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출신 일제강점기 의병전쟁 항일독립운동가
오는 14일 오전 11시 광주공원에서 개최

김준태 시인 '심사 신동욱선생 송가' 시집 출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의병전쟁을 담아 펴냄

오는 14일 오전 11시 광주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광주공원에서 광주시장, 보훈청장, 독립운동유공자, 각계 대표, 광주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心史辛東旭先生抗日事蹟碑)’ 제막식이 열린다. 

비문에는 침략자 일제 식민지배와 맞서 싸운 유학자 출신으로서 의병전쟁·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심사 신동욱(1870.2.1.∼1942.11.28.)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은 경구 ‘불기심(不欺心)’이 임형택(성균관대 명예교수) 교수의 비문과 함께 새겨졌다. (아래 신동욱 선생 연보 참조)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임형택짓고 학정쓰다). ⓒ김준태 시인 제공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임형택짓고 학정쓰다). ⓒ김준태 시인 제공
한말의병장들의 마지막 모습.
한말의병장들의 마지막 모습.

비문 글씨는 서예가 학정 이돈흥 님이 심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담아 붓으로 옮겼다.

이날 제막식에서는 김준태 시인이 짓고 노래한 ‘한말항일독립전쟁의병시집- 심사 신동욱 선생 송가'(도서출판 문학들)도 함께 출간된다.

김 시인의 시집에는 일제강점기 전남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서 태어나 유학자로서 특히 ‘남한대토벌작전’을 전후로 전라도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과 의병장 심남일, 김태원, 전해산 장군 등과 관계한 심사 신동욱 선생의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또 시집에는 심사 선생이 의병의 군량미, 군수물자 조달 등을 담당하면서 의병전쟁에 참전한 별호로 ‘재가의병장‘이라고 이름 부르는일대기를 담았다.

김준태 시인이 최근 펴낸 '한말조선독립의병전쟁시집-심사 신동욱 선생 송가' 시집 표지 그림. ⓒ김준태 시인 제공
김준태 시인이 최근 펴낸 '한말조선독립의병전쟁시집-심사 신동욱 선생 송가' 시집 표지 그림. ⓒ김준태 시인 제공

‘송가 형식을 보여주는 이 시집은 △을미사변(1865.명성왕후 민비시해) 이후 △을사보호조약(1905)→△한일합병(1910) 전후로 전라도를 거점으로 일어난 제1,2,3,4차 의병전쟁을 무대로 하면서 전개되는 일종의 노래형태의 서사시집이다.

민족말살과 문화말살마저 자행한 일제침략 식민지배 속에서 전라도 의병은 당시 조선반도 의병 숫자의 전제 60%를 차지할 때도 있었다.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횟수도 단연, 전라도 지역이 40%를 육박할 때도 있었다.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 쌀 생산량의 총 40%를 넘어선 호남평야의 논과 밭...그래서 이순신 장군도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 말하였음을 예증한다.

호남에서 쌀(군량미)과 의병은 임란의병을 거쳐 한말의병으로까지 그 맥박을 이어하며 그 속에 갑오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이 있었다.

심사 신동욱 선생의 일대기를 송가 시집으로 펴낸 김준태 시인.
심사 신동욱 선생의 일대기를 송가 시집으로 펴낸 김준태 시인.

김준태 시인은 "한말 의병전쟁 특히 3차, 4차 의병전쟁의 경우 유학자 즉 유생들이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붓과 종이 그리고 죽창과 화승총을 들어야만 했던 것은 바로 나라지킴에의 운동이요 투쟁이며 전쟁이었다"고 당시 의병전쟁을 정의했다. 

또 "바로 여기에 유학자로서 나라사랑을 행동으로 나선 전남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 태생 심사 신동욱 선생, 재가의병장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심사 신동욱 선생 연보

-김준태 시인 작성

선생은 일제강점기 유학자, 의병전쟁참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1870년 2월 1일 함평 나산면 송암리 652번지에서 일제의 명치천황 은사금을 거절하여 고초를 겪은창녕 영산 신씨(辛氏) 신성준 선생과 나주 정씨(鄭氏) 기안의 따님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우인 동화(東華) 선생과 함께 의병전쟁, 항일독립투쟁에 나섰다.

