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수 있는 시간

리디체 추모기념관 언덕에서 바라본 십자가 풍경. ⓒ차노휘


그녀 이야기는, 내가 체코를 떠날 무렵에 하려고 했다. 소중한 것이 달아날까봐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이번 여행은 될수록 혼자이고 싶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길 위의 인생에서 최고의 여정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프라하에 도착한 다음날이다. 휴게실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 노트북만 든 여자가 들어왔다. 위아래 검정색 옷차림에 머리카락이 허리 즈음에서 찰랑거렸다. 내 나이 또래로 보였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금박 입힌 흰색 자기 주전자에 홍차 티백을 우려 마시면서 인터넷 검색을 열심히 했다. 저 주전자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주인일까? 전날 리셉션 데스크가 끝난 시간에 도착해서 다른 곳에서 열쇠를 찾아야 했다. 숙소 주인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내 예상이 맞다는 듯이 이러저러한 것들을 물었다. 내방객에게 형식상 묻는 질문이라는 생각에 적당하게 답했다. 그녀 또한 내게 질문만 했지 본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물어보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질문을 끝낸 그녀는 휴게실 히터 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 다음날도, 다음 날도 그녀를 그 시간에 만났다. 내가 서너 시간은 미리 와 있고 여자는 여섯시와 일곱시 사이에 들어왔다. 둘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에 금방 익숙해졌다.

그녀가 주인이 아니라 여행객이라는 것을 삼일 째에 알게 되었다. 그날은 휴게실에 들어오면서 빨간색 드라이어를 들고 왔다. 그것은 내 방 창문턱에 늘 놓여 있던 거였다. 앗차! 그때서야 그녀도 같은 방을 사용하는 여행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 방에 세 명의 여자가 기거한다. 한 명은 얼굴을 정확히 안다. 휴게실에 앉아있을 때 목걸이가 걸렸다며 내게 풀어달라고 했다. 깜찍한 서양 인형처럼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가졌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늦은 오후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온다. 프라하에 있는 클럽이라는 클럽을 다 돌고도 남을 시간이었고 그녀의 열정은 끝이 없어 보였다.

다른 여자는, 실은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새벽에 일어나 휴게실에서 글 좀 보다 전날 찜해 놓은 명소를 오전에 나가서 둘러보고 오면 늦은 오후. 샤워를 하고 약간의 일정을 짜면 잠잘 시간이 된다. 

나는 초저녁잠이 많다. 얼굴 모르는 그녀는 나보다 이른 아침에 나갔다가 내가 잠들 때 즈음에 들어온다. 드나드는 기척만 들었지 일부러 얼굴 보려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른 아침마다 정적인 분위기를 공유했던 그녀가 내 룸메이트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확실히 그랬다. 그날은 글 마무리가 덜 되어 점심 때 즈음 외출을 해서 진짜 숙소 주인 얼굴을 봤다. 숙소 주인여자는 9시에 출근했고 루마니아 출신 청소 담당 여자는 9시 30분에 출근했다. 주인여자는 180cm 정도의 훤칠한 키에 세련되게 옷을 입은 마네킹처럼 생겼다. 목소리는 걸걸했다.

다음날 그녀를 봤을 때 괜스레 미안해졌다. 홍차 티백 대신 내가 가지고 온 우엉차를 주며 맛 좀 보라고 했다. 홍차 티백보다 훨씬 풍미가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우엉차를 마셔보더니 예전에 베트남에서 마셔본 맛이라며 고마워했고 매일 우엉차만 마셨다.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이 먼저 여행한 곳 중에서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주었다.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졌다. 일부러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뭐랄까, 나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만나게 될 거라는, 잦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느니 처음부터 만날 여지를 두지 말자는 입장이다.

나는 쾌활하고 사교적인 편이다. 이번 여행에는 그런 내 성격을 자제하기로 했다. 이국의 땅에 머무르면서 글을 통해 나와 좀 더 깊게 만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일주일이 지났고 8일 째로 접어들었다. 여섯 시가 지나가면 여자가 올 시간인데, 라고 하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출입구를 바라보게 되었다.

