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제4장≫

   
① 道沖 而用之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②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전문 번역]
도는 텅 비었어도, 아마 차있지 않는 (텅 빈 그)것이 쓰이는 듯하다.
(그래서 이 우주만물이 生滅하는 것 같다.)
깊기도 깊어 만물의 근본(기원)인 것 같구나.
(그 모양을 그려보자면) 그 날카로운 것(곁가지)을 꺾어 (본 모양을) 보려 하면 (마치) 그 빛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 같고 (반대로) 그 (서로 어우러져) 얼크러진 듯한 것을 풀어 (자세히 보려) 해쳐보면 (마치) 그것은 먼지와도 같(이 아무것도 없)다.
맑기도 맑아 혹 있는 것도 같은데
나는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겠구나. (오직) ‘象帝(높은 신)보다 먼저다’는 것밖에.

[나의 책과는 ①을 좀 고쳤으며 기존과는 ①,②번의 역해 및 전반적으로 다르다]

노자 도덕경이 하나의 논문이라고 한다면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제3장까지 이야기한 것이 노자가 앞으로 이야기할 도,처세,정치의 도입부라면 이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도와 천지만물(정치와 처세)을 이야기하는 전개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결론이 제80장이고 제81장은 후기 정도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어울려 보이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 본론의 첫 테잎이 道다. 당연히 본질(도)을 논할 거라는 건 상상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만물의 어머니(만물지모)인 이상 어미의 특성을 논할 거라는 건 쉽게 상상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어미의 제1의 특징이 무엇인가? ‘텅 비었다’는 것이다. 불가의 空과 흡사하지 안는가? 깨달음은 분명 어딘지 모르지만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

《說(설)》
道冲 而用之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도충 이용지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도는 텅 비어 있지만 아마도 차있지 않는 (텅 빈 그)것이 쓰이는 듯하다.
(그래서 이 우주만물이 生滅하는 것 같다.)
깊기도 깊어 만물의 근본(기원)인 것 같구나.

이 문장은 지금까지도 역해에 많은 이견들이 있는 곳이다. 기존과 이경숙씨가 다름으로 각기 따로 비교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부분은 ‘道冲而用之或不盈(도충이용지혹불영)’이다.

도는 텅 비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도올)
도는 텅 비었으되 아무리 써도 항상 차는 일이 없으니,(박일봉님,P23)
도는 텅 비었지만 이를 활용해도 항상 차지 않으며(노태준님,P38)

(해설) 도의 본체는 虛요 無다. 그러므로 도를 굳이 비유해서 표현한다면, 마치 텅 빈 큰 그릇과 같아서, 아무리 써도 채워지는 일이 없다.(박일봉님,P24)

기존의 문장은 ‘도라는 것이 비어있지만 아무리 써도 차지 않는다.’는 식이다. 번역면에서 보면, 이 문장은 지금의 문법책이 설명하는 범위 안에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문장이다. 바로 之(지) 때문이다.(※번역 참조, 설명은 후일을 기약하자.) 해석면에서는 ‘쓰는 주체’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져 있지 않다.

뉘앙스로는 도라고 생각이 되나 어느 책도 표현되어져 있지는 않다. 형이상학이고 번역이 어렵다보니 이런 내용이 되었나 싶다. 그러다보니 ‘텅 비어있는 것을 아무리 써도 차지 않는다’고 번역하여 뜻이 동 떨어져 버렸다.(※‘차있지 않는 것이 쓰인다’가 ‘아무리 써도 차지 않는다’가 되어 버렸다.)

‘이’의 경우는 처음의 책(노자를 웃긴 남자)과 이번의 역해(완역 도덕경)가 다르다. 冲(충)은 도덕경에 있어 정말 중요한 도의 제1의 특징임으로 인용문이 길더라도 비교하고 가자.

이 문장에서 우리한테 생소한 글자라 해봐야 ‘충(冲)’하고 ‘영(盈)’뿐이다. 그리고 문장이 어렵지도 않다. 그런데 이런 문장도 똑바로 못 읽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고나 할까, 어이가 없다고나 할까, 도올이란 사람이 참 희한해 보인다.

