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묘미를 즐기는 그들만의 새벽

미니 슈퍼가 있는 밤거리. ⓒ차노휘


새벽 1시가 지나서 Cafedu를 찾은 것은 내 실수였다. 나는 그곳을 안 뒤로 숙소 휴게실에서 글 작업하는 횟수를 줄였다. 좀 더 분위기 좋은 곳을 선호하기 마련이고 휴게실보다는 Cafedu가 그런 면에서 월등했다.

플로렌스 출신 바바라의 빈자리가 알게 모르게 컸을 수도 있다. 그녀가 나간 뒤로 베트남 젊은 아가씨가 하룻밤 자고 갔고 빨간 머리 스페인 아가씨가 이틀 머물다 갔다. 지금은 침대가 비어 있다.

휴게실에서 낯선 얼굴을 보긴 했다. 어제는 키 작은 아일랜드 사람이, 오늘은 콧수염 긴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내일은 어떤 사람일지 모르지만 다른 국적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전처럼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아서 관심도 애정도 식어 갔다.

설거지통에 설거지거리가 늘 쌓여 있었다. 내가 사용한 그릇을 씻으면서 마저 다 설거지하기도 했다. 그 다음날 여전히 그릇이 나와 있었다. 누군가가 요행을 바라는지도 몰랐다. 누구라도 요리를 하고나면 깔끔하게 뒤처리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빵가루가 어지럽게 식탁에 널려 있기도 했다. 늦게까지 술 마시고 온 뒤 허겁지겁 간식을 챙겨먹고 곧장 자버린 흔적이었다.

오며가며 휴게실을 드나들던 내 눈에, 그래도 눈에 띄는 남자 두 명이 있었다. 외모보다도 장기간 같은 곳에 머물러서 자주 부딪치는 탓이리라.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새벽에 일어나서 커피 마시려고 휴게실에 나가보면 휴게실 한구석에 마련된 컴퓨터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까만색 비니를 쓰고 턱에 까만 수염을 기르고는 검정 가죽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불도 켜지 않은 휴게실. 어둠 속에 빛나는 모니터에 그의 얼굴만 환하게 드러났다.

헉! 한 발짝 뒤로 물러나야했다. 그는 밤낮이 바뀌었는지 내가 새벽에 휴게실로 나갈 때마다 있었다. 어떤 날은 소파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분명, 그도 이곳에서 숙박할 것이다. 주방과 인접한 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 다른 남자는 나이가 들어보였다. 그도 낡은 청바지에 항공점퍼를 걸쳤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 네덜란드 출신 마틴이라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해서 2,000km를 스페인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작은 키였지만 한눈에 봐도 ‘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틴 만큼이나(그는 오십이라고 했다)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도 야인 기질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눈매와 옷차림. 터프한 행동거지 등.

나이 든 남자한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짐을 몽땅 가지고 다녔다. 백팩을 매고 한 손에 가방을 들었다. 제법 튼튼한 비닐 쇼핑백이다. 그곳에도 짐이 잔뜩 들어있는지 볼록하다.

처음 그를 본 것은 휴게실이었다. 휴게실에는 벽에 부착된 히터가 두 개 있다. 어느 날 그곳에 가니 한쪽 히터 옆에 빨래가 잔뜩 널린 건조대가 있었다. 2유로를 주면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다. 빨래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한 듯했다.

빨래라는 것은 내밀한 것들이다. 겉옷도 있지만 속옷도 있다. 모양새는 다 살피지 않았지만 주로 아이보리색 천 제품이 많았다. 여하튼, 내밀한 그것들을 룸 히터 옆에서 말려도 되는데 굳이 휴게실까지 가지고 왔을까. 그 주인이 궁금했다.

새벽 4시가 지나자 나이든 야인 남자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멍하게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꿈쩍 않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를 검색했다. 나는 안쪽 벽에 붙은 소파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20분이나 지났을까. 야인인 그가 건조대에서 빨래를 걷어 개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가방에 넣었다. 등에 짊어진 가방이 불룩해졌다.

가방에 어찌나 정성들여 넣는지 나는 그가 퇴실하는 줄 알았다. 하룻밤 자고 가는 사람도 많고 세탁기가 있는 곳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가는 사람도 많았다. 퇴실하는 것처럼 볼록한 백팩과 비닐 가방을 들고 5시 되기 전에 나갔다.

하지만 삼십분 만에 다시 들어왔다. 그는 볼 때마다 볼록한 가방 두 개를 하나는 등에 짊어지고 하나는 손에 들고 다녔다. 일반적으로 손에 들고 다니는 가방은 룸에 보관하기 마련이다. 사물함도 잘 비치 되어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그의 전 재산인 양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이곳이 낯선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다들 손버릇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항상 주의를 하는 것이 옳지만 주의를 해도 어느 순간, 놓쳐버릴 때도 있다. 