두 아들 경열(璟㤠) 홍열(洪㤠)을 두었으며 종질로 당대의 한학자 호열(鎬㤠)이 있으며 유언으로 일제가 저지른 “창씨개명을 하지 말라”를 강조하였으며 선생의 평생 좌우명은 ‘불귀심(不欺心 :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1905년 일본제국주의 강압에 의한 을사보호조약(11월17일) 대항하여 들불처럼 번져간 결사항전의 싸움 제1,2,3,4차 의병전쟁에 몸을 들여놓으며 애국애족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1908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맞서 의병전쟁에 적극 투신하면서 죽음을 불사하며 호남의 산야를 휘몰아 달리던 심남일, 김태원, 전해산, 정원집 등 의병장과 비밀연락을 취하면서 식량보급, 무기반입 등 조선의병의 군수물자 공급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8월 22일)으로 일본제국주의에게실제로 국권을 완전 뻬앗기고 민족말살, 문화말살이 가속화되자 일제의 대대적인 남한대토벌작전 이후로 약화된 의병군단의 전열에 전력을 실어주기 위해서 러시아제 신식무기 수입과 군자금 확보에 최선을 다하던 중 의병에서 이탈한 이봉래 발설로 전모가 노출돼 일본헌병의 추적이 뒤따른다.

1911년 1월3일 일본헌병이 송암리 고향을 급습하여 심사 신동욱 선생과 아우 동화 선생을 체포 장성헌병대에구금시키고 잠도 재우지 않고 3개월 이상 온갖 극악한고문을 가해 기절과 절명을 거듭했으나 자백하지 않고입을 다물어 의병전선의 비밀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1911년 부친인 학산 신성준 선생이 일본제국주의의 천황 명치의 은사금(20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룰 때 심사 선생은 아우 동화와 함께 함평군 나산면 일제헌병 분견소로 찾아가 갖은 회유에도 불구하고꾸짖으며 사생결단 음식물을 공여하며 효성을 다하며 감옥 바깥에서 석방을 외치며 옥외투쟁을 전개하다

1914년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전라북도 순창에 내려가의병기병을 꾀하던 호조참판 면암 최익현 의병장이 고종황제의 비밀칙령을 직접 받아 그의 제자이며 낙안군수인 임병찬 장군에 의해서 발기한 의병조직 ‘대한독립의군부’에 심사 신동욱 선생은 전남 함평군 대표로 책임을 맡아 임무에 착수에 들어갔으나 이때 밀정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일제에 의해 의군부의 전모가 발각돼 임병찬 의병장은 거문도로 유배 가서 병사하고 이를 계기로 의군부 의병활동이 무산된다.

1914년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당한 함평출신 심남일 의병장 집안을 음과 양으로 후사하던 심사 선생은 대한독립의군부 조직창설 무렵에 심남일 장군 아들 심상국에게 군량미로 쌀 40가마니를 조달하는 등 군자금담당 재가의병장(在家義兵將)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다

1942년 음력 팔월 추석날 명창 임방울이 나산 송암리에찾아와 “숙대머리 귀신형용.....”으로 시작되는 춘향가와조조가 10만 대군을 잃고 적벽강에서 통곡하는 ‘적벽가’를 헌가(獻歌)로 불러주어 심사 선생의 일생을 위무하다.

1942년 11월 28일 부인 정 씨와 두 아들 경열, 홍열과손자 대규 등 온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절대로 창씨개명을 하지 말라”라고 하시며 두 눈을 감았다.

1983년 심사 선생 내외는 돌아가신 후 나산면 연대산에계시다가 계해년 7월 전남 담양군 대전면 금곡리 후등산 선산으로 영구히 모셔졌는데 심사 선생은 우측에 부인인 정씨는 좌측에 안장되어 멀리 무등산을 향하고 있다.

2016년 3·1절을 기해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019년 8월 14일 오전 11시 광주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광주공원에서 광주시장, 광주지방보훈청장, 독립운동유공자, 각계 대표, 광주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심사신동욱선생항일사적비’(心史辛東旭先生抗日事蹟碑)’ 제막식을 가졌다.

비문에는 침략자 일제 식민지배와 맞서 싸운 유학자 출신으로서 의병전쟁·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심사 신동욱 선생께서 평생을 좌우명으로 삼은 경구 ‘불기심(不欺心)’이 임형택 교수의 비문 앞머리에 새겨졌다.

서예가 학정 이돈흥 님이 심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담아 붓으로 옮겼다.

이날 제막식에서 김준태 시인이 짓고 노래한 ‘한말항일독립전쟁의병시집- 심사 신동욱 선생 송가'(2019.8.12. 문학들)도 함께 출간되었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