체스키 크룸로프를 다녀온 날이었다. 체코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였던 테레진이 궁금했다. 여자에게 테레진이 어떤 곳이냐고 묻는 내 질문이 기폭제가 되었을까,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화제를 옮겼다. 나치와 유대인 학살. 아우슈비츠. 서유럽 북유럽에는 없는 수용소 등등.

심지어 자국민도 인종 대청소 수용소가 동유럽에 있는 줄도 몰랐다면서 여자는 흥분했다. 나도 그녀와 함께 분노했다. 상대적으로 인프라가 빈약한 곳에 혐오 시설을 만들었다고. 그러다가 현재 난민들 상황과 연결시켰다. 로힝야족까지도.

한참 열띤 토론을 이어가던 그녀가 외쳤다. 리디체. 리디체를 가봐야 해.
 

리디체 추모기념관. ⓒ차노휘


그녀의 외침 때문인지 나는 다음날 리디체로 향했다. 리디체는 프라하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프라하에서 북서쪽으로 23km 떨어진 마을이다. 메트로를 20분 타고 버스를 사십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타면 도착할 수 있다.

A선 메트로는 시외 경계선에 나를 내려주었고 그곳 버스 승강장에서 삼십분을 기다려 322번 버스를 탔다. 가는 길이 밀려 예상 도착 시간보다 20분이나 지체됐다. 차가 막혔지만 차체 높은 버스에서 도로 위 운전자들을 살폈다. 신호에 걸리면 휴대전화나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이 여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공항을 빠져나가자 언덕 위 그림 같은 집을 지나치고 지나쳤다. 1942년 6월 10일 전에는 리디체도 저렇게 평화롭고 한적한 정취를 뽐냈을 것이다. 450명이 거주하는 클라드노 석탄분지의 전형적인 시골 광산촌. 그곳에 비극이 잉태된 것은 1941년부터였다.

1941년 히틀러는 체코를 통치할 사람으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를 임명했다. 그는 나치독일 친위대 부대장이었으며(별칭은 ‘프라하의 학살자’) 히틀러가 ‘강한 심장’이라고 불렀던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안 체코 망명정부는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실행했다. 현장에서 암살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수류탄을 맞은 하이드리히는 결국 1주일 뒤 숨졌다. 그가 숨지자 히틀러는 아들을 잃은 것처럼 격분했다. 당장 암살자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아내 배후를 밝히고 철저하게 복수하라고 명령했다. 조사자 중 한명이 리디체에 암살자가 숨어있다고 했다.

하이드리히 장례가 끝난 뒤인 6월 9일. 친위대가 리디체 마을을 점거했다.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15세 이상 성인 남자들을 총살했다. 총 172명이었다. 현장에서 총살되었거나 그 이전에 도망치려다 총살된 7명을 제외한 여자들은 라벤스브뤼크 집단수용소로 이송시켰다.

그곳에서 47명이 죽었고(7명은 가스로 처형) 3명은 실종되었다. 1차 체포에서 빠졌던 이 지역 광부들(남자 19명)은 그 후 프라하에서 처형당했다.

도망치려다 총살된 1명을 제외한 90명의 어린이들은 ‘순수 혈통’임을 검증 받아야했다. 나치 의사들이 몰려들어 얼굴과 코 길이를 재고 신체적 특징을 적었다. ‘아리안 족’의 특성을 지녔다는 결과가 나왔다.

나치들은 이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우수한 아리안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을 교육원에 강제 수용했다. 아이들에게 독일 제복을 입히고 독일 이름을 지어주고 독일어를 가르쳤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것으로 세뇌시켰다. 교육에서 탈락한 아이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학살과 강제수송이 끝나자 친위대는 리디체를 불 지르고 무너지지 않는 모든 구조물을 폭파했으며 잔해를 갈아 없앴다. 땅을 고른 다음 나무와 농작물을 심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47년에 그 근처에 새로운 마을부지가 지정되었다. 폐허가 된 원래 마을에는 기념비와 국제적 규모의 장미정원을 갖춘 박물관이 세워졌다.
 

