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장현 홍인화 이천영 공통점은?

따뜻한 마음이 따뜻한 사회를 만든다고 했다. 그 사례가 있어 되짚어 보고자 한다.

▲ 김중태

재작년 5월 하순이었다. 광주시의회 예결위회의실에서 광주시 거주 고려인 지원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광주시의회 홍인화 당시 행정자치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는 김영술 전남대 교수의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광주지역 이주와 문화변용`이란 발제에 이어 이천영 새날학교 교장, 신조야 고려인센터소장 등이 지정 토론자로 나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뒤 광주까지 오게된 여정만큼이나 이날 토론회는 진지했다.

나는 솔직히 이날 토론회가 있기 전까지 광주에 고려인들이 이주해와 살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더군다나 광산구 월곡동에 3000여 명이나 되는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이날 토론회는 광주시 차원에서 고려인을 돕기 위해 조례를 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권문제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던 홍인화 시의원이 적극적이었다. 이천영 새날학교 교장, 박정열 고려인돕기운동본부 국장, 신조야 광주고려인센터소장 등도 고려인들의 정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내가 고려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분들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다. 이천영 목사, 신조야 소장은 지금도 자신들의 삶은 제처두고 오직 고려인들의 주거 정착에 몸을 바치고 있다. 나 살기도 힘든 세상에 남의 삶까지 책임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천영 목사의 경우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학업대신 공단에 들어가 일을 했던 `소년공`이었다.

그는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사범대학을 마친 후 영어교사가 됐고, 우연한 기회에 외국인 근로자를 만나 이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한다. 그는 “제가 어릴적 겪었던 고통을 겪으면서 한국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들을 품기로 작정하고 이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과거의 행적을 보라고 했다. 홍인화 시의원이나 이천영 목사 등은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동반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협의회가 고려인협동조합과 업무협약을 맺은 것도 이들 때문이었다.

광주에서는 오는 7월3일부터 14일까지 충청 이남 지역에서는 최초로 170여개국 2만여 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광주하계U대회가 열리게 된다.

이 대회에 고려인들도 함께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보자는 뜻이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들이 중앙러시아를 비롯 우즈베키스탄 등 러시아권 선수들의 서포터즈 겸 통역자로 나설 경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믿은 것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민선 6기 광주광역시를 이끌고 있는 윤장현 시장도 내게는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1980년 5월 큰 아들이 군부독재의 총탄에 쓰러져간 뒤 홧병으로 병마와 싸우다 2년 뒤 남편이 돌아가시자 혼자가 됐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혼자 살았던 어머니는 30여년 전 보리밭에서 귀리(잡초)를 뽑다가 보리까시에 그만 눈이 찔려 한 눈을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됐다.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였던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어머니를 광주로 모셔왔고, 운동권 선배의 소개로 중앙안과를 찾았다.

그런데 당시 그 병원 원장이었던 윤 시장은 “농촌에서 일하신 어머니가 돈이 있겠느냐”며 치료비를 받지도 않았고, 거의 한달 정도 지극 정성으로 치료 해주었다.

민선 6기들어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지만 광주시정이 잘 될 것으로 믿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따뜻한 마음이 따뜻한 사회를 만든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휘황찬란한 구호로 시민들을 현혹하기 보다 좀 늦더라도 더불어 함께 가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민주 인권 평화의 광주 정체성과도 어울린다고 본다. 조금 기다리다보면 시민만 보고가는 윤 시장의 진정성이 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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