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을 노래하며 광주를 뜨겁게 보듬다

노래를 하면 기분이 좋다. 누군가는 하는 건 싫고 듣는 걸 좋아 한다는데, 그이는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다 좋다. 왜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 좋은 걸 어떡하냐는 말 뿐. 살아온 나날을 가만가만 뒤돌아보니 노래가 곧 인생이고, 인생이 노래였다.

▲ ⓒ<광주속삭임> 제공

노래가 전부였던 삶, 노래만 주구장창하며 살아왔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암, 부족하고 말고. 거기에 보태야 할 게 있다. 다름 아닌 ‘광주’다. 그는 광주란 도시에서 나서 자랐고, 노래를 부르며 여러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세월을 새로이 맞고 있다. 누구시더라, 이름하여 광주의 가객 정용주다.

아홉시 훌쩍 넘어 오라는 말에 따라 밤 10시 가까운 시간에 훠이훠이 동구 동명로 농장다리 주변을 어느 날 훑는다. 이르지 않은 시각, 주택가는 허허롭다. 동구 동명동 서석교회에서 농장다리 쪽으로 철길 따라 난 도로가 휑하다.

최근 동명동 개발 바람으로 도로가 새로 나고 헐린 주택 대신 가장자리로 나앉은 안쪽 집들의 속살이 보기에 부끄럽다. 농장다리 바로 뽀짝 옆에 ‘산울림’이 눈에 들어 온다. 그 건물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일 때부터 노래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전을 후빈다.

▲ ⓒ<광주속삭임> 제공

기타소리도 제법 스타카토로 기운차다. 안으로 들어서니, 테이블 대 여섯 개의 넓지 않은 공간 입구 쪽 한 무더기의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노래를 흐드러지게 불러 제낀다. 사람 좋은 웃음기를 한껏 담고서 노래를 한다, 배짱이처럼. 구성진 소리와 잘도 넘어가는 목청, 리듬감이 절묘하게 합쳐져 퍽퍽하지 않게 귀를 간지럽힌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이들도 그 노래 소리에 손뼉을 치며 따라 부른다. 무대와 객석이 구분되지 않은 공연장인 셈이다. 그쪽에서 노래가 끝나니 다른 테이블에서 답가랍시고 한 곡조 뽑아 올린다. 어, 근데, 노래하는 성조가 다르다. 구음인 듯하다가 소리로 넘어간다.

춘향가 중 ‘사랑가’ 한 대목이다. “사랑사랑 내 사랑이야 어허 둥둥 내 사랑이야~~”. 소리를 제법한다. 분위기가 흥겹게 돌아간다. 이쪽에서 부르면 저쪽에서 받기를 몇 순배 계속 돈다.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이 이어지고, 다음엔 춘향가의 ‘쑥대머리’가 숭고하게 쏟아진다.

노래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 ⓒ<광주속삭임> 제공

통기타 카페 ‘산울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기분이 한껏 고조된다. 쉴새없이 “비 내리는 호남선~”의 ‘남행열차’가 바톤을 받는다. 아, 쉴새없이 이어지는 노래 중 주인장인 정용주가 부른 곡만 해서 얼렁뚱땅 50여 곡에 이른다.

중간 중간에 손님인지 주인장인지 뒤섞어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해도 주인장이 소화하는 노래는 하루에 적어도 100여 곡에 이른다. 무지막지하게 부른다. 그래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마치 노래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부르고도 목이 잠기지 않는다.

그리고 마이크 없이 라이브로 부르는 데도 진한 호소력이 있다. 뭔가 있는 것이다. 계속 듣고 싶은, 그래서 무대 없는 ‘산울림’ 카페에선 계속해서 노래가 날아다닌다. 청하고 받고 하기를 계속하기에 그렇다.

▲ ⓒ<광주속삭임> 제공

정용주도 이를 물리치지 않고 수굿이 받아들인다. 같은 노래를 반복하지 않고 100여 곡을 연달아 부르는 것도 쉽지 않을 터지만 별 부담없이 너끈히 해치운다. 계속 지켜본 이들은 혀를 내두른다. 통키타 카페를 찾는 이들은 그와 수십 년 지기들로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 어쩌다 그들 손에 이끌려 온 이 가게의 초짜들은 깜짝 놀란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변하지 않는 음색과 성량, 그리고 그 무수한 곡들의 가사는 또 어떻게 다 기억하느냐며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한 때는 무려 1,000여 곡에 달하는 가사를 무난히 소화했다. “이제는 아무래도 나이가 있어선지 절반이 떨려져 나가고 500여 곡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며 좋은 시절 다 가버렸다고 투덜댄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리고 잊지 않고 빼놓지 않고 부르는 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오월이니 불러야 한다.

▲ ⓒ<광주속삭임> 제공

가객 정용주는 광주의 민중가수이기도 하다. 1년 중 5월에 가장 많은 무대에 선다. 그 중 5·18 추모 무대가 단연 많다. 5월 관련 음악회와 공연엔 수십 년 전부터 참여하며 ‘광주’를 노래하고 ‘오월’을 소리쳐 왔다. 그가 광주를 떠나지 않고 광주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랑스러운 광주정신을 노래로 많은 이들과 함께 하며 길이길이 남기는 정용주의 삶은 노래하면서도 뜨겁다. 겉으로 얼핏 보기엔 날마다 기타 튕기며 노래하며 사는 배짱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 광주를 뜨겁게 보듬어 내는 열정이 있고, 광주의 오월을 만방에 알리려는 강한 에너지가 깃들어 있다. 살아 있는 광주 사람인 것이다.

산울림_넉넉한 가슴으로 마음으로

라이브 카페 ‘산울림’은 단순히 노래 부르고 노는 공간만이 아니다. 예술을 사랑하고 문화를 숭상하는 예술인, 문화인들이 떼거리로 몰려드는 문화 살롱이기도 하다. 거기선 토론이 날밤 새워 이뤄지기도 하고, 이슈 파이팅이 피 튀기며 벌어지곤 한다.

떠들썩한 음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잔하게 이어지는 토론문화가 펼쳐지는 문화공간인 셈이다. 억센 세파에도 부서지지 않는 강인한 자에서 늘 고꾸라지며 울음을 토해내는 유약한 이들까지 모두 넉넉한 가슴으로 마음으로 받아주는 곳이 ‘산울림’이다. 유독 산을 좋아 한다는 정용주가 라이브 카페 이름을 ‘산울림’이라 하는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모두를 넉넉히 품어 주는 큰 산, 그리고 그 산에서 토해 내는 깊은 울림이 하릴없이 퍼진다.

▲ ⓒ<광주속삭임> 제공

노래를 한다하는 이들이 서울로 떠날 때 듬직하게 광주를 지켜내고 있는 정용주, 그는 통기타 가수가 직접 통기타 카페를 최초로 연 장본인이다. 1980년대 후반 충장로에 소리마당을 연 이후 장소와 이름을 바꿔가며 산수동 농장다리 ‘산울림’에 이르기까지 13번의 변주곡이 있었다.

그리고 ‘산울림’을 문화복합공간이자 살아 있는 토론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용주가 광주에 남아 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광주 사람으로 뜨거운 피를 노래로 불렀고, 노래로 못다한 이야기는 토론으로 내지르는 공간을 지켜온 ‘산울림’의 주인장. 그에게선 광주 냄새가, 광주 오월 냄새가 펄펄 난다.

/글: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팀장


** 윗 글은 광주광역시가 발행하는 잡지 <광주속삭임> 2016년 여름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 <광주속삭임> 바로가기 http://news.gwangju.go.kr/bbs_list.php?tb=board_whisper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