며칠 전 샤워하면서 손목시계를 수건걸이 위에 놓아두었다. 그만 깜빡 잊고 하루가 지나서 찾았다.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야금야금 냉장고 속 음식물에 손을 대는 얄미운 사람은 있었다. 내 물도 우유도 양이 줄어만 갔다.
 

안개 낀 새벽 거리. ⓒ차노휘


다시 1시가 지나서 Cafedu로 간 이야기를 해야겠다. 불도 켜지 않은 휴게실에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는 것보다 환하며 쾌적한 그곳이 글 작업하기에 좋았다. 마무리지어야할 글이 있었다. 

아침에 프라하 근교에 있는 쿠트나호라에 갈 계획이었다. Cafedu에서 중앙역까지 걸어서 7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Cafedu는 24시간 문을 연다고 했다.

내가 나가는 시간은 누군가는 귀가하는 시간이었다. 조용한 골목인데도 술 마시며 고함을 내지르는 무리가 있었다. 아담한 칵테일 바도 발견했다. 다른 시간 때는 영업을 하지 않아 눈에 띄지 않는 위치였다. 

조명에 드러난 그곳은 앙증맞고 예뻐서 떠나기 전에 꼭 들러야겠다는 생각에 사진 한 장을 찍어두었다.

새벽 한시가 지난 시간. 골목골목마다 안개가 서려있었다. 가로등 빛까지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이곳에서 안개 낀 풍경을 처음 보았다. 셔터를 눌렀다. 트램도 멈춰있었다. 도로에 나 있는 트램 철선이 여유롭게 누워있었다.

안개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불쑥 나타났지만 놀라지 않았다. 그들 또한 안개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놀랄 수도 있으니깐. 그런데 왜 이곳 사람들은 검정색 옷만 입을까. 검정색이 잘 어울리긴 했지만 한결같이 검정색 옷차림이었다. 특히나 남자들은 전부.

커피 든 머그잔을 들고 처칠 동상이 있는 건물 정원을 지났다. 커피를 마시면서 Cafedu를 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중앙역이 내려다보이는 도로를 건너 보도블록을 따라 걸었다. 2.4km를 걸어 비즈니스센터 앞에 도착했다.

머그잔을 든 손은 얼어있었다. 얼른 들어가서 안개 낀 거리를 보며 노트북을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비즈니스 출입문 바깥쪽이 잠겨 있었다. 유리창 너머에는 트리가 있는 홀이 보이고 홀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그곳, 내가 들어갈 그곳은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옆에 초인종을 눌러도 문을 두드려 봐도 반응이 없었다. 문 위쪽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 양손을 저어 봐도 소용없었다. 24시간 경비를 설 것 같았던 경비 아저씨도 그 시간에 자는 듯했다. 다른 출입구가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없었다.

내가 들어갈 곳이 불만 켜있지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다. 내가 아침에 느긋하게 가도 제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그 시간에는 들어가는 것은 안 되지만 나가는 것만 가능한 듯했다. 솔직히 그 시간에 공부하러 간 사람이 이상할 법도 했다. 성탄절 다음날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안개를 헤치고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왕복 5Km를 걸었다. 옷이 땀으로 젖었다. 오늘은 휴게실에서 작업하고 기차 시간에 맞춰 나가기로 했다.
 

머그잔과 안개 낀 중앙역. ⓒ차노휘


휴게실로 들어섰다. 비니 쓴 남자가 컴퓨터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야인. 야인은 내가 늘 앉아있던 안쪽 소파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탁자에 뭔가(?)를 펼쳐놓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 뭔가(?)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20대 초반. 한참 화려하고 깔깔거렸던 그때, 내 외국인 친구들이 했던 그것. 탁자 위 종이, 종이 위 가루. 그 가루를 빨대로 콧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리화나. 이곳에서 마리화나가 불법인지 합법인지 모르겠다.

이 야심한 시간에 불쑥 여자 한 명이 끼어들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Cafedu에서 바람 맞고 온 곳이었다.

나는 모른 척 하며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켰다. 노트북을 켜고 전선을 연결하려고 하니 콘서트가 너무 멀리 있었다. 자리를 맞은편 쪽으로 옮겼다. 옮긴 자리는 야인과 불과 한 걸음 차이.

내가 야인이 차지하고 있는 소파에 앉았을 때 바바라가 늘 앉았던 자리로 내가 옮긴 거였다. 노트북을 켜면서 장비를 정리하고 있을 때 한 걸음 차이 나는 그곳에서 얕은 신음과 콧속으로 쏙쏙 넣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 신성한 새벽에. 비즈니스센터 출입문이 잠겨 이 광경을 목격한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님 cafedu에 들어가 정갈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이 잘한 일인지. 표면적으로는 후자가 더 괜찮겠지 싶지만 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탓할 필요는 없다. 변수의 묘미를 즐기면 되니깐.