자기가 확실하게 알지 못해서 자신 없는 부분이 많으니…아직 공부가 덜 됐거든 나서지 말아야지 안 그래?…원문을 같이 볼까?…‘도충(道冲)’이라 하면 ‘도는 비었다’ 또는 ‘도는 깊다’ 혹은 ‘도는 그윽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바로 다음 구절에 가서 ‘깊을 연(淵)’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충(冲)은 비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그래서 일단 ‘도충(道冲)’을 ‘도는 텅 비었다’로 번역하자. 문제는 역시 그 다음이다. 도올은 문장이 조금만 길면 반드시 틀린다. 뭐라 했느냐 하면, (위 도올 번역 참조) … 암만 봐도 도올은《도덕경》을 볼 게 아니고 《천자문》을 봐야 될 애다. 하늘 천, 따지를 익혀야 될 애가…이게 장난이지 학문이겠나? 한자가 처음 만들어져서 글자의 의미들이 혼란스럽고 용례가 확실치 않을 때 만들어진 상서(尙書)같은 고대의 책들에서는 한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자가 어느 시대 사람이야? 공자…가 춘추필법을 세운 시대의 사람이다. 도대체 그 시대에 누가 한자를 정반대 되는 뜻으로 쓰더냐? ‘찰 영(盈)’을 ‘다할 궁(窮)’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빡빡 우기는 이유가 대체 뭐야? 이유는 한 가지뿐이 없지. 지 대갈빡으로는 해석이 안 되니까 글자의 뜻까지 바꾸는 거야.

외국말을 옮기는데 그래, 원문의 의미를 지 맘대로 바꾼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지만 이 문장은 원문의 한자 뜻 그대로 읽지 않으면 해석이 안된다.…‘도라는 것이 텅 비었다’ 해놓고 뭘 퍼내어 쓴다 말이야? 도라는 것은 텅 빈 것인데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가 않아? 도올은 빈 쌀독에서 마르지 않도록 쌀을 퍼 올리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지.…‘이용지(而用之)’ 즉, 쓰고자 하면, ‘혹불영(或不盈)’ 아마도 채워져 있지 않을 것이다(손에 잡히는 게 없을걸)라는 소리다.…도는 텅 비어서 소용이 없는 물건이라는 소리다. 쓸려고 하면 써먹을 수가 없다는 거다. (노자를 웃긴 남자,P93~96)

계속해서 완역본을 보자.

도는 깊어서 쓰고자 하면 채워져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완역본,P99)
‘충’의 字意에는 ‘빌 충’과 ‘깊을 충’ 두 가지가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뜻은 통하지만 뒤의 ‘만물지종’과 문맥상 연결을 고려할 때는 ‘깊을 충’으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不盈’이 ‘차 있지 않다’이기에 ‘빈 것이 차 있지 않다’고 하면 같은 말이 중복되는 감이 있다.…도는 그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것이어서 무엇을 건져 올려 쓰려고 하면 채워져 있지 않아 올라오는 것이 없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즉, 아주 깊은 우물이어서 두레박을 집어넣어도 물이 있는 곳까지 닿지 않는 것에 비유하면 어울릴 것이다. 그 속에는 엄청난 물이 있지만 너무 깊어서 우리 손이 닿지 않아 쓸 수가 없다는 의미다.…지금까지의 번역은 ‘도는 텅 비어 있는 것이지만 아무리 써도 마르지(고갈되지) 않는다.’는 것이어서 도라는 것이 쓸 수 있는 무엇이라고 노자가 말한 것처럼 오해되어왔다. … 우리가 읽어온 고전의 번역문에 이렇듯 오역과 악역이 많았던 것이다. ‘이용지혹불영’은 ‘쓰려고 하면, 아마도(혹시) 차 있지 않을 것이다’로 밖에는 달리 읽을 수가 없는 문장이고,(완역본, P99~100)

※ 한문으로 된 경전을 역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나의 글이 아님으로 더욱 그렇다. 더욱이 도덕경은 워낙 역해가 바르지 않은 곳이 많아 수정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기존 해석과 이번 완역본을 보면 이경숙씨가 고친 부분이 확연히 드러난다.
첫째, 도충(道冲)의 冲을 ‘비었다’고 했다가 이번에 ‘깊다’고 하였다.
둘째, 노자성인 당시는 ‘이미 글의 용례가 바로 섰다’고 해놓고 이번에는 반대로 ‘문법들이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도를 쓰려 한다’고 문장을 역해하고 있다.

