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라는 장식

세들레츠 납골당 내 해골 장식물. ⓒ차노휘


기착 역에서나 공항에서 전광판을 보며 플랫폼이나 탑승구 번호가 ‘뜨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긴장된다. 기차는 출발하기 15분이나 20분 전에 번호가 뜬다(더 늦었던 경우도 있다).

공항은 그래도 두어 시간 전, 혹은 그 이전에 뜨지만 수속 시간이 제법 걸리니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수속을 마친 공간. 명품 면세점을 양쪽에 두고 그 한 가운데를 걸어갈 때면 이곳도 저곳도 아닌, 좀 더 과장되게 말하자면 내 뿌리가 소멸된, 국적도 없는 난민이 된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뿌리를 내려야할 것 같아 비행기를 탈 때까지 시계를 보고 또 보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쿠트니 호라(Kutna Hora)에 가기 위해서 나는 프라하 중앙역을 찾았다. 중앙역 역사로 들어가는 공원길은 캐리어나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나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여행객이 올까.

나도 떠나기 위해서 그곳을 찾지만 관찰자로서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역사 내 전광판을 올려다보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도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사람들은 어디로 떠나는 걸까.

느긋한 관찰자로서 전광판을 보던 나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찾아도 Kutna Hora라고 적힌 종착지가 없다. 쿠트나 호라까지 45분 타고 그곳에서 내선으로 갈아타서 쿠트나 호라 메트로까지 20분을 더 가야 내가 보고 싶었던 세들레츠 납골당을 볼 수 있다.

관광객이 많고 시간이 짧아서인지 기차 시간표와 좌석 번호를 주지 않았다. 직원은 승차권을 주면서 ‘Anytime’을 강조했다.

‘Anytime’이니 내가 염두에 두고 온 8시 5분 기차를 놓쳤다고 해서 기차표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 기차를 타면 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뭘까. 체코어를 읽지는 못하지만 여행을 다녀본 직감으로 요 정도 위치한 글은 중간 도착지이고 그 다음 것은 최종 목적지, 저것은 플랫폼 번호라고 눈치껏 알 수 있다. 8시 5분 기차 시간 중 5분을 남겨 둘 때, 중간 도착지로 콜린(Kolin)이라는 철자가 보였다가 없어졌다.

중간 도착지는 한 곳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광판 글자가 흘러간다. 그 찰나를 발견한 것이다. 아, 저거였구나. 나는 내 목적지만 생각했지, 중간 도착지와 기차가 그 방향으로 갔을 때의 최종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3D 라고 적힌 플랫폼 번호를 보고 뛰었다. 출발 30초 전에 탑승했다.

쿠트니 호라는 프라하 남동쪽으로(4시 방향) 65km 떨어진 곳에 있다. 13세기, 은광이 발견되면서 300년 간 프라하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렸다. 쇠락은 은이 고갈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때 만들어진 유산으로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르바바 성당과 해골 사원으로 유명한 세들레츠 납골당이 있다.

기차는 칸막이 기차였고 같은 공간에 현지인 아저씨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유럽의 기차는 안내 방송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안내 방송을 해준다 해도 그 다양한 언어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래서 목적지를 아는 경우는 시간 계산이다. 예를 들면 쿠트나 호라까지 45분 걸린다고 했다. 그러면 30분부터 긴장한다. 기차 시간은 거의 정확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정차하면 그곳이 목적지가 맞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있다. 45분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5분 전에 어떤 역사에 정차한다. 그러면 헷갈린다. 이 기차가 좀 빨리 달렸나, 여기에서 내려야 하나, 라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십분 정도 늦게 도착하는 경우다.

이런 상황을 접해본 나는 꼭 한번 현지인에게 묻는다. 현지인이 아니더라도 옆에 있는 승객에게 묻는다. 승차권을 보여주며 이곳이 맞냐고. 아니라고 하면 그곳에 도착하면 말해주면 고맙겠다고.

그리고는 목적지에 관한 이야기도 서로 나누곤 한다. 모든 분들이 친절하게 호응해주고 내려야할 때를 알려주었다. 같은 칸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쿠트라 호라 역사 플랫폼 풍경. ⓒ차노휘


시골 플랫폼과 역사 풍경은 낭만을 불러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기차가 사라질 선로 끝 소실점, 그 위로 넓게 펼쳐진 하늘, 간결하고 소박한 역사, 역사 뒤로 보이는 들판과 박공지붕들. 기차에서 내린 순간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곳에 온 것에 감사했다.

프라하에서 45분만 달려도 시골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9시 전이라 서리가 엷게 풍경을 덧칠해 공기가 차갑게 목덜미를 훔쳤지만 되레 생생하니 좋았다.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역사를 빠져나갔다. 걸어 나가는 승객 중 삼분의 일이 중국 단체 관광객이었다.

