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상주하는 악마와 천사

수용소 정면, 나치에 희생당한 2만 9천 172명을 추모하는 묘지가 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후원했다. 유태인을 상징하는 별 모양이 인상적이다.  ⓒ차노휘


진즉 이곳을 방문하려고 했다. 잔뜩 잿빛을 품고 있는 아침 공기를 헤치며 홀레쇼비체 역까지 걸었다. 4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거리였다. 그곳 스탠더드 7번에서 테레진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면 되었다. 

생각보다 홀레쇼비체까지 걷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공사 중이어서 돌아가거나 끊어지는 길이 나왔다. 메트로를 탔으면 6분 만에 도착했을 거리이다.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고 욕심을 부렸다. 

20분 남겨둔 거리에서 후두둑, 빗줄기를 만났다. 잔뜩 먹구름 낀 하늘과 내리기 시작한 비를 핑계 삼아 돌아섰다. 

이런 날은 따뜻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바깥 풍경을 감상해도 좋을 날이었다. 좋은 날 가도 감당치 못할 우울함이 급습할 곳. 그곳은 테레진 유태인 강제 수용소였다.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60km 지점. 테레진이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보헤미아 시골 마을이 있다. 그곳은 지리적으로 요새 형상을 하고 있다. 1780년 요제프 2세(Joseph II ; 1741~1790)가 체코 북방 민족들, 주로 프러시아 남하를 막기 위해 요새를 본격화 한다(Terezín Fortress). 

이를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 1717~1780)에게 바친다. 그리하여 이곳 이름이 테레진(Terezin)이 된다.

테레진은 여덟 개의 주요 요새에 흙으로 쌓은 성벽과 해자로 이루어져 있다. 수비대의 수는 5,655명으로, 전쟁이 발생했을 시에는 두 배로 늘어난다. 

수비병들을 수용하고 부수적으로 필요한 창고, 무기고, 상점 등을 짓기 위해 성채의 벽 안쪽에는 고전적인 격자형 설계에 따라 작은 도시가 세워졌다.
 

테레진 강제 수용소 입구 성벽. 천혜의 요새다. ⓒ차노휘


하지만 요새로 기능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1850년부터는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 1793~1875)를 암살했던 이도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수감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게슈타포는 테레진에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전 유럽에서 끌려온 유대인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그들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약 144,000명의 유대인이 이곳에 수용되었고, 이들 중 33,000명이 여기서 죽었다. 약 88,000명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등의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단 19,000명만 생존해 있었다. 이들 중 14세미만의 어린이가 15,000여명이었지만 불과 100여명만 살아남았다.

홀레쇼비체 버스터미널에서 45분 버스를 타고 테레진에서 내렸다. 차창 밖 풍경은 여느 시골 마을처럼 평화롭고 조용했다. 같은 곳으로 가는 앞좌석 외국인 커플이 차 안에서 빈번한 스킨쉽과 사진 촬영을 해대서 흡사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스키를 타러 가는 듯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들 커플과 떨어질 요량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입구까지 거리는 500m. 걸어가는 동안 높은 하늘과 천혜의 요새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높은 벽돌 성벽. 

그리고 그 아래 해자. 유태인을 상징하는 별과 묘지가 나를 맞았다. 아픈 역사를 모른다면 성곽으로 소풍 가도 좋을 풍광이었다.

입장료 210코룬을 내고 들어간 입구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다. 매표소 바로 안쪽에 간단한 식사와 차를 마실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막, 차 한 잔 마시고 나온 듯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웃고 있었다. 

이제는 과거의 비극도 상품화 되어 즐길 시간이 됐구나, 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더해졌다. 나는 이들이 둘러보는 순서와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될 수 있는 한 시끄러운 사람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겨울이 우기인 유럽. 며칠 전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것과 달리 수용소에서 바라본 하늘은 새파랗고 새하얀 구름 몇 점이 나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벽돌로 지어진 요새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잘 닦인 길과 질서정연한 가로수 나무들은 1번부터 34번까지 번호가 매겨진 수용소 건물들과 잘 연결되어 있었다.
 

공개 처형장으로 가는 길. 공개 처형장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감옥이 있다. 공개 처형할 때마다 수감자들이 고스란히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차노휘
공개 처형장에서 볼 수 있는 감시탑. ⓒ차노휘


나는 대부분 사람들이 독일인 간수들 방과 유태인들이 입소식을 치르고 수감되는 장소가 아니라 박물관이 있는 오른쪽부터 돌았다. 

박물관은 나가면서 둘러보기로 하고 27번이 붙은 곳으로 갔다. 번호가 붙어 있는 곳마다 낮은 터널을 통과해야했다. 터널은 언덕 아래에 나 있었다. 언덕 위는 감시초소가 있었다.

터널을 통과하면 생각보다 큰 광장이 나온다. 광장 양쪽으로 다닥다닥 건물들이 붙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나무 침대와 변기가 있는 독방과 여러 사람이 사용했을 3,4층으로 된 나무침대와 그 가운데 나무탁자와 의자, 변기 하나만 달랑 붙어 있는 수용소가 있다. 