처음, ‘이’는 ‘충’을 ‘비어 있다’로 역해하였다가 이번 완역본에는 ‘깊다’로 역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맥상 ‘깊다’가 어울리지만 ‘비다’로 써도 뜻이 통한다고 여운을 두었다. 아주 보기 드문 어투다. 당신도 이 문장만큼은 확실하기는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의 ‘충’은 ‘깊다’로 풀면 틀리다. 번역된 나의 문장을 보나 ‘도’를 묘사한 제14장과 제21장, 그리고 여타 도를 표현한 장을 보면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 할 것이다.

지금껏 ‘冲’을 ‘비다’로 역해 해온 것을, 그리고 자신도 처음에는 ‘비다’로 역해한 것을 이번 완역본에서 ‘깊다’로 굳이 할 필요가 있었는지 참말 의아스럽다. 道生一(제42장)도 있고 有 生於無(제40장)도 있고 형이상학을 묘사한 모든 장에서 ‘비었다’로 보아야 맞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럼 왜 고쳤을까? 이 문제는 다음에 이어지는 ‘而用之(이용지)’에 있다. 충(冲)을 ‘비다’로 해석할 경우, 이 빈 것을 ‘어떻게 쓸 수 있느냐’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에 ‘텅 비어있다’로 역해를 하고서도 ‘텅 비었는데 어떻게 (인간이) 쓸 수 있을까?’하고 번민을 넘어 잠까지 설쳐대며 고통까지 당하셨을 것이다.(인용문 참조) 그래서 장고 끝에 둔 手가 惡手인 ‘깊다’다.

이 문제는 간단히 답하고 넘어가자. 삼라만상이 空하다는 것이 불가의 기본(공즉시색, 색즉시공)이고 노자 또한 같은 것이다. 이게 답이다.

두 번째의 문제는 본인이 번역을 바르게 하지 못한 이유에 해당한다. 문법적으로 번역이 안 되다보니 처음에는 이미 공자시대에 필법이 세워져 있다고 해놓고서는 이번에는 반대로 공자나 노자는 단어나 문법을 만들어가면서 썼다고 우기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번역이 문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서 연유한다고 보인다.

마지막은 문장의 주어다. 많은 역해자가 헤맨 곳이다. 문장 자체를 번역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앞에서부터 번역을 하면 문장이 아무리 풀더라도 매끄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이’의 경우는 ‘인간이 텅 빈 것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하고 있고 기존은 ‘텅 빈 것을 써도 차있지 않아 계속 쓸 수 있다’는 식으로 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기존의 역해를 비판하는 방법이다. 즉, ‘도충이용지혹불영’에서 ‘이용지’를 빼고서 문제가 있다고 만들어 버린다. 그래야 ‘도충혹불영’이 되어 ‘빈 것이 차 있지 않다’가 되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위 완역본 참조) 하지만 문장의 틀을 빼 버리면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문장의 話者는 노자이며 노자가 正覺하여 깨우친 도를 설명하고 있는 문장이다. 즉, 이 문장은 오직 도에 대한 것으로서 用의 주체도 역시 道여야 한다. ‘쓰다’의 주체가 ‘도’라는 것이다. 또한 而는 ‘접속사’고 ‘용지혹불영’은 ‘혹’이 들어가 있지만 이는 부사(아마도, 혹)임으로 문장의 틀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된다. 이제 나머지 ‘용지불영’의 번역인데 모아 14장에서 이야기하자.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하나있다. 도는 ‘텅 비었다’는 것이다. 도의 제1의 특징이자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도가 텅 비었다는 것만 알고 있어도 이후의 도덕경을 역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갖을 수 있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그 모양을 그려보자면) 그 날카로운 것(곁가지)을 꺾어 (본 모양을) 보려 하면 (마치) 그 빛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 같고 (반대로) 그 (서로 和하여) 얼크러진 듯한 것을 풀어 (자세히 보려) 해쳐보면 (마치) 그것은 먼지와도 같(이 아무것도 없)다.

많은 해석가들이 이 문장이 도를 표현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풀이하는 과정에서 나와 같이 하지 않고 쭉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따질 것이 없다고 본다. 번역만 바르게 한다면 말이다. 다만, 상호 연결 문장이 어떤 것이냐하는 것은 바르게 집어야 한다.

사실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해 기존의 번역이나 해석들은 정확하게는 맥을 집지는 못하였다. ‘이’가 지적했듯이 이곳은 ABab로 된 문장이다. 번역은 AaBb로 읽어야 한다. 지나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어문법의 표현 특징이며, 이미 제1장에서 나온 것이다.

