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인 이데올로기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 교회 정문. ⓒ차노휘


비가 온다.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그치질 않는다. 차분히, 차분히, 하나 둘 셋, 조용하게 나직하게 숫자를 세면서 내린다. 프라하의 일기예보는 오늘 눈이 온다고 했다.

누군가가 프라하의 일기예보를 믿으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그 말이 맞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온이 높아서 눈이 빗줄기로 바뀌었을 거라고.

저녁에는 어쩌면 다시 눈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이곳에서 눈다운 눈도 비다운 비도 보지 못했다. 살짝 내리다가 말았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내리다가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비가 조금이라도 뿌릴 때면 모든 풍경들이 낮게 포복했다. 어둠을 품은 구름 무게를 감당이라도 하려는 듯이.

비 핑계를 대고 오늘 가려고 했던 카를슈테인 성을 가지 않기로 한다. 중앙역에서 베로운(Beroun) 쪽으로 40분, 카를슈테인 역에서 내린 뒤 역을 등지고 30분 걸어가면 요새에 지어진 성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중충한 날에, 잿빛 공기가 내 생기를 갉아먹는 날에, 먼 길 나서는 것을 삼가기로 한다. 오늘 가지 않으면 몇 년 후에 그곳을 가야할 수도 있다. 내일 부다페스트로 떠난다. 오후에는 짐을 싸야 한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싶다. 기차표도 샀지만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떠나기 전날, 시간에 쫓겨 허둥대기는 싫다.

우산을 쓰고 Cafedu로 향한다. 가방 속에 휴대하고 다녔던 우산. 제대로 사용한다. 우산 든 소맷부리와 야상점퍼 끝자락이 빗줄기에 젖어든다. 빗줄기 끝이 제법 매섭다. 몸은 더운데 손은 금세 시려온다.

떠나야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주변 풍경을 담는 눈에 좀 더 힘을 준다. 빗줄기는 작은 돌멩이로 이루어진 보도블록으로, 승객을 막 태우고 떠나는 트램 꽁무니로, 공원 동상으로도 떨어진다. 프렌치 코트를 입은 여자가 총총거리며 앞서간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비오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열심히 이곳에서 달려왔다. 숙제 잘 한 초등학생처럼 글도, 발품을 팔면서 거리거리를 누빈 것도, 사색까지도 말이다.

무엇보다 체코의 역사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애정이 간다. 흡사 우리네 역사와 비슷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강대국의 영향을 받으며 자주독립을 외쳤던 두 나라. 민주화에 대한 열망.

표면적으로 독립된 국가이지만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여전히 봐야하는 입장은 인지상정이다. 서로 도와주고 협력해서 앞으로 발전을 모색할 만도 하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에게 애정은 갈지언정 선망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선망(羨望)이란 나보다 더 앞서가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미 이루어서 누리고 있는 상대(국)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체코가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나라가 있다. 프랑스이다. 프랑스를 여러 가지 면에서 모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몇 가지 순서와 상관없이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는 파리 거리이다. 프라하 구 시가지에 까르띠에 명품관이 있다. 그 거리를 체코에서는 명품 거리라고 한다. 그 이름을 ‘파리 거리’라고 지었다. 나름, 파리에 있는 샹젤리제 거리를 흉내 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공항이름이다.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처럼 프라하 루지네(Ruzyne) 국제공항을 초대 대통령 이름을 따서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으로 개칭(2012년)했다.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 1936~2011)은 지금도 존경받는 초대 대통령이다.

프랑스 공항처럼 대통령의 이름으로 개칭했지만 의미는 좀 다르다. 체코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굉장히 많이 찾을 겁니다, 그들에게서도 당신의 이름이 불리어지는 것을 듣게 하겠습니다, 라는.

세 번째는 에펠탑을 세운 것이다. 프라하 성에서 야경을 바라보면 산 너머에 에펠탑 형상의 탑이 빛난다. 그 탑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맞았다. 5분의 1로 축소했지만 높이는 같다.

마지막으로는 프라하의 도심 계획을 들 수 있다. 달팽이처럼, 파리와 생긴 모양이 비슷하다. 1구역부터 시작해서 확장될 때마다 빙글빙글 돌면서 늘어나는 형상이다. 제1구역은 관광지구이다.

그러니깐 1구역이 관광지구이기 때문에 대부분 관광객은 1구역만 보고 간다. 프라하의 전부라고 착각해서 아주 작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세시대 도시치고는 1구역도 굉장히 넓었다. 

그곳은 1구역일 뿐이다. 프라하는 총 22구역까지 있다. 바츨라프 하벨 공항이 6구역 안에 있다. 공항을 집어넣을 정도로 넓다.

