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새삼 소개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신의 일거일동을 감시당하는 세상에서 살게 된다면 얼마나 무섭고 가슴 떨릴까 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알 것이다. 이건 소설일 뿐이라고.

그러나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주위에서 일어난다. 아니 바로 자신에게 일어난다. 지난 3월26일 한통의 우편물을 받았다. 봉투에는 ‘서울지방검찰청’이라 도장이 찍혀 있었고 보낸 사람은 공안2부 923호실 검사 ‘정재X’이었다. 시국사범을 다루는 곳이 공안부라는 것은 안다.

봉투를 들고 떨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공안부에서 편지를 보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어디서 북한을 찬양했는가. 어디다가 김일성 찬양 글을 썼는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고 이러다가 잡혀가는 것은 아닌가.

뜯어봤다. 내용인즉슨 지난해 12월 16일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있은 민주통합당 예비경선장에 갔었는데 그때 거기서 통화한 내용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게 바로 659명 통화내역 조사라고 언론에 보도된 사건이고 나도 거기 낀 것이다.

이거 도무지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지금 민간인 사찰 사건이 이명박 정권의 목을 매단 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놨다. 불법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용이 하도 해괴망측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여자와 두 번 뽀뽀를 했다. 맥주 두 병 중 한 병을 떨어트려 깨트렸다. 남자가 뭔가 애원을 하고 여자는 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찰을 당한 사람은 몇천 명이다. 지금 하나씩 들통이 나고 있다. 누가 사찰을 당했는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적과 동지도 없다. 찍혔다 하면 사찰이다. 어디서 맘 놓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누가 쳐다만 봐도 가슴이 내려앉는 세상이 됐다. 나란 존재는 어디 있는가. 내 인생은 어디에 있는가. 언제나 발가벗고 만인이 주시하는 대로에 서 있다. 이건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다.

일제시대 고등계라는 것이 있었고 경찰서에는 사찰과가 있었다. 자유당 때도 경찰에 사찰과 형사라는 것이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 됐다. 박정희 독재 때도 중앙정보부가 국민을 감시했다. 방송국을 비롯한 언론사마다 조정관이란 이름의 정보요원이 상주했고 국장실이나 사장실을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그때 그들을 보면서 비굴한 웃음을 짓던 기자 PD들, 작가들의 얼굴이 선하다. 참여정부 때 이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다시 부활했다. 아니 이제는 전화 한 통화 마음대로 못한다. 어쩌다 애인에게 사랑한다는 은밀한 말 한마디도 못하는 세상에 살게 됐단 말인가.

촛불에 혼이 나간 이명박 대통령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국민사찰을 생각해 냈는가. ‘촛불은 누가 돈을 내서 마련했는가’라는 대통령의 물음에 충성심 강한 졸개들이 알아서 긴 것인가. 민간인 사찰에 민정수석실이 관련되었고 그 당시 민정수석은 지금의 법무장관이어서 국민들은 물러나라고 아우성이다. 부인을 해도 문건으로 증거가 드러났다.

도대체 죄진 놈이 기자들 앞에 나와서 미친 듯이 ‘내가 몸통이다’라고 소리를 치는 세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TV에 나온 이영호를 보고 정신이 제대로 든 인간인가 의심한 국민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바로 저런 공무원, 저런 정신 나간 인간을 믿고 우리 국민은 불쌍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양심이란 것은 찍어 누른다고 죽는 것이 아니다. 벌써 민간인 사찰과 관련해서 양심선언을 할 공무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소문이다. 온통 세상이 아수라장이다. 어디를 가도 민간인 사찰 얘기다. 선거 얘기는 민간인 사찰과 직결된다. 민간인 사찰이 세상을 덮어 버린 것이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면 천하의 박근혜라도 한마디 해야 한다. 집권당의 비대위 대표가 아닌가. 입 꽉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한다는 소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해야 한다.’ 유치원 다니는 내 어린 손자도 할 수 있는 소리다. 분별력이 있는 대표라면 공개적으로 이명박 대통령 면담 신청을 하고 따져야 한다. 당신 때문에 선거 망치게 됐다고 하야를 요구해야 한다. 빈말이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인간이 비밀을 좋아하는 속성이 있는지는 모르나 나만의 세계는 누구나 갖고 싶어 한다. 이걸 보장하는 것이 국가다. 그래서 통신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맹탕 남의 통화기록을 지들 맘대로 뒤져서 조사를 하고 나중에 달랑 편지 한 장 보내서 때워? 그리고 할 말 있으면 아무개 검사한테 따져라. 어느 간 큰 국민이 검사한테 가서 따진단 말인가. 속으로 벼락이나 맞으라고 욕하는 방법밖에 없다.

윤석양 이병이 그 무서운 보안사에서 사찰문건을 빼내 세상에 알렸을 때 난리가 났었다. 도대체 머리통에 뭐가 들었기에 이토록 안 돌아 간단 말인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고등고시 합격하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하는 짓은 왜 그리 바보스러운가.

이미 언론노조에서는 대통령 하야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다음 주에는 대통령 하야하라는 소리가 봇물처럼 터질 것이다. 4대강 물길도 막은 이명박 정권이니 봇물 정도의 국민 요구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할지 모른다. 그러나 몇십 미터 높이로 덮쳐오는 분노한 국민의 쓰나미 앞에서는 도리가 없다.

아예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독재정권이 전가에 보도처럼 뽑아 쓰던 북풍 같은 잔머리는 굴릴 생각도 말아야 한다. 그런 거 가지고 통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학습 많이 받았다. 디도스 공격도 어림없다. 옛날식으로 꼬리 자르기는 어림도 없다. 이영호가 몸통이라고 큰소리쳤지만 믿는 국민 없다.

민간인 사찰의 진상을 대통령이 소상하게 밝히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심판을 받는가.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새벽에 인터넷을 켜면 현기증이 난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지구 위에 존재하는 세상인가. 길을 가면서도 앞뒤를 살펴야 하고 식당에 들어가면서도 누가 뒤따라 들어오지 않나 긴장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도 경계를 해야 한다. 우편함을 열기가 무서운 세상에는 정말 살기 싫다.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됐다.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 인간관계가 단절되면 누구하고 살란 말이냐. 개나 기르며 살란 말이냐.

국민들이 정말 정신 차려야 한다. 국민들이 입을 닫으니 무시를 당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국민을 이겨 먹는 정치가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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