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에서 대통령, 그리고 검찰수사에서 투신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삶


노 전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 경남 김해에서 노판석씨와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큰 형 영현씨와 둘째 형 건평씨, 누나 명자씨, 여동생 여옥씨가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진영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 23일 오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노 전 대통령은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씨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뒤 두 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노 전 대통령은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7개월만에 그만 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여명을 기소한 이른바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았고, 이 때부터 그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1987년 시위 도중 대우조선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에 연루됐다가 제3자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1988년에는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 다음해 열린 5공청문회에서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 전 대통령에게 의원명패를 집어 던져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부산에서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확률이 희박했지만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지역에 출마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얻었다.

김대중 정권 출범 후 노 전 대통령은 200~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02년에는 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대통령 재임 5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2월 판사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것과 관련해 검찰의 반발이 높아지자 평검사와의 대화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과의 불신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이어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 경제 파탄, 측근비리 등의 이유로 2004년 3월 12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바 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 14일까지 노 전 대통령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기도 했다.

재임기간 중에는 안희정씨와 최도술씨 등 386세대로 불려진 측근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수감됐다. 청와대에서 집사로 불렸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역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도 비리연루 의혹에 휘말려 검찰에 소환됐다.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 인수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세종캐피탈 대표로부터 청탁 명목으로 29억 6300만원을 받아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도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 대통령 가족이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후 조만간 검찰의 재소환을 앞두고 23일 오전 6시50분께 경남 김해 봉하마을 자택 뒷산 언덕에서 투신, 뇌출혈상태에서 병원에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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