이렇듯 체코 사람들은 프랑스라는 국가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며 흉내 내려 한다. 나는 숙소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테레진을 가기 위해서 교통편을 검색하는 것을 그녀가 도와줄 때였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국민들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았잖아요. 아, 프랑스대혁명? 왕권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웠던 나라? 나는 그 말에 수긍했다. 그만큼 체코 사람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의 깊이를 엿볼 수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덧붙였다. 자유가 있잖아, 자유.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 끝은 ‘자유’다? 부정할 수 없는 공식이다. 자유는 태생적으로 인간의 DNA에 입력되어 있다. 이렇게 정의한다면 억압받았을 때 저항하는 것도, 자유를 얻기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 된다.

개인적 자유는 물론, 공동체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내 한 몸 희생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희생을 사람들은 위대한 죽음이라고 말한다. 여러 부침을 겪었던 체코에도 위대한 죽음들이 많다.

그런 죽음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가 루이스 길버트의 <새벽의 7인>이다. 한 마을이 전멸된, 리디체(Lidice)라는 마을과 연관된 영화(사건)이다. 리디체라는 마을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이 영화도 이 영화 촬영지였던 교회도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와 인접한 곳에 영화 촬영지였던 레지스탕스들의 마지막 저항지인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 교회(St. Cyril and Methodius Cathedral)가 있다. 나는 그곳을 찾아갔다. 역사적 사실이자 영화 속 이야기로 들어가 보면 이렇다.

먼저 1975년에 만들어진 <새벽의 7인(원제 : Operation Daybreak)> 은 실화가 바탕이 된다. 사실 <새벽의 7인>의 원제는 ‘Operation Daybreak’, 즉 ‘새벽 작전’이다. 실제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명은 ‘Operation Androphoid’이다. ‘유인원 작전’이었다.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 교회 내부. ⓒ차노휘


제2차 세계대전이다. 체코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체코인들은 영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한다. 체코 군인들이 영국군에 소속되어 훈련받는다. 그 중 체코 출신 영국 특수부대 소속 3명은 독일군 히틀러의 오른팔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하기 위해 프라하로 떠난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Tristan Eugen Heydrich ; 1904~1942)는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 및 SS 보안방첩부의 수장이다. 그 당시 제국보안본부 수장 및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총독대리로 임명된다. 그는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 등으로 불리었다.

유대인 색출과 박해의 주역이며 유대인 대학살의 주요 계획자였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마스터 플랜에 따라 유대인들은 학살되었다. 히틀러가 ‘강철 심장을 가진 사나이’라고 부르며 아꼈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1942년 5월 27일 오전. 요세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는 프라하 성으로 출근하는 하이드리히를 암살하기 위해 길 모퉁이에 매복한다. 암살 위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이드리히는 벤츠 오픈카로 출근하기를 고집했다.

차가 급커브를 돌기 위해 속도를 줄인 순간, 가브치크가 차 정면으로 뛰어들어 기관총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은 나가지 않는다. 총기 고장. 암살자나 암살 대상이나 얼어붙은 채로 몇 초가 흐른다. 가브치크는 도주한다. 하이드리히의 운전기사는 총을 들고 가브치크를 쫓는다.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쿠비시가 폭탄을 던진다. 뒷바퀴 아래에서 폭탄이 터진다. 중상을 입은 하이드리히는 사고 직후, 총을 꺼내 응사하는 기개를 보였으나 이내 쓰러진다.

하이드리히는 병원에 실려 간 뒤에도 의식이 남아 있었다. 며칠 뒤 호전되는가 싶더니 결국 8일 만인 6월 4일, 사망한다(경쟁자의 모함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암살 성공의 쾌거는 즉시 알려져 연합국들을 기쁘게 했지만 나치의 보복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나치의 전 체코 주둔군에 비상이 걸렸다. 무자비한 색출 작전을 펼쳤다. 뜻하지 않게 제보자가 나타났다. 프라하에 가족이 있는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들을 팔았다. 

하이드리히를 습격한 2명을 포함해 7명의 낙하산병들이 한 교회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1942년 6월 18일. 습격 22일만의 일이다.

SS대원들은 교회로 쳐들어갔다. 교회 위층에서 1차 교전이 벌어졌다. 대원들 중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 SS대원은 이들이 전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시 수색을 펼쳐 마침내 지하실을 발견했다.

무조건 범인들을 생포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몇 차례 지하실 진입에 실패한 SS대원들은 레지스탕스들을 회유하면서도 가스와 물을 이용해서 공격한다. 지하실의 유일한 환기구를 통해서 수공을 펼친다.

지하실 물은 계속 차오르고 마지막까지 생존해 있던 두 사람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 서로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자살하기에 이른다.

최후까지 저항하며 자존심을 지켰던 레지스탕스. 그들이 교전을 벌였던 곳이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 교회(St. Cyril and Methodius Cathedral)이다. 동유럽이나 러시아 지역에서는 키릴과 메소디우스라는 형제 성인의 이름이 종종 나온다.

문화적으로 빈약했던 당시 슬라브족에게 문자와 문명을 가져다준 기독교 성직자다. 지금도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교회는 로마 가톨릭도 개신교도 아니다. 동방정교회 계열이다(그 당시 이들을 숨겨주었던 신부는 처형된다).
 

