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 시절 비민주적인 악행은 범죄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가문을 소중하게 생각해 왔다. 옛날 대쪽같은 선비들은 본의가 아니라도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으면 조상 묘에 엎드려 사죄를 했다. 심지어 목숨을 끊는 선비도 있었다. 그만큼 가문의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가문의 역사는 소중하다. 흔히들 ‘내가 아무개 몇대 손’이라고 자랑을 한다. 충신의 후예들은 조상을 자랑한다. 항일독립운동을 한 애국투사들의 후손들도 비록 생활은 어려워도 대단한 자부심으로 산다.

친일파의 자손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당당하지 못한 조상 때문이다. 비록 재산이 많아도 조상이 저지른 부끄러움은 지울 수가 없다.

요즘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다. 인터넷에 들어가 몇 번 두들겨 보면 족보부터 홀랑 벗겨진다. 요즘 공천이 한창인데 몇 년 전에 한마디 잘못한 것이 들통나서 다 된 밥에 코 빠트린 것을 자주 본다.

4.3 제주항쟁이 ‘폭동’이고 5.18이 ‘반란’이라는 이영조의 망발이나 독립군을 ‘테러범’이라는 박상일의 언어테러야 사람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공천이 취소되어 죗값을 치른 셈이다. 두 사람 모두 조상에게나 자손에게나 못 할 짓을 한 셈이다.

부끄러운 조상을 둔 후손들이 처신에 불편을 느끼듯 변변찮은 행동으로 조상 얼굴에 먹칠을 하는 후손들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조상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조상들의 영혼이 땅을 칠 일이다.

존경받는 인물의 후손들은 자신의 처신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게 자손 된 도리고 후손 된 도리다.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줄줄이 이어져 있어서 말의 풍년이다. 말 같지 않은 말들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닌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유신체제에 구체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말은 김종인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한 말이다. 이 발언은 김종인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의 입장이든 혹은 자신의 소신이든 박근혜가 한 발언인 ‘산업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발언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김종인의 생각이 어떻든 그건 그의 생각이고 박근혜 위원장이 말한 ‘산업화 과정에서 피해’ 운운은 결코 수용할 수가 없다. 왜냐면 산업화가 불법으로 인간의 목숨을 뺏고, 고문을 하고, 많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종인은 박근혜를 지지하며 비대위원을 한다. 그러니까 그가 박근혜를 두둔하거나 칭찬하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때로 김종인이 이상돈 교수와 더불어 박근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효과를 기대한 고도의 정치행위라는 평가를 하는 것도 비대위원인 그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피해’라는 변명에 대해서는 분명히 한마디 해야 옳다.

왜냐면 김종인의 발언은 바로 ‘유신 감싸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박정희 유신’이 신앙인 사람도 있겠지만 김종인에게 있어서도 그런가. 하기야 유신이 신앙이든 아니든 그것 역시 김종인의 자유다.

김종인은 재벌개혁을 주장해온 경제학교수로 정계와 학계를 넘나든, 일명 마당발이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청와대에도 있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은행 관련 비리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나무가 커서 바람을 많이 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속이 편할 것이다.

요즘 법이라는 것이 국민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법이 국민에게 조롱의 대상이다. 유전무죄요 무전유죄라고 했는데 이제 무권유죄 유권무죄라는 말이 첨가됐다. 이런 때일수록 올곧은 법조인이 그리운 것이다. 가인 김병로 선생은 법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운 얼굴이다.

그 서슬 퍼런 이승만 독재시절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고 불평을 하자 “불만이 있으면 항소하라”고 쏘아붙였다. 그 후 역대 대법원장마다 김병로 대법원장과 비교가 된 이유를 국민은 잘 알고 있다. 바로 김병로가 김종인의 조부다. 김종인을 말할 때마다 김병로 대법원장이 입에 오르는 것은 김종인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박근혜가 유신체제에 구체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김종인이 한 말로 여기엔 여러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여지는데 만약 김병로 대법관이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김종인도 '인혁당 사건' 같은 사법살인을 ‘산업과 과정에서의 피해’라고 인식하는가 하는 점이다.

김종인은 문재인이 박근혜에게 유신체제를 사과하라고 했다면서 그건 ‘연좌제’라고 비판했다. 문재인은 박근혜 위원장에게 유신체제를 사과하라고 말한 사실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문재인이 물은 것은 박근혜의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본의 아닌 피해’가 사죄냐는 것이었다. 유신독재 체제에서 발생한 비민주적 악행이 본의 아닌 피해냐는 것이다. ‘인혁당 사법살인’도 본의 아닌 피해냐는 것이다. 적어도 김종인 정도라면 그런 식의 왜곡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삼십 대는 유신의 공포를 모른다. 그 시절엔 누가 유심히 쳐다만 봐도 가슴이 철렁했다. 중앙정보부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잡아갈 수 있었다. ‘영장’도 ‘미란다 원칙’도 없었다. 가자면 가는 것이고 때리면 맞는 것이고 죽이면 죽는 것이었다.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도 그렇게 중앙정보부에서 죽었다.

사람은 수십 번 변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변하면 안 된다. 범죄를 감싸면 안 된다. 지식인이 그러면 안 된다. ‘유신 감싸기’는 바로 ‘범죄 감싸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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