역사를 빠져나와 한적한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세들레츠 납골당으로 맞춰놓은 구글맵을 보지 않았다. 동네 구경을 하고 싶었다. 시간도 이르니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마을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체스키 크룸로프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곳은 중세 도시의 아기자기한 마을, 흡사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예쁜 동네였다. 이곳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울긋불긋한 지붕보다는 은은한 황토색이 배어있는 곳이었다.

마을을 조금만 들어가도 언덕 위 눈에 띄는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100년 걸려 완공했다는 성 바르바라 성당(St. Barbora's cathedral)의 아찔하도록 날렵한 곡선의 첨탑. 측면과 후면보다 단아하고 절제된 정면. 정면 앞 원형 정원.

후기 고딕 양식 성당의 자태는 매혹적이었다. 끌려가듯 그곳으로 향했다. 성당으로 오는 길은 두 갈래길이 있었다. 나는 17세기 예수회가 세운 대학 건물을 지나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 체코 성인들의 석상을 보며 들어갔다. 석상이 서 있는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를 전망할 수 있다.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바르바라 성당. ⓒ차노휘
바르바라 성당 정면. ⓒ차노휘


골목골목은 돌담과 돌바닥이 어울렸다. 사이사이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도로까지 점유하고 노점을 벌였다. 성당에서 내려다본 안개 낀 깊은 계곡과 침엽수림. 저 깊은 계곡에 은광이 있었던 것일까.

성당보다 소박한 블라슈스키 드부르 궁전, 유럽 최대의 은광이 발견되자 궁전이 세워지고 궁전 안에 왕립 조폐소가 만들어졌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사용했던 국제통화 ‘프라하 그로센’이란 은화를 찍어냈다.

투어 신청을 하면 은 채광 현장 체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연휴부터 새해까지 쉰다고 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해골사원이라고 부르는 세들레츠 납골당으로 향했다.

바르바라 성당에서 세들레츠 납골당까지 걸어서 35분이 걸렸다. 납골당 안에 고딕풍 사원이 있고 그 안에 뼈로 만든 장식물이 있다. 그것은 14~15세기에 유럽을 휩쓸던 페스트와 후스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뼈로 만들어졌다.

집단 매장된 시신들은 약 100년 동안 방치되었다. 어느 앞 못 보는 수도사가 그 자리에 납골당을 만들었다. 1870년 나무 조각가인 프란티세크 린트(Frantisek Rint)가 지금과 같은 형상으로 제작했다. 온갖 부위의 뼈로 피라미드형 탑부터 샹들리에까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 있다.

납골당과 가까워지자 사람들로 북적댔다. 사원 입구에는 입장료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나는 맨 뒷줄에 섰지만 망설였다. 그냥 갈까, 라고. 저것을 보기 위해서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입구에서 돌아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다 봤다. 생각보다 마을이 고풍스러웠고 나는 이 정적인 풍경이 좋았다. 내가 가본 곳 중에서 정서적으로 와 닿았다. 내 기대치 이상이었다.

로마 베네토 거리에 있는 해골 사원(Santa Maria della Concezion)을 간 적이 있다. 수도사들의 뼈로 실내를 장식해서 유명해진 교회였다. 그곳은 흑사병에 사망한 일반인들이 아니라 1528년부터 1870년에 죽은 수도사 400여명의 뼈를 수습해 벽장식, 샹들리에, 촛대 등을 만든 곳이었다.

특징적인 것은 갈색 수도복에 호리끈만 매고 맨발에 가죽 샌들을 신은 프란체스코 종파 복장의 해골 신부가 군데군데 방점을 찍듯 장식(?)되어 있다는 거였다.

내 의지와 달리 나는 밀려가듯 입장해서 조그마한 홀을 둘러보고 사진 몇 컷을 찍었다. 뼈 장식품을 보고 죽음의 경건함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사진 찍기에 바빴다. 나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나왔다.
 

바르바라 성당에서 바라본 구트나 호라 메스토 마을 풍경. ⓒ차노휘


죽음의 장식. 영혼이 떠난 육체는 그저 사물일 뿐. 죽음이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대체 영혼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잠시 머물렀던 육체가 다른 육체와 뒤섞여서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본 소감은 어떨까.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렇다고 가볍게 보거나 구경거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지만 경건해야 할 그 무엇. 설렁 한꺼번에 죽음을 맞이해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던 존재라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그 당시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후스 전쟁 보다는 흑사병이 더 치명적이었다. 1348년부터 1350년까지 3년 동안 유럽인구 9천만 중에 4천만 명이 죽었다. 인간의 무지가 더 재앙을 키웠다.