총알자국이 남아 있는 지하실 환기구. ⓒ차노휘


비교적 한적한 거리에 있는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 교회는 이미 몇 사람이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도로변으로 갔다. 지금까지 복원하지 않은 채 총알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하실 환기구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물 호스를 밀어 넣었던 당시 그대로였다. 그날의 교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 아래에 촛대와 꽃이 놓여 있었다.

안타깝게 교회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문이 잠겨 있었다. 그곳에서 서성이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 내부를 유리 너머로 둘러보았다. 이미 영화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장소여서 낯설지 않았다. 천정화나 난간이나, 당시 꽤 큰 격전을 치른 실내인데도 말끔했다.

나는 교회가 바라보이는 길 건너편으로 갔다. 이미 영화로 봤던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마지막 생존자의 죽음은 퍽이나 강렬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 이미지보다는 낙하산병들이 처음 강하해 도움을 받은 곳으로 알려진 리디체 마을의 전멸이 더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건 레지스탕스들의 죽음은 어느 식민지에서나 벌어지는 위대한 희생이다. 그들은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고, 그 행동의 결과로 때론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그들의 행위가 실제로 조국의 해방을 가져왔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뜻이 후대에 기려진다.

그러나 리디체 마을의 전멸에서 보듯 그들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사람들의 다수가 학살을 당하는 경우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야만의 시대에 저항하는 개인이나 조직으로 인해 다수가 희생당하는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우리의 경우도 6·25 당시,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보면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무고한 양민들이 대거 죽음을 당했다. 밤에는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개인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 다수의 무고한 희생을 가져오는 게 예고된 위험이라면 과연 그 개인의 행동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야만을 저지르는 상대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 한 도시나, 한 인종이 전멸하게 되는 역사 앞에서 선뜻 어떤 결론을 내기가 두렵다. 더욱이 그 신념이 조국의 해방이 아닌 어떤 이데올로기일 때는 문제가 더 커진다.

한 20년 전까지 ‘이데올로기’라면 고도의 의식적인 가치 체계이자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원용한 사회과학자들은 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철저하게 ‘무의식’을 기반으로 한다고 말한다.

무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라는 중요한 인식 전환이 일어났지만 그 결과는 사뭇 유쾌하지 않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무의식을 세 줄로 요약해보자. 내게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나의 무의식이다, 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나’일 수 없고 내 주인은 ‘무의식’이기 때문에 내가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 결과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다른 말이다.

설명을 할 수 없어도 된다. 무의식이 시킨 것이니깐. 그것을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니깐.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의식(‘나’라고 생각하는)’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그 무엇(무의식)’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꿈에서 깨어 일을 할 때면 나는 늘 깨어있다고 생각하며 내 말과 행동을 점검하는데, 그것조차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시키는 일이라는 것이. 그 모르는 그 무엇의 저변에는 이데올로기가 그림자처럼 존재한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자기기만’ 장치라는 것이다. 각 나라나 민족의 이데올로기치고는 ‘자기’가 중심이 아닌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고 인도인은 인도를, 그리스인은 그리스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아폴론 신전은 세계의 배꼽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유대 신화는 야훼는 유대민족을 선택했다는 선민사상에 빠져있다. 우리나라라고 비켜갈 수 없다. 5천년 역사의 단일민족이라고 말한다.

도저히 지형적으로 단일민족일 수가 없다. 반도는 대륙에서 섬으로 가기 위해서 지나가는 곳이면서 해양에서 올라가다 보면 거쳐 가야 하는 곳이다. 중국과 러시아하고 얽히고설킨 것은 물론 고려 때는 중동에서도 사람이 왔다.

몽골도 우리나라를 상당 기간 점령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다?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민족을 탄압하는 무기로도 사용된다.

나는 이들 영웅 7인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지하실 입구에 선다. 문이 닫힌 것은 점심시간과 겹쳐서인 듯, 교회 안쪽에서 열쇠를 가지고 사람이 나왔다. 입구에 간판 내용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Heydrich 라는 부분은 눈에 확 들어온다. Heydrich.

한 나라에서는 첩자이자 암살자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애국자라고 불릴 수 있는 상이한 이데올로기.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광기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무의식의 이데올로기라는 광기.

프라하로 오기 전, 조촐한 떠남을 배웅하던 W. 택시를 타고 귀가하면서 걸어가던 나를 본 모양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다. 차 선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잘 걸어가더라구. 가끔 뒤도 돌아볼 필요가 있어.

가끔 뒤돌아보고 주위를 살피는 것. 그것이 그나마 무의식에 발목 잡히는 것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데올로기가 꼭 필요하다면 나는 그저 생명에 대한 모든 존중 즉, 생명존중이 이데올로기였으면 싶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존중하다보면 이런 야만의 학살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성 키릴과 메소디우스 교회에 있는 기념탑.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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