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의 특수부대 3개 여단 포함 2만명의 정규군이 무고한 비무장 시민을 상대로 헬기와 탱크, 총검으로 전쟁을 벌였다가 최초의 시민 무장항쟁을 불러일으킨 지 벌써 43년이 되었다.

1980년의 비극 이후 광주 시민들과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엄혹한 전두환 신군부와 그 뒤를 이은 반민주세력의 집권하에서도 끝없는 투쟁을 이어갔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특히 1980년대 대학가와 시민단체들의 집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광주학살 진상규명’의 구호가 끊이지 않으며 5·18은 민주화운동의 끝없는 동력원이 되었다.

길고 험한 투쟁의 결과 1995년 국회에서는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적인 정의를 내렸다, 사법부에서는 전두환 등 신군부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어 1997년 군사반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 형이 확정되었다.

행정부는 같은 해 5·18묘역을 조성해 국립묘지로 설립했으며 5·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입법, 사법, 행정 3부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정의는 완성되었다.

2011년 유네스코는 5·18민주화운동이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의 민주화운동에 영감을 주는 모범이라며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여 5·18은 이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 프랑스의 인권선언 등과 같이 인류 역사의 기념비적인 유산이 되었다.

5·18기념행사는 5·18특별법 제정 이전부터 광주에서 시민들의 손에 지켜져왔고, 국가기념일이 된 이후에는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기념식이 5·18국립묘지에서 거행되어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5·18의 진실은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상태로 조사가 진행중이다.

1988년의 광주청문회와 1995년의 검찰조사는 전두환 민정당의 후예인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 정권 하에서 진행이 되었다.

2019년 지만원의 5·18왜곡 국회공청회 사건 이후 321일에 걸친 장기농성투쟁의 열매로 5·18진상규명조사위법 시행일로부터 1년반을 넘기고서야 진상조사위가 출범하여 4년째 조사를 진행중이다.

이미 1980년 당시부터 왜곡 조작되었던 군기록들은 80위원회와 511대책반을 통해 재차 왜곡 조작되었고, 시간이 오래 흘러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기억조차 바래지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43년 전부터 보안사와 편의대는 시민들 속에 잠입해 북한군의 개입설을 조작해 퍼뜨렸고 폭동이라 선전했다.

언론인 대량해고와 뒤이은 언론통폐합은 이후 신군부의 입맛에 맞춰 여론을 조작하고 폭동의 이미지를 두껍게 덧칠했다.

그 후유증은 5·18역사왜곡을 처벌하는 법이 현실화된 지금까지도 5·18을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고 강변하는 무리들로 남아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둘 다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헌법개정안은 지난 7년간 발의조차 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고 버린 대국민사기가 되고 말았다.

그 사이 광주의 참사를 일으킨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죄와 진실규명도 피한 채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5·18부상자회, 5·18공로자회, 5·18유족회가 공법단체로 출범하면서 5·18은 유공자인데 법정 유공자단체가 없는 기묘한 상황을 일단 벗어나기는 했다.

그런데 그 탄생과정이 수상하다.

민주 인권 평화 통일이 5·18정신의 핵심일진대, 선거인 명부와 선거절차, 재정, 조직구성이 투명하기는커녕 온갖 부정과 비리, 매수와 고소로 얼룩진 가장 비민주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되었다. 이 또한 기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기묘한 사태는 올해 들어 연속으로 터졌다. 첫 번째 장면으로 새해 벽두에 5·18공로자회 신임집행부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기존 광주, 전남, 서울, 경기, 대구경북 각 지부의 사무직원들을 일제히 해고한 것이다.

단지 구집행부 시절 채용되었다는 이유로 유공자도 관계자도 아니며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의 지위와 권리를 지닌 사람들 위에 악덕기업주처럼 사직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부당해고를 하고 그에 앞서 4대 보험공단에 일방적으로 해지를 통고했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이 문제는 현재 노동위원회에 제소당해 부당해고 구제절차가 진행중이다.

두 번째 장면으로 2월 19일 뜬금없는 대국민선언식이 열렸다.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는 공동으로 반성이 없는 특전사동지회를 광주로 불러들여 ‘용서와 화해와 감사를 위한 대국민선언식’이라는 행사를 강행했다.

원래 함께 하기로 했던 5·18유족회가 반발하며 빠졌고, 오월어머니회를 포함한 광주 전남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합동참배를 하겠다고 했던 특전사동지회가 일명 ‘얼룩이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채’ 저지하겠다는 광주시민들을 피해 기습적으로 5·18국립묘지를 밟았다는 것이다.

특전사 동지회 최익봉 총재는 한술 더 떠서 43년전 특전사 공수부대원들이 벌인 학살은 ‘상부의 명령에 따른 질서유지 행위’라고 강변했다.

이 사건으로 5·18부상자회 회장 황일봉 씨는 자신이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전남대 민주동문회로부터 제명당했고, 5·18 제43주년 행사위원회는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 두 단체를 위원회에서 축출했다.

세 번째 장면은 그 대국민선언식을 전후해 오월어머니집 앞에 난데 없는 수십개의 현수막이 나붙고 5·18부상자라는 사람들 수십명이 나타나 오월어머니집 김형미 관장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은 사건이다.

김 관장이 대국민선언식을 막으려 했다는 이유로 횡포를 넘어선 패악질을 했는데, 김 관장은 5·18에 먹칠하게 될까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네 번째 장면은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가 자신들이 특전사동지회와 함께 공동조사단을 꾸려 진실을 밝히겠다고 한 장면이다.