수용인원을 열배 정도 초과한 그곳은 나무 침대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자고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몸을 뉘여야 했다.

27번 안쪽으로 들어가는 긴 길. 그 길 끝에 벽돌 벽이 있다. 그곳은 공개처형장이다.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수감자들의 방. 수감자들이 들으라는 듯이 버젓이 공개 처형 했을 그들. 27번 벽에서 7000명 이상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테레진 수용소에서 21번 문을 ‘Gate of Death’라고 한다. 21번 문으로 들어간 유대인은 결코 살아나올 수 없었다. ⓒ차노휘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었다는 21번으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낮은 터널이 제법 길었다. 중간 중간 빛이 스며드는 창문이 있었다. 어두운 그곳을 통과하니 앞이 탁 트인 잔디밭과 잔디밭 위로 나 있는 오솔길이 보였다.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이라니.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당시 유태인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한 벌거벗은 남자와 남루한 옷을 걸친 군상이 서 있다. 21번 터널은 적의 공습에 대비한 대피소였다. 수감자들이 총살되기 전에 거쳐 가야 했던 길이기도 했다.

조금 더 가자 흡사 십자모양 우물처럼 낮은 지붕 아래 시멘트가 발라져 있다. 유태인을 총살하기 위해 총살자들이 ‘엎드려 총’을 했던 곳이다. 지하 감옥도 있었다. 들어가지 말라는 푯말이 있었다.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조명이 있지만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호기심에 계단을 내려가 안을 살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미로처럼 통로가 얽혀 있었다. 왜 내려가지 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길을 잃은 것이 뻔했다. 서둘러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절대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21번. 죽음의 장소. 하지만 경치는 아름답기만 했다. 나는 오솔길을 따라 언덕에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높은 곳은 감시하기에 안성맞춤이었겠지만 낮은 풀이 무성한 그곳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언덕에 올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감시자였을 것이다. 설렁 탈출한 수감자가 이곳까지 와도 탈출에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어보였다. 

고개만 들면 마을이 보였지만 언덕 아래는 수직 경사였고 경사를 따라 해자가 이어졌다. 수직 벽에 또 다른 감옥이 있었다. 수직 벽 너머에는 또 다른 언덕이 있고 해자가 있었다.

첩첩한 감시망. 야외 돗자리를 펴고 싸온 음식을 먹으면 딱 좋을 곳처럼 보이는 이곳. 많은 사람의 원한이 머물러서 기운이 사나운 곳. 인간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끔직한 내용을 다룬 제2차 세계대전 영화가 제작되고 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영화들을 봐왔다. 인간의 악마성을 인지했고 면역이 될 만큼 됐다고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테레진을 방문하려고 했을 때 굳이 즐겁고 아름다운 관광지도 있는데 학살이 진행된 곳을 방문할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이곳은 내가 애초에 계획하지 않은 코스였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여행 흐름상 꼭 방문해야한다면서 뭔가가 나를 이끌었다. 나를 이끈 것은 이곳의 무엇일까, 아니면 내 속의 무엇일까. 내 속의 무엇이라면 악마의 반응일까, 아니면 천사의 반응이었을까.
 

21번 수용소 언덕. 그 아래 해자와 지하 감옥 그리고 또 언덕. ⓒ차노휘


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논리를 신뢰한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이론이 된 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1963)이라는 책. 그녀는 《뉴요커》 잡지사 특파원 자격으로 전범 재판 과정을 취재한다. 그 후 쓴 책이 위의 내용이다.

책 내용은 전범 재판을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이 주 모델이 되었다. 그는 독일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았고 그것이 인정되어 후에 처형당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악하게 태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착하고 성실했으며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런 그가 세기의 전쟁 살인자가 되었다. 그가 저지른 실수라고는 그 당시 법적 효력이 있는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었다. 

일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사람의 생명은 문제시 되지 않았다. 그저 ‘일감’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성실하게 임무를 다한, 직장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히만이 유태인 학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성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평범한 ‘나(너)’도 충분히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다른 말이다.

사고의 결여.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 되레 주장이 강하면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특히나 조직사회에서). 주입식 교육. 악의 평범성은 우리 일상에 가득하고 언제든지 상황만 된다면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있다. 

얼마든지 제2의 아이히만이 탄생할 수 있으며 홀로코스트가 진행될 수 있다. 이미 지금도 홀로코스트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지능적으로 암암리에 진행되는 그것. 인종 청소가 아니라 권력과 부를 기준으로 내 편(독일인)과 네 편(유태인)으로 나누어 한 사람씩 암살하고 있는 지도.

오래 서 있으려니 찬기가 들어 언덕을 내려간다. 21번 입구 터널을 벗어나 입장이 금지된 근사한 집(독일 간부가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을 지나, 독일 간부가 사무실로 사용했던 곳으로 들어간다. 

낡은 문과 대비되는 단열이 잘 되는 창문. 차디찬 돌바닥과 대비되는 따뜻한 나무 바닥. 사무실 옆 실험실과 병원. 생체실험을 했을 그곳. 

