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의 모습

김동수 열사는 1958년 7월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에서 작은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 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는 늘 푸른 산과 너른 들녘이 있었기에 몸과 마 음은 항상 건강하고 풍요로웠으며 인간미가 넘 쳐흘렀다.

지광 김동수 열사.
지광 김동수 열사.

근검하신 어머니와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신 아버지 밑에서 가르침을 받아오신 열사는 동생 들에겐 장난을 곧잘 받아주는 친근한 형으로, 후배들에겐 언제나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마음 씨 좋은 선배로, 그리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따르 는 예의 바른 청년으로서 말다툼 한 번 하지 않은 인간미 넘치는 청년이었다.

열사는 손재주 또한 남달라 문패, 책꽂이, 썰매 등을 직접 만들곤 했 었는데, 그 솜씨가 전문가 수준이었다.

열사는 73년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에 입 학한 후 광주 향림사, 관음사 고등부에서 불교 학생회 활동을 하며 학업과 동시에 불교활동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갔다.

80년 5월이 될 때까지 고모댁에 기거하면서 고모님의 따뜻한 격려 속 에 건강하게 생활을 이어갔다.

대불련 활동과 지부장 역할

1978년 열사가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 학과에 입학한 후 대학생활의 시작에서부터 한 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 활동이 시작되었다.

늘 동기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냈고 모든 활동들을 과묵하고 차분하게 진행해 나갔다. 그는 성품이 매우 소탈하여 옷을 바꿔 입고 오는 날이 기억될 정도였는데 빨간 줄무늬 스웨터에 밤색 재킷 상의와 밤색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리고 담배를 매우 좋아하여 실수로 바지에 구멍 을 낸 적이 많았다. 얼굴의 모습은 광대뼈가 튀 어나오고 고집스럽고 외골수적인 눈빛에 매우 강한 인상을 풍겼다.

그렇지만 마음은 여리고 따 뜻해서 그 당시 조선대 불교학생회의 주요 아지 트인 “사랑방”이라는 라면집에서 만날 적이면 모 든 법우에게 부담 없고 친근한 친구 같았다.

열사는 80년에 군입대를 연기하면서까지 대 불련 전남지부장 직을 맡을 정도로 모든 일에 주체적으로 나서서 열심히 했고 책임감 있게 생 활하였다.

서울에서의 대불련모임, 각종 시국 강연회, 정읍에서의 동학혁명 추모집회, 4·19 혁명 기념행사에도 참여하였고, 학내 민주화 투쟁을 위한 철야농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 였다.

아울러 광주지역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 의 부위원장을 맡아 책임감 있고 빈틈없는 활동 으로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다.

이처럼 바쁜 생활로 인해 장성 고향집에 자주 내려가기는 힘들었기에 방학기간  며칠 집에 머 무를 때는 아버지와 밤늦도록 담소를 주고받았 고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고 열사의 동생 김동채는 회고했다.

5·18민중항쟁 당시의 열사의 모습

김동채는 김동수 열사가 1980년 5월 16일 토 요일 아침 광주공원에서 있을 초파일 봉축행사 에 참석할 수 있냐고 자신에게 물었는데, 그것 이 형님의 마지막 목소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 랐다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1980년 당시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부위 원장으로 활동하신 열사는 광주 시민회관에서 진행될 사상강연회와 봉축행사 준비를 위해 조선대 불교학생회의 모임 장소인 교내 신광사 에 가는 길에 조선대 운동장에 주둔한 계엄군 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5월 17일 밤부터 광 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계엄군의 숫자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나 위협적인 느 낌을 받지 못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17일) 오후에 신광사에서 일을 하 다가 근처 가게에 물건을 사러 내려갔다 올라 온 여자 법우들이 아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 다고 하였다.

몇몇 남자 법우들이 다시 살피 러 내려갔는데, 계엄군들이 시민들과 학생들 을 무조건 잡아들이고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였 다. 급히 다시 올라와서 다른 법우들을 먼저 안 전하게 귀가시키고 김동수, 이남, 오원재 3명만 남아서 사태를 계속 예의 주시하며 살펴보았다.

