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오래된 지병으로 수년간을 누워계시다 따뜻한 봄날에 돌아가셨다. 육남매 모두 출가하였고 막둥이인 나까지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으니 주변에선 호상이라 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나에게는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랜 지병으로 지친 탓이기도 했다. 장례를 치르고 49제가 지나도록 나는 아버지의 그늘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살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나는 새록새록 아버지의 그늘을 느끼게 되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이 그리워졌고, 세상살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버지의 묘소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장례를 치루는 동안 한 번도 눈물 흘리지 않았던 나는, 몇 년이 지나서야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때로는 그리움으로, 때로는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으로 아버지를 불러본다. 언제부터 인지 아버지는 가슴한곳에 그렇게 다가와 계신다..

나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1986년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당시의 많은 학생들과 같이 세상살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건대항쟁이 일어나고, 규탄집회를 하던 중 전경들은 전남대 캠퍼스 전체를 장악한 채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쫒는 작태를 벌였다. 지근거리에서 만류하는 지도교수 앞에서 나는 보도블럭을 내리쳐 짱돌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대학생활 온전히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살았다. 박종철, 4.3호헌조치, 6.10항쟁, 대통령직선제, 통일축전, 또다시 공안탄압과 분신정국, 셀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돌이켜 보면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이 모진세월 동안 나에게 이정표가 되어준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김남주시인, 문익환목사,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남주 시인과 문익환목사는 공교롭게도 1994년에 세상을 달리하셨다. 내게는 너무도 큰 그늘이셨던 두 분의 영면 이후 내 삶의 이정표를 찾기에 참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했다. 2009년 또다시 두분을 영면하게 되었다.

올바른 역사관과 철학을 가진, 실천하는 지도자의 길을 가셨던 두 분의 자리는 이제 누가 메꾼단 말인가?
시대는 다시 엄혹해 지고 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한층 성숙해지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또다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있다. 민중의 지팡이로 돌아갔던 경찰들이 정권의 개노릇을 자처하고 나서는 세상이다. 국군기무사는 언제부터인가 다시 민간인을 사찰하기 시작했다. 썩은 정치 독재정권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형국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해하며 살아오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영면하며, 썩은 정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친일파를 단죄한 역사가 없고, 군사쿠데타의 장본인이 살아있는 나라, 썩은 정치의 독버섯은 여기에서부터 피어나는 것은 아닐까?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