생체 실험하는 상상이 영화 속 이미지와 겹친다. 더 많은 이미지를 떠올리기 전에 그곳을 나온다. 직선 건물을 지난다(유태인들 입소 장소이기도 하다). 드디어 아우슈비츠에도 있는 그 유명한 문구와 마주한다.

Arbeit Macht Frei. 영어로는 ‘Work Makes Free’로 번역된다. 성경에 나오는 구절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을 차용한 듯하다.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고 해석되지만 이 말은 ‘노동만이 살 길이다’라는 강한 명령어지 싶다.
 

독일 간부가 머물렀던 사무실. ⓒ차노휘
유대인 입소 장소와 수용소로 가는 입구에 적힌 문구. Arbeit Macht Frei. 노동만이 살 길이다. ⓒ차노휘


그곳을 통과하면 또 수용소다. 햇빛 한줌 없는 독방도 있고 적십자 직원들이 방문할 때 보여주기 식 장치인 세면대가 나란히 붙은 세면실도 있다. 적십자 직원들도 독일인이었으니, 눈 감고 아옹할 것이 뻔하다. 

한 번도 유태인들이 사용한 적이 없는 세면실. 일주일에 딱 한 번 발가벗겨서 5분간 물만 틀어주었던 샤워실. 하루에 한 번 주었던 물과 같던 스프. 그것도 못 먹는 날이 많았다. 총알이 아까워 강도 높은 노동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런 모든 것들을 목격했을 수용소 위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좁은 독방들. 창문이 없어 칠흑 같은 어둠만 차 있는 곳도 있었다. ⓒ차노휘
왼쪽은 감방이고 오른쪽은 목욕시설이 있는 곳이다. 일주일에 한 번 왼쪽 감방에서 모두 옷을 벗고 맞은편 목욕탕으로 보내졌다. 천정에서 5분간 물만 나왔다. 한겨울에도 같은 방법으로 목욕을 했다. ⓒ차노휘
테레진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 방. 가로세로 3미터도 안 된다. 이 방에 수용된 인원은 무려 60명이다. 눕기는커녕 앉지도 못해서 모든 수감자들이 서서 지내야 했다. 물론 화장실도 없다. 이 방에 들어온 유대인은 거의 3개월을 못 버티고 죽었다고 한다. ⓒ차노휘
가로세로 모두 5~6미터 정도 되는 작은 방에 무려 100명의 유태인들을 감금했다. 나무로 만든 침대에는 노약자와 아이들만 겨우 누울 수 있었다. 남자들은 누울 자리도 없었다. 화장실도 없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번 거의 물이나 다름없는 스프만 나왔다. 이것도 먹기 힘들 정도였다. ⓒ차노휘


먹구름을 뒤로 하고 나는 수용소를 나왔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더러운 행주를 입에 물고 있는 듯한 기분을 쉽사리 떨칠 수가 없었다. 박물관에서 본 사진이 비참한 이미지를 더 충동질했다. 

그것은 발가벗고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테레진에는 화형장이 없다). 살가죽만 남은 몸으로 벌거벗은 채 나무 침대에 누워 있거나 앉아있는 사람들. 성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도 야하다는 생각이 절대 들지 않는 깡마른 벌거벗은 몸들. 

그들의 눈에서 공포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죽음까지도 받아들인 초월한 듯한 눈빛. 붙어있는 목숨을 어쩌지 못하고 생을 이어갈 뿐이라고, 죽음의 고통조차 인지할 수 없을 만큼 매 순간 순간이 연속적인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죽음 자체가 오히려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 눈빛이 천진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그 눈빛’이 내 가슴을 아프게 쳤다.

내내 침울한 기분으로 테레진에서 1시 5분에 출발한다는 버스를 타고 프라하에 도착했다. 그리고 메트로를 타고 박물관A로 향했다. Cafedu에서 좀 더 생각을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내 우울이 웃음과 함께 터졌다. 지하철 입구 쪽에 서 있는 남자 목덜미에 앉아 있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새끼 고양이는 주인 목덜미에서 꼼지락꼼지락하며 아양을 떨고 있었다. 주인은 모른 척 했고 모른 척 한 것이 서운한 듯 그 녀석은 계속 앞발을 옷깃에 긁어대고 있었다. 그 모양이 하도 귀여워서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말했다. Look at that cat! 생전 처음 보는 여자였다. 여자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내리면서 그쪽으로 카메라를 대고 사진을 찍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야하는 나는 그 남자 쪽으로 가서 물었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그 남자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목덜미에 붙어 있는 고양이를 카메라에 담고 씩, 웃었다. 오늘 처음 웃는 웃음이었다. 번뜩 찰나의 생각이 스쳐갔다. 

악마가 도처에 있을 지라도 천사는 그보다 열 사람 정도 더 많다. 그리고 내 속의 천사는 상주하는 악마보다 딱, 백 명 더 많다. 도처에 있는 천사를 발견하여 웃을 수 있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나는 고양이 모습을 한 천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테레진 강제 수용소 주변 풍경. 여느 시골 풍경과 다름없다.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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