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죄 의식과 부끄러움이 낳은 서정시
앞선 시대에 일그러진 시인의 초상 담아

1990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수배일기」 연작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조성국 시인이 네 번째 시집 『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문학들 시인선 013)를 펴냈다.

네 번째 시집이라지만 그의 원체험이라고 할 만한 시편들이 빼곡해 마치 첫 시집 같다. 고향 염주마을 회상과 고등학생 때 겪은 5월 항쟁 그리고 대학 시절의 수배와 감옥 생활에 이르기까지 총 61편의 시가 5부로 구성돼 있다.

조성국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귀 기울어 들어 줘서 고맙다' 표지 그림. ⓒ문학들
조성국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귀 기울어 들어 줘서 고맙다' 표지 그림. ⓒ문학들

“총 맞은/총을 맞아 주는/지독한 봄날의 어슴새벽/장전된 제 총의 방아쇠를 끝끝내 당기지도 않았던 최후의//일각!//거기에서부터 나는,/나의 생은 다시 시작되었으니까/당연히 대답이 시퍼런 청춘에 가까워진다”(「내 나이를 물으니까」 부분)

조성국 시인이 “나이를 말할 때면” 한참이나 젊어지는 이유다. “시인의 나이는 바로 1980년 5월 27일의 도청에서 멈춰버렸다.”(김형중, 문학평론가) 그는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부리로 건네주는 모습을 보고 “천변좌로/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주먹밥 챙겨들고/솔래솔래 헌혈하러 오던 옛사람”(「광주천」)을 떠올리고,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받으러” 간 수골실에서 육신이 타는 냄새를 맡고 “국군통합병원과 505보안대와/접근하면 발포한다는 국가안전기획부 담장/경고의 표식이/붉게 새겨진 잿등 고갯길에서” 맡았던 “살 타는 냄새”(「내 몸엔 유골 냄새가 난다」)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5월 항쟁의 기억은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그러나 벗어나려고 발버둥칠 수밖에 없는 시인의 굴레다. “굳이 내가 이 본적의 도시를/한 번도 떠나지 못하는/끝내 저버리지 못한 까닭이 있다면”(「수혈」)

제1부 ‘제 이야길 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에는 5월 항쟁에 대한 기억을 다룬 시편들이 모여 있다. 제2부 ‘동사무소 직원이 야물딱지게 박아 놓은 호적초본 속의 염주마을’은 그가 유소년기를 보낸 고향 마을에 대한 시편들이다.

“들멧쥐들이 고구마 무광을 두레 밥인 양 오순도순 갉아먹”고, “젖니 갓 돋은 각뿔의 동부레기/아지랑이 콧김을/씩씩 뿜어대고/밭갈 채비하던 망백의 양주도 버들개지마냥 하얗게/새하얗게 부풀어 오른 살갗 각질을 긁어”(「똥뫼들 봄」)대는 장면들은 지금의 광주 염주동 아파트촌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 시절들은 “쟁기질 부사리를 부리던/두발 양반”이 날품을 팔게 되고, “징 울리던 너부실댁”(「연꽃 방죽」)이 이십 리나 되는 양동시장 닭전머리를 오가며 생선 리어커를 끌게 되는 시절을 넘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제3부 ‘스멀스멀 뒤밟아오는 낯선 그림자 두엇’과 제4부 ‘머지않아 우리가 옛이야길 하며 밝게 웃는’에는 1980년대 그의 청년기 기억이 담겨 있다.

조 시인은 1986년 행방불명되었다가 의문사 당한 이철규 열사와 조선대학교 교지인 「민주조선」을 함께 만들었다.

“외마디 비명/그 사람이 내지른 것 같아/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 치받치는/아아 되돌아보면/흔적조차 없는 발자국을 끝도/갓도 없이 찍고 가는”(「먼길-80년대 풍경1」 부분)

수배 시절과 대공분실, 광주교도소 등에 얽힌 시인의 초상은 그야말로 우리가 지나온 일그러진 시대의 초상과 겹친다.

시인은 배달 오토바이 헬멧을 보고 백골단의 ‘하이바’를 떠올리고, 발전기를 돌려 천렵을 하다가 대공분실의 전기 고문을 떠올린다(「천렵」) 마지막 제5부 ‘내등마을 들입의 살구나무 청솔 양옥’에는 장년이 된 그가 대안학교 행정실장으로 일하던 시절의 기억을 담았다.

"조성국의 80년대 소재 시편들은 이른바 386세대 인사들이 배 나오고 돈 많은 586(곧 686)이 되고,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박근혜가 사면되고, 전두환이 사과 없이 죽은 2020년대에 다시 읽는 80년대 풍 시편들이다.

그러니까 지난 시대가 한 시인의 영혼을 어떻게 저토록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는지, 그 시대를 다시 소환해 우리 앞에 재전시하는 시, 부끄러움 속에서 그 시절들을 반추하게 하는 시, 그것이 조성국의 시편들이다.

조성국 시인.
조성국 시인.

너무 많은 기억으로 고통받는 자에게 치유는 정당하다. 그러나 나는 또한 쉽게 치유를 말하는 자들(특히 시인들)을 그리 믿지 않는 편이다. 자랑스러워하는 자들보다 부끄러워하는 이들을, 맹목적인 이들보다 자꾸 뭔가 캥기는 마음을 품고 사는 이들을 더 믿는다.

그래서 나는 너무 많이 기억하는 자 조성국이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아무래도 중요한 일, 한두 가지쯤 꼭 빼먹은 것” 같다는 캥김 속에서, 서서히 치유받기를 바란다." (김형중 문학평론가)

조성국 시인은 광주 염주 마을에서 태어났다. 1990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수배일기」 연작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슬그머니』, 『둥근 진동』,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동시집 『구멍집』, 평전 『돌아오지 않는 열사 청년 이철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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