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수도’라는 새 명찰을 달고 전 시민이 신입생처럼 들떠 지낸 지 벌써 몇 해 째인가.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그 가시적 흔적이라곤 선뜻 눈에 밟히지 않는다. ‘문화수도’가 ‘아시아 중심도시’로 슬쩍 타이틀만 바뀌었고, 무수한 말의 성찬만 난무할 뿐 제대로 된 실적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일찍이 유례가 없는 사업인지라 충분한 연구검토를 거치는 것이야 백 번 지당한 노릇이다. 그러나 때늦은 랜드마크 운운하며 애꿎은 설계도만 펼쳐놓고 입씨름하느라고 진이 빠진 장기간의 허송세월은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

거기에다 또 주변 주민들의 목소리까지 겹쳐 한참 시끄럽게 생겼으니 그 매끄러운 진척을 기대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 자칫 바깥에서 하기 좋은 말로 “기껏 주는 밥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한다”고 빈정거릴까 조바심이 인다.

이런 와중에 송기숙 위원장에 이어 이영진 본부장까지 그만 둔다고 한다. 그들이 누구인가. 오월 정신의 산 증인으로 문화예술계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이들 아닌가. 혹시라도 문화수도의 발원인 광주 정신문화 마인드가 위축되거나 실종되지 않을까 두렵다면 나만의 기우일까.

우리에게는 사람이 바뀌면 대부분 전임자의 치적을 꾸준히 살리기보다는 그 흔적을 애써 지운 뒤 꼭 자기의 색깔을 칠하고 티를 내기 위해 덤비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전문적인 ‘문화’를 다루려면 깨지기 쉬운 보석을 어루만지듯 해야 한다. 만에 하나 그런 최소한의 기본 상식조차 없는 이들에게 ‘문화’를 맡긴다는 것은 실로 끔직한 재앙에 다름 아니다.

어느 지방이고 나름대로의 우수한 문화가 숨쉬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광주에 문화수도를 건설하는 까닭은 분명 광주만의 정신과 특성, 그리고 자질을 충분히 살리라는 주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 바탕 위에 아시아 문화 중심지로써의 위상과 본질을 지켜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역사적 주문이다.

오월 정신의 집약적 현주소이던 사적지에 문화의 전당을 짓는 것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문화가 그 본연의 순수를 방해받을 만큼 관념화되거나 문화 외적 억압기재를 떨치지 못하는 것은 마땅히 경계해야겠지만, 문화의 근간이자 촉매제로써의 오월 정신은 면면이 살아 숨쉬어야 할 것이다.

바흐나 베토벤은 지금도 여전히 사랑 받는다. 우리의 판소리 또한 그에 못지 않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폴 발레리를 비롯한 당시의 문화 예술인들에게조차 작품 이하의 취급을 받았지만 오늘에 와서는 루블 박물관의 귀빈석에 떡 버티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유행가가 대중의 광적인 함성 속에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던가.

문화는 시간의 선물이자 결과물이다. 선구적 안목으로 적어도 백년 앞은 내다보고 뚜벅뚜벅 대장정을 이루어야 한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접근을 한달지, 조령모개식으로 마이클 잭슨의 코를 만든달지, 대중 추수적 근시안만을 좇는다면 얼마 못 가서 골치 아픈 장애물로 폐기되고 말기 때문이다.

가수는 돈을 밝히는 순간 금세 버려지고 만다. 노래만 잘 부르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문화는 그 노래이며, 가수이며, 청중이며, 무대이다. <빨간 머리 앤>의 고장이 세계적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 것은 그만큼 동화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작품과 걸출한 작가, 그리고 작가의 분신 같은 주민들의 수준 높은 문화의식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천혜의 명승지인 변산반도를 따라 남부여대하여 그물을 치고 조개를 캐던 어촌문화가 ‘새만금’이라는 시대착오적이며 반 생태학적인 ‘탁상공론 문명’의 발굽에 짓밟혀 하루아침에 무참히 실종되고 말았다. 그 근시안적 개발논리와 졸속행정은 문명과 문화의 정체와 경계를 진지하게 가늠케 하는 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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