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성명서 [전문] 

                  십자가의 사람
 

금년에도 우리는 망월동 묘역을 찾아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사제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부르심에 응답하려 집 떠나던 날의 초심, 사제품을 받고 세상으로 돌아오던 날의 다짐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령 아래 한반도 전역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때, 유일하게 침묵을 깨고 피 흘려 저항하였던 도시, 광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빛고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을 마시며 자라났거니와, 사제들에게도 ‘오월광주’는 타성에 젖은 자아를 채찍질하고, 다시금 세상을 위한 헌신을 맹세하게 해주는 일종의 성사이다.
 

1. 십자가, 사람의 사람다움

무엇이 사제를 사제로 만들어 주는가? 아니 사람은 언제 사람다운가? 십자가를 짊어질 때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1)는 말씀은 궁극적으로는 사람다움의 조건을 알려 준다. 인간은 자주 목마르고 배고프지만 바위 같은 자기 몸을 깨뜨려 물을 쏟아 주고, 제 허벅지의 살을 베어서라도 누군가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다. 그리하여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사제는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다.”(교종 프란치스코)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이 행복할 때도 좋지만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 더 좋아지는” 인생의 신비를 말없이 삶으로 보여주는 교사다.

동시에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는 강으로부터/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는 나무로부터/ 스스로를 비추지 않는 태양으로부터/ 참 삶의 비결을 배우고 또 배우는 학생이다. 그리하여 사제는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사람, 마침내 십자가의 사람이고자 한다.

현실의 십자가는 감당하기 두렵고 꺼려지는 그 무엇이다.

훗날 스승과 똑같은 최후를 자원했던 용맹의 제자조차 “주님,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마태 16,22)하고 반발했고, 사실은 예수님부터 피할 수 있기를 기도하셨으니 못나고 겁 많은 우리로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난날을 돌이켜보건대 너무나 자주 “나는 그를 알지 못하오.”(마르 14,71) 하고 잡아떼면서 달아났으며, 그때마다 “몸을 돌려 제자를 똑바로 바라보셨던”(루카 22,61) 스승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그분은 아침이슬 같은 보잘것없음이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면서 “내 몸이다 먹어라, 내 피다 마셔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진면목을 깨우쳐주셨다.

그리고 나날이 그렇게 살아가라며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제물로 삼는 사제의 직분을 맡겨주셨다.

부당한 죄인인 줄 알면서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마주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에 붙들렸기 때문이다.
 

2. 십자가, 하늘의 뜻을 실어 나르는 멍에

수난의 십자가는 누구라도 기피할 불상사지만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잔이다.

하늘의 뜻은 하늘에, 땅에서는 그저 땅의 뜻을 펼치고 이루련다 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만날 일이 없다.

사실 세상은 그와 같은 이분법을 주장한다.

악령 들린 사람이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마르 1,24 공동번역) 하고 대들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반항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문 하느님을 겨냥한 것이었다.

악령의 목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 안팎으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뜻을 땅에서 이루라는 천명天命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한 노인이 하느님 나라를 땅에 세우려 태어난 아기의 앞날을 두고 했던 말은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그러면 어쩔 셈인가? 그럴 듯하게 시늉만 내고 속으로는 거리를 두거나 멀리 내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럿이 함께 주님이 가신 길을 걷고자 한다.

‘예’ 할 것에는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에는 ‘아니오’ 하는 십자가의 도道. 해야 할 일이라면 하기 싫어도 기어코 해내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꾹 참아내는 십자가의 덕德을 포기하거나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어깨를 누르는 십자가가 하늘의 뜻을 나르는 거룩한 멍에임을 우리는 안다.
 

3. 십자가의 위력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사흘 만에 일으키셨습니다.”(사도 10,39-40) 하였을 때, 그 ‘나무’는 종교의 위선과 불의한 권력이 야합하여 깎아 세운 폭력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부활은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이치에 순종하고 하늘의 뜻을 살피는 이들과 땅의 권력을 차지한 자들의 격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편 십자가를 개인의 희생으로 축소하거나 현재와 무관한 과거의 기념비 정도로 여기는 도도한 흐름은 어찌된 일일까.

대놓고 십자가를 “비위에 거슬리거나 어리석은 일”(1코린 1,23 공동번역)이라고 불평하지는 않지만, “예수를 따라 가다가 붙들리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마르 14,52)던 그날 밤의 도주를 변명하려다 보니 그런 변형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는 안 된다. 땅의 아들이 하늘의 아들로 거듭나는 수는 오직 십자가의 길에 있다.

십자가 없는 사제의 삶은 허영이거나 허세이기 쉬우니 거기서 무슨 보람이나 기쁨을 찾으랴.

저항과 대동, 두 정신으로 악마의 군대를 물리친 광주는 십자가와 부활의 표상이다.

항쟁 직후 김준태 시인이 109행의 장시를 지었으나 신문에는 고작 33행 밖에 실리지 않았다.

사전검열을 자행하던 계엄군은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제목에서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잘라버렸다.

본문 세 곳에 나오는 “십자가”라는 시어를 모조리 들어냈다.

그래서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하는 노래도,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하는 노래도 지워졌다.

마지막 연에서 광주와 무등산을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허락했지만 “십자가여”하고 호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오월의 광주에서 “죽은 자/ 죽어서 살아있고/ 산 자는/ 살아서 죽어 있었다.”(고은)고 하였듯이 죽어도 죽지 않게 하는, 아니 죽어서 영원히 살게 하는 십자가의 위력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일찍이 “진세를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서울) 하였으니, “몸 마음 갈고 닦아 착한 목자 되리라”(부산) 하였으니, “주님 먼저 가신 길 그 길을 나도 가네”(대전) 하였으니, 그리하여 “겨레를 섬겨나갈 자랑도 크다”(광주) 하였으니 우리 다시 십자가의 분투를 다짐하자.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호소에 공명하는 참여로서, 병든 세상을 책임지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운명을 맡기는 투철한 복종으로서 십자가를 부둥켜안기로 굳게 다짐하자.

2023년 5월 15일

광주민중항쟁 43돌을 맞이하여
5․18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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