남은 이들 3명은 이미 자신들이 에비검속자 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몸을 피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그 당시에 이들 3명 은 예비검속자 명단에서 누락되었지만, 나중 에 결국 다시 예비검속자로 판명돼 모두 검속 당하였다.

암울했던 5월 18일, 그들은 봉축위원회 사무 실이었던 금남로의 관음사로 갔다. 초파일행사 를 강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해 논의하였 다.

대불련의 입장은 시국이 어수선한 때에 행 사를 강행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결국 행사를 연기하도록 하였다.

행사 연기를 확인 하고 짐 등을 꾸리려고 신광사에 올라갔다가 내 려오면서 조선대 후문 쪽에서 술이 취해 얼굴이 벌게진 공수부대원들을 발견했다.

‘꺼져라’, ‘죽 이겠다’ 등의 폭언을 쓰는 그들을 피해 나와서 일행 중의 여자 법우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김동수, 이남, 오원재, 홍광기, 당시 조선대학 교부설공업전문대학(이하 조대공전) 불교학생회 회 장만 남게 되었다.

우선 외곽으로 빠지자고 결정 한 이들은 송정리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터미 널로 가는 도중에, 전남여고 후문 쪽에서 버스가 공수부대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앞차를보니 학 생들이 곤봉으로 구타당하는 모습이 보였고 이 때 운전기사 아저씨는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저 렇게 패니 얼른 도망가라”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모두 버스에서 내려 도망치고 있었는 데, 공수부대원들이 워커소리를 내며 바로 뒤에 쫒아왔다. 무작정 들어간 곳은  어느 가정집이었다.

그 집의 장롱 속에도 들어가고 침대 밑에도 들어가 숨어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문을 두 드리며 그들을 내보내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당시 광주시민들은 한결같이 이들을 아끼고 있 었기에 모두 안전할 수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이 떠난 후 그 집에 사는 택시운전기사 아저씨가 그 들 5명을 두 차례에 걸쳐서 외곽으로 실어다 주 었다. 모두 차 뒤 트렁크에 숨어서 이동하였다

밖에 나온 홍광기와 오원재는 오원재의 집으 로 갔으며, 김동수, 이남, 조대공전 회장은 목 포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1992년 조산대학교 교정에 건립한 지광 김동수 열사 추모비. ⓒ이해모
1992년 조선대학교 교정에 건립한 지광 김동수 열사 추모비. ⓒ이해모

왜냐하면 조대공전 회장의 집이 목포 근처였고, 또 목포 준 지부 체 육대회가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파악도 할 겸 해서 이동했다.

그날 밤에 목포에 도착하여 정 혜원 스님을 찾아갔더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체육대회 준비 걱정이냐, 얼른 몸을 숨겨라”고 말씀하셔서 목포 외곽의 조대공전 회장의 집으 로 가게 되었다. 집에서는 일행을 모두 따뜻하 게 반겨주어서 몸은 편했다.

이때는 다른 사람 들의 눈도 있고 해서 낮에는 집안에만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자유로운 거동이 가능했다.

19일 광주의 상황이 어려워짐을 알고 열사는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에 다시 광주로 올라가자 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다른 두 사람은 “이미 올 라갈 차편도 없는데 어떻게 갈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래서 며칠 더 그곳에 서 머물렀다. 21일 오전에 바깥 상황도 살펴보고자 목포 시내로 나왔다.

그때 시내에는 시위대들이 목 포를 해방구로 만들기 위해 광주에서 내려와 있었다.

시위대들은 차 앞에 태극기를 앞세우 고 머리에는 띠를 두르고 차를 타고 돌아다니 면서 광주의 피해 상황과 계엄군의 만행을 알 리는 가두방송을 하고 있었다.

이에 목포 시민 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 대신 울분과 분노를 삼키며 2만여 명 정도가 목포역에 운집하여 군부독재에 대한 반대시위와 광주시민들의 민 주화 투쟁을 적극 지지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했던 김동수 열사가 갑자 기 사라졌다. 그날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부 처님이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 께 했듯이 열사 또한 역사의 거룩한 한 장을 채 울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이때 광주로 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민군의 차에 탑승하는 것밖에 는 없었고 그가 일행에게 말없이 광주로 올라간 것은 친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혼자 외로 운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 있다.

