음에 맺힌 상들을 발견해 내어 시인의 고유한 어조와 음색으로 노래한다. “나만 멀쩡해서 미안”한, 그래서 하염없이 구석을 발견하고 응시할 수밖에 없는 그의 내면에 대해.

“살아남아서 더 아픈 한 시절”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다만 우리네의 생이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연장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 한 달, 한 해씩을 잇대어 가며 다른 이를 ‘대신해’ “살아남은” 존재이기에, 도리어 살아 있음이 더 무겁고 아픈 것이다. 그러나 그 빚진 마음은 역설적으로 하루 또 하루를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겉과 옆에 무엇이 있고 누가 있어 나를 이만큼 견디게 했는지”를 끊임없이 상기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인은 “뜨겁지는 못했어도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것들을 욕보이지 않고 견”(<시인수첩> 2019 겨울호, 『詩사회』 중에서)디어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보낸 서러움의, 분노의 무게는” 자꾸만 “아련해져 가벼워지”기만 한다. “후다닥, 쫓겨 뛰는 숨 가쁜 발자국 소리”가 “여전히 들리듯 보이”고 “보이듯 들”려도, “서러움”과 “분노”의 무게는 세월에 풍화되어 아스라해져 있다.

기억만큼 감정도 닳고 해어져 가는 것일까? 어제 일인 듯 선연하고 명징한 소리에 엉겨드는 시인의 감정은 그래서 더욱 복잡하고 착잡했을 테다. 그것이 결코 “멀쩡”하지 않음에도 “멀쩡해서 미안”하다고 읊조려야만 하는 시인의 숙명인 셈이다.

구석은 구석이라는 이유로 없어지고, 구석이 없어짐으로 하여 또 다른 구석은 생긴다. 거기에는 조성국 시인이 능숙한 솜씨로 부려 놓은 남도 말도 있을 것이고, “솔깃하며 정갈하니 새겨듣는”(<갓밝이>) 떨림도 있을진대, 점점 밀려난다.

더 구석으로, 저기 구석지로…….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는 우선 그 구석에 대한 시집이다. 시인의 성정대로, 구석에 먼저 위치하여 구석으로 밀려난 것들을 껴안는 시집인 것이다.

시인은 서서히 세월에 밀려나는, 그래서 잊혀 가고 묻혀 가는 구석의 풍경들을 살뜰히 들여다보고 따스하게 끌어안는다.

“안침진 뒤울안”에 “낭창낭창 휘어”지는 “은방울꽃대”(「구석에서 생긴 일」)에, “고매(古梅)향 걸터앉은 툇마루/호듯호듯 끓는 볕살”(「저녁 목소리」)에, “연못가의/돼지막 헛간을 개조한 집”(「사라진 집터, 삐뚤빼뚤 배롱나무꽃만 돋는」)에 시선을 드리운다.

그뿐인가. “폐가에서 주워 온 아랫목구들장을 빈 마당 디딤돌로/갖다 놓”기까지 한다. 그 누구도 눈길 주지 않는 구석을 이토록 기웃대는 시인의 속내는 무엇일까.

조성국 시인.
조성국 시인.

일부러 멈추어 서서 시간을 들여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기척조차 감지할 수 없는 존재들. 그저 별 수 없이 사위어 가는 불길처럼 허망한 존재들에게 시인은 숨을 불어넣는다.

마음 둘 곳 없어 서성대다가도 그런 존재들을 발견하면 한달음에 달려가 힘껏 끌어안는다. 그리하여 명을 다한 “아랫목구들장”조차도 새 생명을 입고, 그 주위의 것들을 환히 밝힌다.

“불기운 까맣게 식은 옆구리에 곁이 생겨 사방팔방 다/환”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이미 한물간 내가”(「염주마을 옛집에 들다」)라고 일컫는 그가 구석을 품는 까닭은 잊혀 가고 묻혀 가는 그 풍경들 속에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불씨가 있음을 알아서다. 그렇게 조건 없이 끌어안는 시인의 너른 품에서 구석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따스한 연대가 이루어진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온 세대들에게 이번 조성국 시인의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시집은 또 다른 시대의 반추와 성찰 그리고 광주공동체의 따스함으로 다가올 것 같다. 

/조성국 시인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문학수첩 출판/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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