ⓒ
ⓒ광주인

그들이 내세운 몇 명의 전 특전사 부대원은 이미 특별법에 의한 법정기구인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에서 이미 조사를 거쳐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1997년 이미 대법원에 의해 가해자로 확정된 특전사동지회가 아무런 반성의 태도도 보이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증언이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입단속과 자기정당화의 길만 열어주게 될 것이라고 모든 시민사회단체가 반대하는 가운데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는 강행할 의사를 밝혔다.

다섯째 장면은 5·18기념식 당일을 전후해 광주시내에 수백장이 넘게 내걸렸던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의 강기정 광주광역시장을 모욕하는 현수막들이었다.

과거 몇 년간 계속 5·18구속부상자회에 위탁운영해 왔던 5·18교육관의 위탁운영업체 선정에서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가 제외되자 ‘꼬장을 부린’ 것이었다.

광주광역시는 과거의 관행이 아니라 투명하고 책임있게 운영해줄 업체의 기준에 그들이 도달하지 못한 것이며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밝혔다.

여섯째 장면은 5·18기념식에서 오월어머니들 일부가 윤석열 대통령의 호위부대처럼 입장한 것이었다.

그동안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가 참석할 때는 국가기념일 행사답게 3부 요인 혹은 행정부의 요인들이 뒤따르며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를 맞으며 민주의 문 앞에서 기다렸고, 버스에서 내린 오월어머니들 일부가 그의 뒤를 따라 행사장으로 입장한 것이었다.

오월어머니들 안에서도 그런 의전계획을 보고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넣는 의지를 표명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찬성파와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없는데 또 속을 거냐는 반대파가 공존했지만, 뜻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 채 이명자 씨 등 일부 찬성파만 입장대열에 들어갔다.

ⓒ
ⓒ광주인

그런데 정작 대통령의 기념사에는 5·18의 진실이나 헌법전문 수록과는 별 관련 없는 경제발전 등의 언급만 있었고, 이마저도 제주 4·3기념식에서 했던 기념사의 표절 재탕 수준이었다.

기대를 배신당했다고 억울해 해봤자 이미 방송은 나갔고, 해명요구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이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김광동 씨나 국민의힘 최고위원 김재원 씨의 5·18 폄훼발언 이후 처리과정을 보면서 사실상 예견이 된 일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하는 분노로 되돌아왔다.

일곱째 장면은 연이은 사죄 발언으로 화제가 된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 씨의 광주방문에서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가 마치 연예인 소속사처럼 행동한 장면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범죄에 대한 사죄와 아울러 전두환 일가의 부정축재에 대해서 방송에서 밝히는 등 전두환 일가 중에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가 광주의 상황을 잘 모르는 경우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광주 전남지역에서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5·18정신을 욕보이는 5·18의 수치라고 질시받는 자들이 5·18의 얼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43년전 광주에서는 70만의 시민이 모두 5·18의 당사자였다.

죽고 다치고 잡혀간 사람들 외에도 모두가 시위대와 민주화대성회에 참석했고, 헌혈로 피를 내놓았으며 주먹밥 및 봉쇄후 생필품을 나누는 대동공동체를 이루었다.

5천여정의 총기가 풀린 해방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총기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계가 놀란 엄청난 시민의식이었다.

5월 27일 새벽의 무력진압이 끝난 후 살아남은 시민들은 모두가 죄인이었고, 영령들 앞에 무슨 낯으로 유공자를 신청하느냐며 수천명 이상의 시민들이 스스로 유공자를 포기했다.

그 사이 보안사와 안기부 등이 유공자 심사 과정 중에 프락치들을 침투시켰고, 왜곡된 자료들로 인해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실제 참여자가 아닌 가짜들도 유공자로 스며들었다.

이후 전두환 보안사에 의해 북한이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이 5·18 폭동을 배후조종했다는 식으로 엮는 바람에 광주에 온 적이 없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5·18유공자로 편입되었다.

ⓒ
ⓒ광주인

80년대 내내 광주 학살의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의 목소리가 대학가와 노동운동권, 통일운동권에 메아리쳤고 꽃다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을 포함해 그렇게 체포 고문 구금을 당한 사람들 역시 5·18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이렇게 5·18은 1980년 5월 27일 전주 신흥고 시위로부터 전국의 5·18이 되었고, 1980년 5월 26일 미국 시카고에서 5·18 시위가 시작된 후 지금은 홍콩이나 미얀마의 민주화운동도 자신들을 또다른 5·18이라고 부를 만큼 5·18은 세계의 5·18이 되었다.

5·18은 특정 유공자들만의 것일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5·18유공자단체가 기괴한 선거를 통해 가장 민주적일 수가 없게 된 후에 인권도 평화도 통일도 5·18에서 사라져버렸다.

5·18이 5·18에 의해 짓밟히고 고소당하는 기막힌 상황이 올해 상반기 내내 벌어지고 있다.

국가보훈부라는 뒷배를 업은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는 부정한 선거를 통해 얻은 권력을 휘둘러 5·18정신을 지키기는커녕 일반시민들조차 5·18에 대한 피로감과 나아가 혐오감을 조성하고 있다.

사람들이 포기하고 등을 돌려야 그들이 차지하고 천년만년 독점하며 온갖 이권사업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광주인
ⓒ광주인
ⓒ광주인

그리하여 5·18은 오늘도 피흘리고 있다. 5·18영령들은 동지들에게 어머니들에게 다시 배신당한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에는 두께가 더해지고, 5·18정신을 팔아먹으려는 자들의 악악대는 목소리만 더욱 높아지고 있다.

참으로 기묘함을 넘어서 기괴한 43번째 오월이다. 44번째 맞을 오월이 벌써부터 심히 걱정이 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