흑사병을 신앙과 연결시켰고 병을 없애기 위해 마녀사냥을 했다. 성당 안에서 기도를 하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낫기 위해, 신성한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은광을 채굴했던 이곳은 더 신성시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은이 흑사병을 낳게 해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더 빨리 전염됐다.
 

바르바라 성당에서 바라본 구트나 호라 메스토 계곡 풍경. ⓒ차노휘


흑사병은 쥐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 때문에 발병한다. 1896년 프랑스의 예르생이라는 세균학자가 밝혀낸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은 페스트 발원지가 아니다. 고비사막에 사는 설치류들이 균을 옮겼다.

1346년 몽고군이 크림반도의 카파라는 도시를 포위한다. 몽고군 중 일부가 병으로 죽는다. 전염병이라는 것을 안 그들은 죽은 병사의 사체를 투석기를 이용해서 성 안으로 던져 넣는다.

얼마가지 않아서 성안의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성 안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들 중 제노아의 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즉시 고향으로 대피한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에서부터 시작한 흑사병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자 교회에서는 종말이 왔다고 했다. 신성한 곳에 모여서 기도하면 신이 노여움을 풀 거라고 했다. 열심히 기도할수록 죽음은 더 빨리 왔다.

많은 종교들은 내세를 강조한다. 이 세상보다 죽은 뒤에 더 좋은 세상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육체가 아닌 영혼을 중심에 둔 말일 것이다. 영혼의 유무에 관해 궁금해 하던 어떤 의사가 죽기 직전 환자의 몸무게와 죽은 직후 몸무게를 재서 그 차이를 계산한 적이 있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차이가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대목에서 그만 웃고 말았다. 무게감이 있는 영혼. 그렇다면 영혼도 물질이어야 한다는 말인가. 영혼이 물질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나 영혼을 몸과 분리해서 하늘로 올려 보낸 것은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했다.

절실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성’을 담보한 그 무엇이, 죽음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신과 가까워질 수 있는 그 무엇. 그것은 과연 뭘까. 육체는 그 무엇에 속할 수가 없다.

몇 십 년만 살면 늙고 병들어서 죽는다. 생명이 소멸한 신체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썩는다. 벌레들이 우글거려 보기 흉할 정도로 변한다. 그것을 상쇄할 만한 그 무엇이 필요했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스러져 가는 육체는 그래서 완전할 수 없었다. 무한한 영원성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들레츠 납골당과 세들레츠 사원. ⓒ차노휘
세들레츠 사원 입구 해골 장식. ⓒ차노휘


영혼이 대체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잘잘못을 구별할 수 있는 마음. 뭔가를 잘못하면 창피해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 거짓말을 하면 가슴이 아파서 잠 못 이루게 하는 마음. 그 마음은 양심에 가깝겠다.

혹자는 영혼을 양심이라고 하다니, 너무 가벼이 보는 게 아닌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가끔, 밤풍경을 내려다보면서 붉게 빛나는 십자가를 본다. 점점 늘어만 가는 교회 첨탑. 첨탑이 늘어날수록 사회면 기사는 더 시끄럽기만 하다.

영혼이라는 것은 종교와 그리 상관없는 관계다. 양심 없는 종교인 또한 너무 많다. 그렇다면 어디 영혼을 파는 가게는 없을까. 그것을 사서라도 양심이라는 것을 넣어줄 수 있는 그런 가게 말이다.

나는 거리거리 가게를 지나 구트나 호라 역사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상념을 이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해골 사원을 보고 나온 단체 중국인 관광객이 내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그 뒤로 일본인 노부부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 걸어 왔다. 생각에 골몰한 내 걸음은 자꾸 늘어졌던 모양이다. 나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쪽으로 비켜섰다.

바르바바 성당에서 세들레츠 납골당으로 걸어오는 동안 스마트폰 배터리가 거의 소모되었다. 충전도 할 겸 동네 바에서 코젤을 마셨다. 화목 난로가 있어 따뜻해서 한 잔 더 마셨다.

오전 11시에도 동네 아저씨 다섯 분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일어나자 한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구십도 각도로 인사까지 하며 배웅을 했다. 살짝 취기가 돈 아저씨가 동양인 여자 혼자 와서 맥주를 마신 것이 신기하기도 했나 보다.

아는 것이 일본어 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올까 하다가 나도 생맥주 두 잔을 마신 뒤라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 정색을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영어를 못하는 아저씨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래 돈이다. 영혼도 돈이다. 영혼을 파는 가게가 있어도 돈 없으면 사지 못하니 결국은 또 돈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씁쓸해졌다. 1시가 조금 넘어 서리는 금세 녹고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말이다.
 

쿠트나 호라 역사.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