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2m 사각 말뚝 ‘세계 인류 평화가 이룩되도록’ 문구
‘정체불명’ 말뚝 설치 의문…광주시 등 관련기록 없어
피스폴프로젝트 일환, 일 종교단체 백광진굉회서 설치한듯
광주시 "사실관계 확인 먼저
…종교집단 설치했으면 철거"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는 광주 5·18민족민주열사묘역(구묘역)에 일본 신흥 종교집단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말뚝이 설치돼 있어 의문이 일고 있다.

13일 광주 북구 ‘망월동 5·18묘역’. 입구 돌탑 근처에 높이 2m 가량의 흰색 사각 말뚝이 세워져 있다.

말뚝의 4면 중 2면에는 한글로 ‘세계 인류의 평화가 이룩되도록’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머지 2면은 영어와 일본어로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말뚝은 누가 언제 설치했는지 출처가 불분명해 그동안 숱한 궁금증을 일으켰다. 하지만 말뚝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 광주 북구 ‘망월동 5·18묘역’ 입구 돌탑 근처에 세워진 높이 2m 가량의 흰색 사각 말뚝. ⓒ아주경제

▲ 광주 북구 ‘망월동 5·18묘역’ 입구 돌탑 근처에 세워진 높이 2m 가량의 흰색 사각 말뚝. ⓒ아주경제

25년 근무자도 몰라…설치 관련 기록 전무

광주시는 물론 5·18기념재단, 5·18묘역 관리사무소 등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5·18묘역 관리사무소에서 25년간 근무해 묘역 구석구석을 다 안다는 최고참 근무자 정아무개(60)씨도 “너무 오래된 데다 누가 설치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형도 5·18묘역 관리소장은 “직원들 중에서도 누가 언제 왜 설치했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어 저희도 궁금하다”며 “외지에서 참배하러 왔다가 설치한 것 아닌가 싶지만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 말뚝과 관련한 거의 유일한 기억은 5·18 관련 단체의 한 회원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 회원은 “2000년 초 재일교포를 포함한 일본인 서너 명이 말뚝을 세운 것으로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당시 팻말에 적힌 일본말은 모르지만 한글로 ‘세계 인류 평화가 이룩되도록’이라고 쓰여 있어 별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세계 인류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설치한 것으로 보고 무심코 넘긴 것이다.

러시아 연해주서 똑같은 말뚝 발견

‘정체불명’의 이 말뚝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광주지역 문화단체인 한겨레문화고리가 일본인들이 특정한 의도를 갖고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면서다.

이 단체는 고려인의 발자취와 항일 역사 기록을 담기 위해 지난해 러시아 연해주의 한 민속마을을 방문했다가 5·18 옛묘역에 있는 것과 똑같은 말뚝을 발견하고 최근 문제를 제기했다.

박재완 한겨레 문화고리 대표는 “현지인들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사람들이 말뚝을 세우고 갔다고 말했다”며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침탈한 현장에 말뚝을 세우고 일제의 침략 행위를 평화주의로 포장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지역 문화단체인 한겨레문화고리가 고려인의 발자취와 항일 역사 기록을 담기 위해 지난해 말 러시아 연해주의 한 민속마을을 방문했다가 찍은 말뚝. ⓒ아주경제

일본 신흥 종교집단 백광진광회 설치한 듯

<광주in>이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추적한 결과 이 말뚝은 5·18묘역과 러시아 연해주 외에 사할린, 몽골, 태국, 사이판 등 전 세계 곳곳에 설치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 내에도 세계2차대전 당시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를 비롯해 일본 최북단인 소야미사키 등에 상당 수 설치돼 있었다.

심지어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장 ‘이시이’가 사망 후 묻힌 도교 한국학교 바로 옆 사찰에도 이 말뚝이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일본의 신흥 종교집단인 ‘백광진굉회(白光真宏会)’가 설치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백광진굉회는 세계 평화의 기도를 제대로 실천하고 정확하게 후세에 전승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다.

‘인류의 개개인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평화로워야 한다’며 내가 곧 신이고 인류가 곧 신이라는 의미의 ‘아즉신야(我即神也)’ ‘인류즉신야(人類即神也)’를 내세운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고이 마사이사(1916~1980)는 1975년부터 ‘피스 폴 프로젝트(Peace Pole Project)’를 추진해 왔으며 세계평화기원협회라는 조직 등을 통해 현재까지 190여 개국에 20만여개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시는 5·18옛묘역에 설치된 정체불명의 말뚝의 사실관계를 확인 후 조치하겠다는 입장이다.

광주시 관계자는 “민주의 성지인 5·18묘역에 일본 종교집단이 말뚝을 세웠다면 취지에 맞지 않는 만큼 철거해야 할 것”이라며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 일본 신흥종교집단인 백광진굉회 홈페이지 캡쳐. ⓒ광주인

▲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장 ‘이시이’가 사망 후 묻힌 도교 한국학교 바로 옆 사찰에 설치된 말뚝. ⓒKBS캡쳐

▲ 나가사키에 세워진 말뚝.

▲ 사이판 타포차우산 정상에 설치된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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