1947년에 새로 생긴 리디체 마을 입구. ⓒ차노휘


한 시간여 버스를 타고 1947년에 새로 생긴 리디체 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수종은 알 수 없으나 곧게 뻗은 헐벗은 나무가 대로 양쪽으로 정렬해 있었고 그 바깥으로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보도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대로를 따라 추모기념관으로 갔다. 마을 풍광과 집들은 평화롭기 그지없었지만 사람 그림자 하나 없어 흡사 유령 도시에 온 것 같았다.

추모공원도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넓은 들판과 같은 그곳.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곧게 솟은 헐벗은 나무가 밋밋함을 덜어주었다. 넓은 그곳 곳곳에 기념관이 있었다. 나는 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 걸었다. 한 마을 전체를 기념관으로 만들어서 그 면적이 넓었다. 만약, 눈으로 덮여있지 않았다면 더 황량했을 것 같았다.
 

90명의 아이들 군상(群像). ⓒ차노휘


남겨진 90명의 아이들 군상(群像). 그들의 얼굴 표정은 흡사 살아있는 것처럼 애처로워보였다. 죄수들과 군인들을 동원해서 마을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밀어버렸다고 했지만 학살과 파괴의 잔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학살이 시작된 첫 지점에서 발견된 부서진 벽돌 하나, 완벽한 ‘청소’가 어려웠을 호자크 집터 지하 벽돌 구조물, 마을 뒤편 언덕에 있던 성당과 초등학교 주춧돌 등이 그날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에 내 발자국을 남기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사라져 버린 마을의 시작과 끝을 눈으로 가늠했다. 울창한 숲을 등지고 앉아서 바로 앞 묘비석에 눈길을 주었다. 묘지에는 꽃과 장식물이 있었다.

버스 시간표에 맞춰 돌아오는 길, 한 무리의 학생들이 견학을 왔다. 내가 제일 처음 가서 추모했던 90명의 아이들 군상으로 줄 지어 가고 있었다. 그들 무리와 상관없이 유모차를 끌고 나온 동네 아낙 몇이 눈길에 바퀴 자국을 내고 있었다. 내가 앉았다가 내려온 언덕에는 그레이하운드를 산책시키고 있는 모자 쓴 남자가 보였다.

아픈 땅 위에 시간이 내려 일상이 무심한 듯 흘렀다. 치유의 시간. 시간의 치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러 보내야 상처가 아물까. 결코 아물지 않은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리디체 추모기념관. ⓒ차노휘


아침마다 노트북을 들고 온 그녀는 지극히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했고 검정색 옷만 입었다. 내 옆에 앉아서 이야기할 때도 여리게 몸을 떨었고 눈 맞추기를 꺼려했다. 키보드를 누르는 손마디는 유난히 굵었다. 오늘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 오늘 오후에 이곳을 떠나. 그리고는 조그마한 선물을 내밀었다. 유리로 된 곰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제야 그녀를 알아가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렇게나 일찍 떠나다니, 그동안 왜 그렇게 무심하게 그녀를 대했을까. 하지만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플로렌스. 집이야. 크리스마스잖아. 가족과 함께 보내야지. 딸이 혼자 있거든. 얼마 전에 이혼했거든. 말을 마친 그녀의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내게 주고 싶은 듯 노트북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즐겨 찾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성탄절 때 입장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봐줬다. 성탄절에는 많은 곳이 문을 닫았다. 투어 신청과 교통편도 알아봐주었다.

어느 곳에서는 하룻밤 자는 것이 좋다며 그녀가 묵었던 호스텔 홈페이지도 알려주었다. 실은 나도 내 계획이 있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었다. 나를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는 그녀의 음성이 듣기 좋았다.

그녀의 인생은 잘 알 수 없지만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이름을 알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바바라야, 바바라.

그때 나는 그녀를 안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팔을 벌려 안았다. 작은 몸집이 팔 안에 쏙 들어왔고 코끝에서는 민트 향이 맡아졌다. 그동안 고마워, 또 만나자. 마음속에서는 그녀를 좀 더 붙들고 싶었지만 한편에서는 담담하게 보내고 있었다. 떠날 때와 보낼 때를 알 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리디체 추모기념관.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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