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겪은 북 특사조문단 청와대 예방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21일 방남한 북측 ‘특사 조의방문단’이 22일 오후 2시로 예정됐던 귀환 시간을 넘겨 하루 더 체류키로 했으며, 내일(23일) 오전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국 조문단 접견시 북측 특사조문단도 접견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같은 북측 특사조문단 체류일정 연장과 대통령 예방이 공식 확인된 22일 밤까지 북측 조문단의 일정은 오리무중이었고, 이명박 대통령 예방 여부도 막판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북 조문단 체류 일정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단장으로 하는 북측 조문단은 21일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해 국회에 차려진 빈소에 조문하고 김대중평화센터를 찾아 이휘호 여사를 위로하는 등 첫날 일정을 차질 없이 수행했지만, 이틀째인 22일 일정은 안개속을 걸었다.

22일 오전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북측 조문단 일원인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장과 남북 고위급 면담을 가졌다. 현 정부 들어 첫 고위급 남북회동이 성사된 것이다.

김양건 부장은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번 정권 들어 첫 당국간 고위급 대화임을 생각해서 허심탄화하게 얘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극적 대화의지를 표명했고, 1시간 20분여의 면담이 끝난 뒤 현 장관은 “남북관계 현안에 대해서 여러가지 많은 얘기를 했다”고 전했지만 조문단 일정에 대해 “시간이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소식통들은 현 장관과의 면담에서 김 부장은 남북관계 개선에 관한 북측의 적극적 입장을 밝히고 이명박 대통령 예방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기남 비서에게 남북관계 개선과 관련한 구두 메시지를 주고 이 대통령 예방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현 장관은 김 부장과의 면담 뒤 곧바로 청와대로 가서 이명박 대통령과 오찬을 겸한 회의를 갖고 대책을 숙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김양건 부장과의 면담 내용이나 조문단의 청와대 예방 여부 등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잠시 뒤 청와대 소식통은 “오늘 중 북한 조문단의 청와대 예방은 없을 것”이라고 확인했으며, <YTN>은 “당초 오늘 오후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던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 등 북측 조문단이 체류를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통일부 관계자는 “출발 시간이 늦어지고 있지만, 현재 체류일정 연장이 결정되거나 확인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통상 북측의 체류일정 연장 같은 중요한 문제는 본국 훈령을 받아야 하는데, 북측의 최종 결정이 늦게서야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후 통일부 관계자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북측 조문단과 숙소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오후 7시부터 만찬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만찬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사실상 조문단 일정이 하루 더 연장된 것이 확인된 셈이다.

결국 만찬이 한창 진행 중인 오후 8시 18분경에야 통일부 관계자는 “북측 조문단 체류 일정이 하루 연장됐다”고 확인했고,오후 9시 44분경에야 북측 조문단이 내일 오전 청와대를 예방할 예정임이 공식 확인됐다.

청와대, 북 조문단 예방 미룬 이유는?

당초 북측 조문단이 22일 오후 귀환할 예정임을 잘 알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오늘 그들을 접견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데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북측의 적극적인 남북관계 개선 의지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아직 북측이 ‘비핵화’ 문제에서 진전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고, 남북간 불신 역시 뿌리 깊이 남아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북측은 최근까지도 이명박 대통령 실명을 거론하며 격렬한 비판을 지속하고 있다.

현 장관이 청와대로 들어가 김양건 부장과의 면담 내용을 설명하고 청와대 예방 제안을 전하자 외교안보 참모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는 후문도 있다.

북측 의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거나 국내정치의 역학구도상 보수층의 입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들도 있었다는 것. 북측 제안을 덥썩 받아들였을 때 보수층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논리이다.

특히 6.15공동선언이나 10.4선언 이행에 대한 이 대통령의 명백한 입장 표명이나 북측이 제기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획기적 조치 등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기남 비서가 김정일 위원장의 서면 친서를 휴대하지 않아 ‘특사’ 자격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형식 논리도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전날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친서를 가져왔거나 따로 전할 메시지가 있으면 몰라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김 비서가 김 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소식통들은 김 비서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자는 김 위원장의 뜻을 구두 메시지 형식으로 전달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대통령이 북 조문단을 접견하지 않은 이유는 ‘감정싸움’이나 ‘기싸움’ 탓이라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정부 소식통의 “우리 대표단이 가도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발언이나 청와대 핵심관계자의 “우리가 먼저 만나자고 할 필요는 없다. 열린 자세로 당당하고 의연하게 하겠다”는 발언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번 북측 특사조문단이 남측 정부를 제쳐놓고 김대중평화센터를 통해 조문을 추진한 점도 정부에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따라서 정부도 북 조문단이 김 전 대통령측 손님인 만큼 다른 나라 조문단과 동등하게 대하겠다는 자세다.

얼마전 방북한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이 일정을 닷새씩이나 연장해가며 어렵게 김 위원장을 접견한 ‘사례’도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측에게도 대통령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본때를 보여주려 한다는 것.

청와대 핵심관계자의 “외국에서 누가 온다고 대통령이 다 만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외국에서 오는 손님하고 같이 생각하면 된다”는 발언도 이같은 맥락을 담고 있다.

‘특사’를 ‘특사답게’ 맞아야

아직 북 조문단의 정확한 추후 일정이나 대통령이 22일 접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 등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의 장례일인 내일(23일) 주요국 조문단 접견 일환으로 북측 특사조문단을 맞을 것만은 확실하다.

북측 고위급 ‘특사 조의방문단’을 대통령이 만나지 않을 경우 도의에도 맞지 않고 모처럼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녹일 기회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북측 특사조문단 만을 특별 대우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자세도 함께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당초 장례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10시 30분에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외국 조문단을 접견키로 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변경해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들을 접견키로 했다.

북측이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명백히 보이고 있는 만큼 우리 정부도 ‘상호주의’에 입각한 소모적인 ‘기싸움’을 벌이거나 ‘버릇을 고치겠다’는 식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특히 두 여기자 석방 이후 북미관계가 협상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 정부도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 주목해야 한다.

공은 청와대로 넘어간 형국이다. 여러 나라와 동등하게 대하는 ‘국제적 기준’도 필요하지만 북측 ‘특사’를 ‘특사답게’ 맞이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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