이 불량한 새벽에, <새벽의 7인>을 주제로 글을 쓰려고 했던 나였다. 저 야인 때문에 글 주제가 바뀌었다. Mini Supermarket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멍가게 정도이다. 하지만 이곳 구멍가게는 나름 큰 역할을 한다.

이득도 상당할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창고형 대형마트가 거의 없다. 미니 마켓은 두 블록에 한두 군데 정도 있다. 주인은 어디나 동양인이다. 대부분 유럽에서 미니 마켓 주인은 중국인이었다. 

중국인 슈퍼에 들어가면 쌀이나 고추장, 신라면 등 한국사람 입맛에 맞는 것들이 꽤 있다. 큰 도시에 도착하면 중국인 슈퍼를 꼭 검색한 이유였다.

이곳 숙소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제일 가까운 슈퍼를 찾았다. 운 좋게 동양인이 운영하는 미니 슈퍼. 그것도 라면을 파는 슈퍼가 도로 건너편에 있어서 좋았다. 진열대 첫인상은 어수선하지만 술부터 통조림, 과일 등 조금 조금씩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카운터 안쪽에 화장기 없고 밋밋한 콧등을 가진 동양인 아줌마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베트남 사람이었다. 중국 사람이 아니라 베트남 사람이라는 것이 조금 생소했다. 베트남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질문에 답하기 전에 체코에 관한 전반적인 상황을 짚어 보면서 이야기해도 좋겠다.
 

미니 슈퍼 진열장. ⓒ차노휘


앞서 말했다시피 체코는 360년간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와 달리, 이들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다. 지금도 같은 행정 정책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이웃 하고 있는 나라, 과거에 도움을 받은 나라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간 문화재 약탈 등은 상당하다. 프라하 도시 외형은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건물, 즉 오스트리아가 번성시킨 바로크 양식 건물이 많다. 하지만 건물 안 부속물이 없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상징이었던 왕관, 그들이 사용했던 가구, 식기 세트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들고 갈 수 없는 건축물은 놔두고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가지고 갔다. 하지만 체코 사람들은 무리해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는 독일과 러시아(구소련)이다. 독일은 뮌헨협정으로 1939년부터 2차 세계대전 후반, 구소련에 해방되기 전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테레진 유태인 강제수용소 등 해악(害惡)을 끼친 것을 놔두고라도 독일이 이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또 있다. 종교다.

종교탄압이 심했다. 비난이 두려워선지 독일은 체코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경계했다. 체코는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영향으로 90% 이상이 로마 가톨릭이었다. 탄압 결과 현재 무교가 40% 이상이다.

그 다음이 로마 가톨릭, 신교, 이슬람교 순이다. 신교는 한국의 개신교를 말하지 않는다. 독일이 루터 파를 따라간다면 체코는 얀 후스 파이다.

얀 후스(Jan Hus ; 1372년~1415년)는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가이다. 루터보다 100년 먼저 종교개혁과 양성평등을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여 화형에 처해졌지만 그의 사상은 널리 퍼졌다. 루터도 얀 후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이다. 현재 구도심지 광장에 얀 후스 동상이 있다.
 

구도심지에 있는 얀 후스 동상. ⓒ차노휘


종교까지 빼앗은 독일을 이들이 좋아할 리는 없다. 하지만 독일은 꾸준히 경제력을 키워서 주변국으로서는 무시 못 할 존재가 되어 있다. 독일보다 더 사이가 좋지 않는 나라는 러시아다. 러시아말만 들어도 표정을 찡그릴 정도라 한다.

‘프라하의 봄’ 등 형제 국가를 자청했으면서도 모든 이권을 챙기고 학살까지 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과 러시아에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온다. 근접 국가니깐 당연하다. 러시아는 예전에 자신의 나라였다는 자부심으로 온다고도 한다.

자유국가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체코. 엔틱 건물로 명품 도시라 해도 손색없는 프라하. 그렇다면 이들의 주산업은 관광일까? 이 질문에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이다. 관광산업은 세 번째 산업에 속한다.

관광 산업 다음으로 비중이 큰 산업은 농업이다. 논농사가 아니라 밭농사이다. 체코는 0.1%도 바다를 끼고 있지 않다. 물이 많이 필요한 논농사는 지을 수 없다. 쌀을 주식으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 부족 국가이다.

