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87년 6월항쟁, 그리고…
내 삶을 바꿔놓은 87년 6월항쟁에는 그가 있었습니다


우선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빕니다. 23일 아침 인터넷과 뉴스를 통해 접한 소식은 너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루를 보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게 만들었고, 그 가운데 그와 겹쳐지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가장 안타깝게 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처럼 민족의 지도자로 자리잡지는 않았지만 이런 정치인 몇 명만 있으면 좋겠다 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적, 사상적 견해는 다릅니다.

20여 년 전 그는 인권변호사였습니다. 지역에서 벌어졌던 한 조직사건(81년 부림사건)을 통해 그는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지요. 대우조선, 울산 현대그룹 노동문제에서 노동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힘없는 자의 편에서 권력과 자본에 대항했었지요! 그리고 87년 6월항쟁의 한가운데서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부산에는 부민협(부산민주시민협회)가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가 87년 6월항쟁을 이끌었습니다.

6월항쟁은 내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고, 인생의 바꿔놓은 일이었습니다. 87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산에서 가장 흔했던 신발공장 가운데 꽤 유명한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또는 주위에서 비하하여 불렀던 '공돌이'로 말입니다.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공장에서의 생활은 사회에 대해 상상하던 일은 전혀 무너졌습니다. 직장이라기 보다는 착취와 억압이 일상에서 재도화된 곳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있으나마나 했고, 누런 월급봉투에서 노동조합비만 떼가는 곳이었습니다. 욕설과 폭력은 만성적이었지요!

거의 매일이다시피 연장근무에 잔업이 있었고, 1주일에 몇 번씩 철야가 이어졌고, 일요일은 특근(특별근무)으로 떼워야 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월급이 30만원이 되지 못했고, 야간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들은 이렇게 일하고 14만원 정도(최저임금)가 월급이었습니다.

당시 공장을 지탱하던 대다수는 이렇게 주간에는 공장에서, 야간에는 학교를 다니던 여고생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야간여상, 야간학교들이 부산 뿐만 아니라 공단이 있는 곳이라면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청소년까지 산업역군으로 둔갑시키는 기이한 산업구조였습니다. 뒤에 사회를 알아가면서 이런 구조를 납득할 수 있었지만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공장을 다니면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대입 학력고사에서 왠만한 학교를 갈 수는 있었지만 가고싶은 학과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학교는 내가 원하는 학과를 지원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과 다투기도 했지만 끝내 선생님 의도대로 지원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대학에 지원하고도 대학갈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학교의 문제는 89년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출범으로 우리나라 학교문제의 모든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왜 시험에 나오는 것만 공부해야 하는지, 왜 선생님의 의견에 다른 질문을 하면 안 되는지, 또 왜 우등생과 다른 아이들이 차별받고 있는지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내 인생을 바꿔놓은 또 하나의 축이 '전교조'의 출범이었습니다.

2개월 가량의 짧았던 공장생활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았고, 학교에선 범생이로 통했지만 선생님이 존경스럽지 않았던 참으로 답답했던 나를 떨치기 위해 대학에 갈 준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2달 간 벌어놓았던 것으로 입시학원 종합반에 등록했습니다. 이 학원 등록비가 1달에 7만원(단과반이 1달 2만원)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학원을 한달여 다니던 가운데 6월항쟁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어떻게나 세뇌당했던지 데모하는 놈들은 다 잡아서 족쳐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6월항쟁의 양상은 이런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최대 40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서면 로터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시민들은 부산시청과 남포동으로 진격해나갔습니다. 이것이 매일 이루어진 일과였습니다. 아침이면 서면으로 나가서 거의 새벽이 되어서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지요! 처음 랩과 치약을 이용해 최루탄에 대비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고등학생부터 회사원, 아줌마 거기에 멀리 보이던 선생님들까지 너무 다양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데모와는 너무나 달랐고,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는지 제대로 잉해할 수 없었습니다. 학원도 가지 못하니 할 일도 공부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가 무슨 뜻인지도 한참 지나서 알았습니다. 그런 6월항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듣게 되었습니다. 직접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6월항쟁을 통해 여러 차례 스쳐 지나갔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시 불과 40대 초반의 싱싱했고 건강한 목소리였습니다. 이렇게 만났고 그리고 대입준비를 하느라 곧 잊고맙니다.

그러다 그는 다시 내 삶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가 정치의 길로 또 다른 삶을 택한 것입니다. 88년 총선에서 국회의원(부산 동구)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87년 6월항쟁을 통해 시민들의 대변자임을 각인시킨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국민의 대변자인 국회의원이 되었고 '5공 청문회'에서 학살자를 심판하는 그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또한 90년대 초반 말도 안되는 삼당야합의 과정에서도 그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김영삼이 권력이 눈이 멀어 야당의 명예를 헌신짝 벗어던지듯 할 때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를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주었지만 갈라섰지요!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서울 종로에서, 부산 강서에서 국회의원으로 나섰다가 패하기도 했고, 부산시장으로 나서서도 안타깝게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비록 한 번 더 나섰던 종로 재보선에서 당선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의 도전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짠했습니다. 가는 길은 다르지만 속으로 응원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대선 후보로서의 과정보다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올라서는 과정은 또 한 편의 서정시였습니다. 장인과 아내의 문제에 대해 정면돌파를 택했습니다. 정치생명을 걸고….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고 그의 진정이었고 그의 삶이었다고 봅니다. 그만이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외로웠을 것입니다.

사상초유의 국회에서 탄핵을 당했던 일도 오히려 그가 국민들의 가슴에 어떻게 기억되는지 알게 했습니다. 한국 정치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려 했지만 국민들은 그런 정치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촛불을 들고 서울시내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늘 정치권에서 버림받았고 국민들이 그를 내세워주었습니다. 권위는 스스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숱한 몸부림을 쳤고 그 벽에도 곳곳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권력화된 언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통령도 처음이었습니다. 미국에게도, 일본에게도 비굴하지 않은 대통령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역대 대통령이, 다른 정치인들이 줄 수 없는 것을 주었지요! 정치권이 그를 죽이려는 시도는 국민들이 시민들이 막아주었습니다.

그 현장은 23일 밤 다시 서울시내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누가 국가가 나서지 않은 장례에 이렇게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려 했지만 돌아보면 가장 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사람을 가졌습니다. 그가 이런 지치고 고통스러웠던 삶을 가졌을 지라도 언론과 정치권(한나라당, 민주당)이 그를 죽이려 했지만 국민들이 그를 살렸고 지금도 역시 그를 되살리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어떻게 할 것인지 두고 볼 것입니다.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되살려서 함께 할 것입니다. 정치인으로서 실패했을지라도 그의 존재는 국민들의 가슴에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정치인으로서도 그를 되살려낼 것입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반드시 책임을 지울 것입니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그는 노무현입니다.
국민들이 노무현이 되고 노무현은 국민들과 함께 할 겁니다.
다시 그는 살아 다하지 못했던 정치혁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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