도는 만물의 예리한 끝을 꺾어 그 분(紛)을 풀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 티끌에도 뒤섞이니,(노태준님,P38)

보는 바와 같이 ‘노자가 직관으로 본 도를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는 문장인데 기존서들 대부분은 ‘도가 행위의 주체’가 되어 행위하는 것처럼 번역하고 해석도 그런 식으로 하였다. 단, 노자의 직관에 의한 것임으로 사실 노자가 본 것처럼만 번역을 했다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직관이란 맞다 틀리다 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말로 ‘도는 개똥보다도 못한 것이었다’라고 해도 할 말은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 노자성인이 묘사하는 것은 제1장을 빌린다면 ‘요’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 이러한 부분들을 ‘常有欲’한다면 그 徼요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욕심 내보는 것이다. (이 도덕경 전체가 그렇다.)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맑기도 맑아 혹 있는 것도 같은데
나는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象帝(높은 신)보다 먼저다’는 것밖에.

계속 道이야기다. 노자 자신이 정말 도에 대해 몰라 쓴다면 아마 첫 장부터 노가리로 썼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천지지시, 만물지모, 중묘지문) 그러나 노자는 도에 대해 첫 장에서 대강의 틀은 이미 이야기했다. 뭐라 했는가? 만물의 시원이자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그가 이런 문장을 왜 썼을까? 그것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이 마지막 문구로 다 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도에 대해서 누가 물어 본다면 노자가 직관에 의해 깨달았을 뿐인 도를 이 문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 않았을까? 지금 정도라면 전자, 양성자, 중성사, 쿼크, 불확정성의 원리, 입자와 파동 등 등 하면서 나름대로 설명을 늘어놓을 건데. 당시에 이 이상 얼마나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기존서들도 도에 관한 설명이라고 해설들은 하고 있는데 문제가 되는 부분은 상제(象帝)다. 이 부분은 상당히 많은 書들이 上帝(오강남님,박일봉님), 天帝(노태준님,왕필)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면서 ‘상제’의 ‘象’을 술어로 풀어 ‘~와 같다(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이 문장을 ‘상제보다 앞서는 것 같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해석자들이 상제의 쓰인 배경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전체적인 도덕경의 문장의 뜻으로 보면 그것 자체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도 그 쓰인 배경을 설명하지 못했는데 오직 ‘이’만이 설명을 들여놓았기에 인용한다. 나 역시 노자가 이러한 뜻을 갖고 쓴 것인가는 의문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라면 할 말이 없는 부분인데 이 象이 어디에도 ‘코끼리 象’으로 쓰인 것을 보면 그의 추리가 맞다고 생각된다.

상제(象帝)가 코끼리 신이지 뭐겠냐?…중국에는 코끼리나 기린의 서식지는 없다.…그러나…지나인들이 코끼리나 기린이라는 동물을 알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지나인들에게는 별의별 것들이 다 신이 된다. …그러니 동물들도 신이 안 되란 법이 없지.…또 이 온갖 잡다한 지나의 신들은 끗발에 따라 위계 질서가 있다.

그래서 최고 대빵을 상제, 천제, 또는 옥황상제라고 하고 저 아래 서낭당 고목 신까지 셀 수도 없는 신이 줄을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나라의 계급은 어떻게 될까? … 옥황상제와 같은 레벨의 동물이 무엇이냐? 아마 노자는 그것을 코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니까 노자가 말하는 상제(象帝)란 끗발이 제일 높은 신이다. …그런데 왜 노자는 상제(上帝)나 천제(天帝)같은 단어를 사용치 않고 상제(象帝)라고 썼겠느냐 말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그 이유가 문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직 이 책을 읽을 때가 안 된 것이다. 내가 앞에서 하나 하나의 글자의 뜻만을 볼 게 아니고 노자의 필법과 글 버릇까지 살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이런 대목 때문이다.(노자를 웃긴 남자,P105-108)

상제(象帝)를 이렇게 풀이한 사람은 지금까지 도덕경 해석가중에 한 분도 없다. 그러나 상제(象帝)를 상제(上帝)로 이해하였다고 해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이’의 해석을 봐도, 끗발로 보면 등급이 같다고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노자의 바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 지나(枝那)를 ‘변방나라’로 번역하여 잘 못 설명한 곳이다. ‘지나’는 ‘진나라’라는 명칭이 유럽으로 넘어가 China로 표현되었고 이것이 가차로 ‘지나’로 표현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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