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 출신, 을사늑약 이후 '의병전쟁' 참전
1942년 사망... 정부, 2016년 3월 '건국포장' 추서
14일 오전 광주공원 안에 '심사 항일사적비'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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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광주광역시 남구 광주공원 안에 제막된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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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광주공원에서 열린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 제막식. ⓒ예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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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신동욱 선생 후손인 신대유(92)어르신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예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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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맨 오른쪽)이 제막식에 참여하고 있다. ⓒ예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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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앞에 선 김준태 시인. 김 시인은 최근 심사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송가집'을 펴냈다. ⓒ예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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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선생의 후손인 신대유 어르신이 유족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예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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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항일사적비 앞에 선 정무창 광주광역시의원, 김준태 시인, 이용빈 더민주당 광산갑위원장(왼쪽부터)과 더민주당 광산갑 당원들. ⓒ예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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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빈 더민주당 광산갑위원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김준태 시인(왼쪽에서 세 번째)이 심사 항일사적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있다. ⓒ예제하

1870년 2월 전남 함평 출신으로 구한말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2,3,4차 의병전쟁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했던 심사 신동욱 선생의 '항일사적비'가 14일 오전 광주 남구 사동 광주공원 안에 제막됐다.

이날 제막식은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지부장 )와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기념비 건립추진위원, 심사 선생의 후손인 신대유(92) 선생 등 유가족 그리고 정종제 광주광역시 행정부시장, 임추섭 전 광주교육희망네트워크 상임대표, 박석무 전 의원, 김준태 시인, 이용빈 더민주당 광산갑지역위원장, 정무창 시의원 등 100여명이 참석하여 선생의 항일 의병운동의 뜻을 기렸다.

특히 이날 제막식에서는 김준태 시인이 최근 심사 선생의 일대기와 한말 의병전쟁을 담은 '한말조선독립전쟁 의병시집- 심사 신동욱 선생 송가'시집이 참석자들에게 배포됐다.

 

심사 신동욱 선생 연보

-김준태 시인 작성

선생은 일제강점기 유학자, 의병전쟁참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1870년 2월 1일 함평 나산면 송암리 652번지에서 일제의 명치천황 은사금을 거절하여 고초를 겪은창녕 영산 신씨(辛氏) 신성준 선생과 나주 정씨(鄭氏) 기안의 따님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아우인 동화(東華) 선생과 함께 의병전쟁, 항일독립투쟁에 나섰다.

두 아들 경열(璟㤠) 홍열(洪㤠)을 두었으며 종질로 당대의 한학자 호열(鎬㤠)이 있으며 유언으로 일제가 저지른 “창씨개명을 하지 말라”를 강조하였으며 선생의 평생 좌우명은 ‘불귀심(不欺心 :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1905년 일본제국주의 강압에 의한 을사보호조약(11월17일) 대항하여 들불처럼 번져간 결사항전의 싸움 제1,2,3,4차 의병전쟁에 몸을 들여놓으며 애국애족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1908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맞서 의병전쟁에 적극 투신하면서 죽음을 불사하며 호남의 산야를 휘몰아 달리던 심남일, 김태원, 전해산, 정원집 등 의병장과 비밀연락을 취하면서 식량보급, 무기반입 등 조선의병의 군수물자 공급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8월 22일)으로 일본제국주의에게실제로 국권을 완전 뻬앗기고 민족말살, 문화말살이 가속화되자 일제의 대대적인 남한대토벌작전 이후로 약화된 의병군단의 전열에 전력을 실어주기 위해서 러시아제 신식무기 수입과 군자금 확보에 최선을 다하던 중 의병에서 이탈한 이봉래 발설로 전모가 노출돼 일본헌병의 추적이 뒤따른다.

1911년 1월3일 일본헌병이 송암리 고향을 급습하여 심사 신동욱 선생과 아우 동화 선생을 체포 장성헌병대에구금시키고 잠도 재우지 않고 3개월 이상 온갖 극악한고문을 가해 기절과 절명을 거듭했으나 자백하지 않고입을 다물어 의병전선의 비밀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1911년 부친인 학산 신성준 선생이 일본제국주의의 천황 명치의 은사금(20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룰 때 심사 선생은 아우 동화와 함께 함평군 나산면 일제헌병 분견소로 찾아가 갖은 회유에도 불구하고꾸짖으며 사생결단 음식물을 공여하며 효성을 다하며 감옥 바깥에서 석방을 외치며 옥외투쟁을 전개하다

1914년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전라북도 순창에 내려가의병기병을 꾀하던 호조참판 면암 최익현 의병장이 고종황제의 비밀칙령을 직접 받아 그의 제자이며 낙안군수인 임병찬 장군에 의해서 발기한 의병조직 ‘대한독립의군부’에 심사 신동욱 선생은 전남 함평군 대표로 책임을 맡아 임무에 착수에 들어갔으나 이때 밀정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일제에 의해 의군부의 전모가 발각돼 임병찬 의병장은 거문도로 유배 가서 병사하고 이를 계기로 의군부 의병활동이 무산된다.

1914년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당한 함평출신 심남일 의병장 집안을 음과 양으로 후사하던 심사 선생은 대한독립의군부 조직창설 무렵에 심남일 장군 아들 심상국에게 군량미로 쌀 40가마니를 조달하는 등 군자금담당 재가의병장(在家義兵將)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다

1942년 음력 팔월 추석날 명창 임방울이 나산 송암리에찾아와 “숙대머리 귀신형용.....”으로 시작되는 춘향가와조조가 10만 대군을 잃고 적벽강에서 통곡하는 ‘적벽가’를 헌가(獻歌)로 불러주어 심사 선생의 일생을 위무하다.

1942년 11월 28일 부인 정 씨와 두 아들 경열, 홍열과손자 대규 등 온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절대로 창씨개명을 하지 말라”라고 하시며 두 눈을 감았다.

1983년 심사 선생 내외는 돌아가신 후 나산면 연대산에계시다가 계해년 7월 전남 담양군 대전면 금곡리 후등산 선산으로 영구히 모셔졌는데 심사 선생은 우측에 부인인 정씨는 좌측에 안장되어 멀리 무등산을 향하고 있다.

2016년 3·1절을 기해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019년 8월 14일 오전 11시 광주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광주공원에서 광주시장, 광주지방보훈청장, 독립운동유공자, 각계 대표, 광주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심사신동욱선생항일사적비’(心史辛東旭先生抗日事蹟碑)’ 제막식을 가졌다.

비문에는 침략자 일제 식민지배와 맞서 싸운 유학자 출신으로서 의병전쟁·항일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심사 신동욱 선생께서 평생을 좌우명으로 삼은 경구 ‘불기심(不欺心)’이 임형택 교수의 비문 앞머리에 새겨졌다.

서예가 학정 이돈흥 님이 심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담아 붓으로 옮겼다.

이날 제막식에서 김준태 시인이 짓고 노래한 ‘한말항일독립전쟁의병시집- 심사 신동욱 선생 송가'(2019.8.12. 문학들)도 함께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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