이 점은 김동수 열사의 생전의 행동이나 성정에 비추어 충분히 짐작되는 부분이다.

21일 광주에 도착한 열사는 효천동 고모댁에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전화를 하였다. 이때 열 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에 맞서 광주시민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로 광주에 온 열사는 전남 도청 내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쓰러져간 시민들을 보면서 “보살의 삶은 아무리 하찮고 작은 일이라도 남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 신의 몸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평소에 말 했던 것처럼 그가 했던 일들은 누구도 쉽사리 하 지 못하는 시체 안구와 안치였다.

손수 입관하여 염불을 외워주기도 하고, 관에 태극기를 둘러주 는 일들을 했었다고 당시 도청에서 만났던 사람 은 증언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27일 마지막 날까지도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여야 한다고 이 야기했다고 한다.

또한 원각사에 다니면서 알게 된 유석씨의 증언에 의하면, 5월 25일 궐기대회 중에 머리에 방석모를 쓰고 한손에 총을 들고 도청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김동수 열사의 모습 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5월 27일 운명의 그날, 전남도청에서 시민군 들과 함께 도청을 사수하고자 했던 열사는 새벽 4시 30분 경 도청 탈환을 위해 탱크를 앞세우고 시가지로 진입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한 점 혁명의 불꽃, 민주의 보살이 되어 스러졌다.

한편 18일부터 광주의 상황이 악화되자 열사 의 아버지께서는 열사의 동생들을 시골로 데려 가기 위해 광주에 올라왔다.

그러나 두 동생들 이 고모댁에  그냥 있겠다고 하자 아버지 혼자 장성으로 내려갔다가 광주의 사정이 계속 악화 되자 24일에 다시 광주로 와서 열사의 누이와 동생을 장성 집으로 데려갔다.

16일 이후 소식이 끊긴 열사를 어쩔 수 없이 남겨둔 채 장성읍에 도착한 열사의 가족들은 친 척들로부터 “계엄군이 젊은 사람과 대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죽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연 락이 두절된 열사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그렇게 불안한 상태에서 아들의 소식을 마냥 기다릴 수 만은 없었던 열사의 아버지는 친구들의 집과 인근 광산군에 있는 오원재의 집, 열사가 자주 다 녔던 무안, 광주의 사찰 등을 수소문했지만 그 의 얼굴은커녕 생사조차 들을 수 없었고, 결국 열사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망한 지 10여일이 지난 6월 7일 면사무소로부터 사망자들의 지문채취를 하다 가 열사의 시신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 다.

27일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으며, 망 월동에 가매장해 놓았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이는 당시 의사로서 봉축위원회 진행위원장을 맡아서 함께 일했던 전남대불교학생회 동문 이순규와 평소 친분이 있던 광주동부경찰서의 변사체 담당 추경사의 도움으로 알 수 있었다.

24일 오전 5.18묘지에서 엄수된 김동수 열사 40주기 추모제에서 홍경희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광주인
24일 오전 5.18묘지에서 엄수된 김동수 열사 40주기 추모제에서 홍경희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광주인

가족들이 시신 확인을 위해 망월동 묘지에 가서 보니, 평소에 목에 걸고 다녀서 윤이 반지르르 해진 염주와 눈에 익은 옷가지 등을 보고선 김 동수 열사의 죽음을 최종 확인하였다.


열사가 남긴 유품은 염주, 대불련 배지, 수강신청서, 동전 몇 개와 시계가 전부였다. 

열사는 망월동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으 며, 1989년에는 조선대학교에서 명예 공학사 학위를 수여하여 김동수 열사를 추모하였다. 1992년에는 지광 김동수열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김동수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조선대학 교 민주공원 내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1995 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 제1묘역 2-27에 안 장되었다. 김동수기념사업회와 조선대학교, 한국대학 생불교연합회 동문회원들은 매년 김동수 열사 를 추모하고 그의 보살정신을 계승하는 추모사 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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