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호 노동칼럼] 5.18민중의 무장과 반미
[정찬호 노동칼럼] 5.18민중의 무장과 반미
  • 정찬호 노동활동가
  • 승인 2019.02.2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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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과 수구세력들의 5ㆍ18망언이 끊이지 않는 요즘, 그대에게 묻는다. 우리 역사에 5ㆍ18은 진정 무엇이었는가?

열에 아홉명 이상은 “전두환도당의 잔인한 총칼에 맞선 광주시민의 의로운 항쟁이고 민주주의를 염원했던 민주화운동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맞다. 5ㆍ18을 두고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규정은 5ㆍ18을 절반 정도만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지난 12일 5.18단체와 광주시민사회단체가 서울 국회 앞에서 '5.18망언 의원 제명과 자유한국당 해산'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12일 5.18단체와 광주시민사회단체가 서울 국회 앞에서 '5.18망언 의원 제명과 자유한국당 해산'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16일 광주 근남로에서 열린 '5.18왜곡 자유한국당 규탄 광주시민궐기대회'.
지난 16일 광주 근남로에서 열린 '5.18왜곡 자유한국당 규탄 광주시민궐기대회'.

 

왜 그럴까? 4ㆍ19, 6월항쟁. 박근혜 탄핵촛불은 5ㆍ18과 마찬가지로 민중들의 대중적인 운동이었고 정권을 바꾸거나 그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대사를 뒤흔들었던 이들 투쟁은 5ㆍ18과는 다르게 무기를 들지 않았다. 4ㆍ19와 6월항쟁에서 보였던 기껏해야 짱돌과 화염병 정도였다. 

5ㆍ18은 달랐다. 광주민중들이 대거 참여하여 총을 든 것이다. 민중의 무장은 여타 반정부 투쟁과는 근본이 다른 것이다.

역사적으로 민중의 무장투쟁이란 투쟁의 대상인 반민중적인 권력을 와해시키고 민중 스스로가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겠다는 의지의 함축이다.

그래서 무장봉기의 승리는 새로운 권력의 창출을, 반대로 실패는 죽음을 의미한다.

5ㆍ18 무장이 비록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하여 총을 들었을 지라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으며 우리가 살기위해 살인도당을 죽여야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일 수밖에 없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구타하고 있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구타하고 있다.

 

‘권력을 장악해 새로운 사회를 열겠다’며 조직적인 봉기에 까지는 못 갔지만 그렇다고 ‘반대한다!, 물러나라!’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이다.

일주일간의 광주민중의 무장봉기는 피의 학살로 마감되고 말았지만 한국사회는 또 다른 뇌관이 되었다.

민중의 무장투쟁을 인정 할레야 할 수 없는 전두환 도당과 보수세력은 ‘사회를 혼란시키는 사태요, 폭동’으로 규정했고 총을 든 것은 ‘북한군의 소행이다’며 우리사회 가장 불편한 북한을 끌어들이게 된다.

민중의 무장봉기로 인해 자신들의 성이 무너지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이며 향후에도 무장이란 것은 아예 생각조차 못하게 하겠다는 치밀한 공작이 아닐 수 없다.

5ㆍ18무장투쟁은 적대국과 벌인 전쟁도 아니었고 쿠데타의 소용돌이 속에 군부끼리 총부리를 겨눈 것도 아니었다. 군대가 아닌 민중들의 무장은 체제전복이나 후방의 게릴라전 그리고 극좌파의 투쟁에 주로 등장한다.

5ㆍ18은 반체제적이지도 게릴라전도 극좌파의 투쟁도 아니었다. 계엄군의 만행에 분개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대응이었으며 소수 몇 명이 아닌 민중의 군대(시민군, 기동타격대)로 등장한 것이다.

5ㆍ18무장은 향후로도 한국사회가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은 어떤 방법을 통해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차이는 해방 후 한국사회에 ‘미국은 과연 혈맹인가?’라는 의혹을 갖게 한 것은 단지 5ㆍ18뿐이었다.

1980년 5월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망월묘역 5.18광주민중항쟁 희생자 안장식에서 어린 가족이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희생자 안장식.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가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피로 물들일 때, 광주시민들은 민주주의 혈맹인 미국이 학살자에 맞서 광주시민의 손을 잡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5월 항쟁 내내 미국은 오지 않았고 광주민중들의 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미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쥐고 있기에 계엄군 공수부대의 이동은 미군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혹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미문화원 점거투쟁 등 1980년대 내내 대학가는 ‘광주학살 진짜주범 미국을 몰아내자!’는 반미투쟁이 불을 뿜었고 한국사회는 5ㆍ18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는 반미의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5ㆍ18이후 39년이 지나고 있지만 광주학살에서 미국의 역할이 밝혀진 것은 아직 아무 것도 없다. 518은 이렇듯 미국이 혈맹인가 아니면 약소국을 침범하고 그들의 구미에 맞는 괴뢰정부를 내세워 주물럭거리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해준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북으로부터 남한을 구원해준 미국이라며 하늘처럼 떠받드는 친미 수구세력들로서는 미국에 대항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5ㆍ18은 내란이나 소요사태 외에 그 무엇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5.18최후항쟁지' 옛 전남도청.
'5.18최후항쟁지' 옛 전남도청.

태극기 집회가 성조기로 뒤덮이든지 간에 5ㆍ18은 미국의 은폐된 본질을 알게 해준 기념비적인 사건이기에 충분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5ㆍ18은 민중의 자발적 무장과 반미의 도화선이란 점에서 전혀 질이 다른 특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에 대한 분석과 체계화 없는 5ㆍ18규정은 민중의 역동적인 힘을 신뢰하지 못하고 반쪽짜리에 가둬두려는 또 다른 음모일 뿐이다.

5ㆍ18망언의 뿌리는 결국 총을 든 무장봉기와 반미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망언을 뿌리 뽑기 위해서라도 5ㆍ18은 종합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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