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권력은 '남용'의 소지를 안고 있다. 끊임없이 밖에서 감시하고, 안에서 스스로 절제해야하는 이유다. 인류의 역사는 여러 형태의 권력으로부터 인권을 지키려는 지난한 싸움의 연속이다. 민주노총 역시 약자인 노동자들의 권익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그런 민주노총이 언제부턴가 이 사회의 막강한 권력으로 부상했다. 안타깝게도 그 권력의 남용 또한 이따금 드러난다. 민주노총의 '민주'라는 말이 겉돌기 시작한 지 오래다.

민주노총 중앙의 핵심 간부가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다. 한 시민의 분노 그대로 전태일 열사로부터 이어온 이 땅의 노동운동 역사에 최악의 범죄다.

▲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미디어오늘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 사퇴했다. 이는 결국 "조직과 상관없는 개인의 문제"라는 민주노총의 초기 태도와는 달리 조직의 문제임을 자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이 물러나면서 발표한 기자 회견문에는 여전히 권력의 오만과 구구한 변명들이 가득하다.

이 위원장의 사퇴 기자회견문은 피해자 A씨를 향한 3차 가해다. 그는 A씨와 그의 대리인들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결국 A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 위원장은 회견문 앞머리에서는 "우리는 누구보다도 모든 폭력을 반대하고 인권을 존중해야 할 간부가 이러한 반사회적인 성폭력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으며, 피해자의 참담한 인권유린의 고통 앞에 죄인 된 심정으로 사죄를 드린다"고 했다.

사퇴 기자회견문 속 구구한 변명들

그러나 글의 대부분은 구구한 변명으로 채워져 있다. 위증을 강요했다는 피해자 대리인의 비난에 대해서는 "수배중이던 이석행 위원장을 도와준 A씨가 범인도피로 수사를 받게 된 상황에서 가능한 A씨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였던 것이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온 가운데 최종적인 결정은 당사자가 하도록 협의를 했다"고 한다.

그토록 살뜰한 배려를 받은 A씨가 무엇 때문에 인권단체 관계자를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을까? A씨를 대리한 김종웅 변호사와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임태훈 여성의 전화 전 정책위원등이 지난 5일 발표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 대한 피해자와 대리인의 입장'에 따르면 민주노총은 사무총장 이용식 등 고위 간부들과 민주노총 지도위원등 민주노총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파견하여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 피해자와 피해자의 대리인에게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다. A씨가 속해있는 전교조 위원장과 간부들도 마찬가지로 압박을 해왔다. 성폭력 사건에서 흔히 발생하는 전형적인 2차 가해가 조직적으로 자행됐다는 주장이다.

또한 인권단체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욕설, 폭행 위협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이 위원장은 이를 정면에서 반박하고 부정한다. 그렇다면 A씨와 그 대리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조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수배중인 위원장을 숨겨주었던 열성적인 조합원이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는가. 인권운동을 하는 그의 대리인들이 한목소리로 거짓말을 지어낼 까닭은 또 무엇인가. 이 위원장의 회견문은 A씨를 한 번 더 울리는 옹색한 변명이요, 3차 가해다.

취재원 공개요구 대목은 사과 아닌 경고 수준

이 위원장의 회견문은 또한 "우리는 현재 민주노총 전체가 2차 가해자로 규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은 취재원을 밝혀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더 이상 민주노총의 권위와 명예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엄중히 말씀드립니다"라는 대목에서는 이것이 사과문인지 경고문인지를 헛갈리게 할 정도다. 도대체 민주노총에 더 훼손될 만한 권위와 명예라도 남아 있다는 말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받아야 하는 언론의 취재원을 공개하라는 권력자의 오만이다. 내부비리 고발은 권력의 부패를 막는 민주사회의 여러 장치들 중 하나임을 이 위원장은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에 권한다. 차제에 국민의 눈에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지를 한 번 돌아보라. 노동자들과 유리된 그들만의 노동운동,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기적 귀족노조, 국민파·중앙파·현장파 등 계파갈등, 노조 간부의 파렴치한 취업 장사, 야만적 폭력이 난무했던 대의원 대회….
죽어야 산다.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노총으로 거듭나야 한다. 구구하게 변명하지 마라. 그럴 시간이 있으면 민주적 소통구조를 재점검하고, 도덕정신을 재무장하고, 노동운동의 가치를 새롭게 확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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