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새해의 청마(靑馬)가 여민 옷깃도 파고드는 매서운 삭풍의 들판에 섰습니다. 새해마다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갑오년 새해에 어울릴만한 ‘희망’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도 마음은 새해에는 달라져야 할 것들과 달라지고 싶은 것들을 추스르며 산으로 바다로 첫날의 해돋이를 찾아 나서고 싶습니다.

당동벌이(黨同伐異)의 배척과 불통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한해였습니다. 국정은 반으로 나뉘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치를 거듭해 왔고, 사회구성원들 또한 이념과 진영으로 갈라서서 지식과 양심이 지녀야 할 공공성이 제자리를 잃었습니다. 경제는 특정기업과 특정분야의 산업에 편중되어 서민경제는 좀처럼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광주의 정치, 경제적 시계(視界)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회의 다방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과거회귀가 시도되고 있음에도 민주당은 자가당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새정치의 깃발을 올린 안철수 신당 역시 민주당을 ‘낡은 체제와 세력’이라 비판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비전과 희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한 보릿고개의 시절에도 새해는 설빔을 차려입었고, 독재치하의 칠흑 같은 세월에도 우리는 희망을 찾아 마지막 밤을 5.18민주광장에서 보내고 무등산에 올랐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이 경제, 사회적 민주화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책임을 정치인들에게만 온전하게 묻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개운치 않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송년의 밤을 5.18민주광장에서 함께 보내고 새해를 무등산에서 맞이했던 것은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향한 너나들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시대정신이었고, 지금 우리가 다시금 가슴에서 한번 쯤 꺼내서 확인해봐야 할 ‘광주정신’이었습니다.

‘광주정신’이 곧 ‘시대정신’이었던 시절이 과거가 아니라 다시 현실이 되어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 경제적 공동체의 가치와 실천을 담고 있는 ‘광주정신’이야말로 갑오년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가 가다듬어야 할 마음가짐의 정수(精髓)여야 합니다.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목숨 걸고 투쟁했던 그 절치부심의 ‘광주정신’이 이제는 ‘시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과 희망’을 위해 갑오년 한해를 내달릴 청마의 등 위에 앉아야 합니다.

2012년 대통령선거의 후폭풍을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맞는 새해에도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역의 살림을 책임질 광역시장과 도지사, 교육행정을 책임질 교육감, 기초자치단체의 시장과 군수, 광역지방의원과 기초지방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입니다.

세계의 경제석학들이나 미래학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국가의 경쟁력은 이제 도시와 지방의 경쟁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지방화시대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사회는 그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균형발전 역시 뒷걸음질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심화, 중앙정부와 국가권력의 강화 등이 박근혜 정부 들어 오히려 힘을 더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는 6월 4일에 실시되는 전국동시지방선거는 더욱 중요합니다. 이미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국가주도형 경쟁력은 지속가능성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라도 지방, 혹은 도시의 경쟁력과 지속가능한 발전의 동력을 개발하고 지역단위의 삶의 공동체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들의 능력과 자질을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건강한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의 정치적 변화는 새로운 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열린우리당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화려한 수사와 당위성만 가지고 새정치와 지역의 정치적 희망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 중심에 건강한 시민사회가 있어야 합니다. ‘광주정신’을 다시 시대정신으로 세우기 위해 시민사회가 주어진 역할을 우회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난 12월 26일 안철수 의원이 중심이 된 ‘새정치 추진위원회’가 광주에서 설명회를 가졌습니다. 대립과 갈등, 반목만이 되풀이되고 있는 중앙정치에서 아무런 역할을 자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을 기대했습니다.

철도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장을 찾지 않은 채 국민의 삶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소리도 미덥지 못하였습니다. 이날 안철수 의원은 신당 설명회를 위해 광주를 찾았지만 국립5.18민주묘지는 다녀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기존의 정치인들과 차별화될 것이란 어설픈 감성으로는 광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새정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단 인선을 발표하면서 안철수 의원은 “콘크리트는 시멘트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래와 자갈과 물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콘크리트의 경직성도 문제지만 그 경직성이라도 채울 수 있는 시멘트 외에 자갈과 모래 말고 이것들을 화학적으로 결합하는데 가장 중요한 물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광주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이 두 번의 집권에 실패한 것과 지역주의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을 “구체제, 구사고, 구행태의 산물”로 규정하면서 신당창당은 야권분열이라고 비판한 민주당을 정면으로 맞받았습니다. 아울러 “호남에서의 낡은 체제 청산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고도 했습니다.

호남에서의 낡은 체제가 청산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민주당의 무능 못지않게 이른바 지식사회가 과거로 회귀하려는 온갖 책동에 입을 다물고 있거나 팔짱을 끼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아픈 반성이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 안철수 의원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새누리당을 향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비판으로부터 호남의 정치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정치적 민주화의 동력이 광주를 비롯한 호남이었다고 말하기 이전에 목숨 걸고 쟁취해 오늘에 이른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진정성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과 과거를 제대로 드러낼 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청산되어야 할 ‘낡은 체제’의 틈새에 편승하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는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그 요구를 안철수 의원과 새정치추진위원회에 기대하고 있다는 것은 자가당착입니다. 정치적 수사의 범주를 넘어서려면 정말 거역할 수 없는 호남의 시대적 명제를 찾아야 하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기해야 하고 인물과 함께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광주를 비롯한 호남은 더 이상 새로운 정치의 실험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시민사회가 ‘광주정신’을 제대로 세워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갑오년 새해에는 웃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숨으로 점철되지 않는 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정치일정 외에도 광주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아야 하고, 세계대학생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겉치레만 화려한 알맹이 없는 행사로 전락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지속가능한 동력을 찾는 것 또한 정치인들에게만 맡길 숙제는 아닙니다. 나아가 광주공동체 구현을 위한 교육과 문화에도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제 광주는 정치일정과 그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광주가 아니라 수십 년의 민주화 투쟁 끝에 오늘의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자임해 왔던 광주의 역사와 정통성, 광주정신과 광주공동체를 복원하는데 다소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갑오년 새해가 그 원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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