밭농사는 1년에 3모작이 가능하다. 제일 먼저 심는 작물은 유채이다. 봄이 되면 국토 5분의 3이 노랗게 물든다. 체코 영토를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제주도와 울릉도 등 섬을 다 뺀 남한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 70%가 산지라면 체코는 평지가 70%이다. 봄이 되면 온통 국토가 노랗게 물든다. 비가 오면 노란빛은 광택이 난다. 오죽하면 대한항공 기장이 체코에 착륙하면 눈이 아프다고 말할 정도일까. 그렇게 아름답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유채를 거두면 밀, 보리, 감자 등을 심는다. 밀, 보리, 감자는 이곳 사람들의 주식이다. 옥수수는 가루로 빻아서 빵을 만들거나 겨울철 짐승들의 사료로 사용한다. 제일 마지막으로 심는 것은 해바라기이다. 유채와 해바라기로는 카놀라유라는 기름을 만든다.

이 모든 작물과 기름은 수출한다. 이렇게 3모작이 가능한 것은 일조량이 풍부해서이다. 겨울에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저무는 것과 달리 여름에는 밤 열시나 되어야 해가 진다.

체코의 제일 큰 경제적 기반은 공업이다. 특히 스코다(SKODA)라는 자국브랜드를 생산하는 자동차 산업이 발전했다. 우리나라 대우가 스코다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우리 기술력이 좋아 얼마 못 가서 체코를 따라잡았지만 여전히 스코다 차는 내구성과 연비가 좋다.

다만 외관이 세련되지 못해서 인기가 없다. 도시를 누비는 트램도 순수한 체코 기술력으로 생산한다. 여기에 더해 체코를 끌고 가는 비밀 무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무기 산업이다. 기관총, 권총, 탱크와 장갑차 등을 만든다. 그 수익이 만만치 않다.

체코는 일찍이 북한과 베트남으로 무기 수출을 했다. 우리나라(김영삼) 보다 북한(김일성)과 수교를 먼저 맺었다. 현재는 남북 모두와 수교를 맺고 있다. 베트남에 무기를 수출할 때, 베트남 노동자들이 체코로 오게 된다.

일종의 맞교환이었다, 무기를 수입할 테니 우리나라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라, 는 것이 베트남의 제안이었고, 체코 입장에서는 자국민 보다 싼 인력이라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반전이 일어난다. 베트남 노동자들은 가진 것이 없어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무서울 것이 없었다. 무기 제조업에 근무하는 이점을 살려 손쉽게 무기를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노동자들 일부가 ‘갱’을 형성했다. 상권이 따로 있을 정도로 세력이 굉장히 커졌다. 유일하게 체코에 차이나타운이 없는 이유도 베트남 사람들이 텃세를 부린 결과였다. 공산국가가 끝났을 때 이들은 본국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이곳에 터를 잡아서 굳이 손해 볼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체코도 이들을 강제로 내쫓지 않았다. 이런 현상까지도 받아들이는 게 체코인의 성향이었다.
 

환전 가게가 있는 거리. ⓒ차노휘


베트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권 중 하나가 미니 슈퍼마켓이다. 미니 슈퍼마켓 주인은 거의 다 베트남 사람들이다. Cafedu와 숙소의 거리는 2.4km이다. 나는 주로 주택가 골목으로 걸어 다니는데 거의 두 블록마다 하나의 미니슈퍼마켓이 있다.

오며가며 본 것만도 열 군데 이상이다. 내가 프라하를 걸어 다니면서 본 것 중에 제일 빈번한 간판은 미니 슈퍼마켓과 CHANGE라는 환전 가게이다. 환전 가게는 수수료가 천차만별이라 아무 데서나 환전하면 안 된다.

여하튼, 나는 주로 숙소 앞 슈퍼에서 물건을 산다. 특히나 무게가 나가는 음료수 등은 꼭 그곳에서 산다. 하지만 과일 등은 가다가 싱싱하다 싶으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산다. 어김없이 미니 슈퍼 주인은 베트남 사람이다. 여자든 남자든,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간에.

처음 숙소 앞 미니 슈퍼마켓에 갔을 때 주인아주머니 표정은 그야말로 책걸상이었다. 나무판자처럼 표정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내가 관계를 맺는 사람 외에는 남의 인상에 그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고른 물건 값만 치르고 나왔다.

누군가가 심하게 나를 아는 체 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 불편하다. 그래선지 슈퍼 주인아주머니 표정은 내게 더 편했다.

처음에는 돈 감각이 없어서 지폐를 내놓았다. 동전을 구별할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영수증에 적힌 숫자 끝, 그러니깐 동전으로 깔끔하게 계산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활짝 웃는 모양이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을까. 베트남 주인아주머니도 살짝 웃었다. 비닐봉지를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봉지에 물건을 넣어준다. 처음에는 물건을 여러 종류 사도 봉지가 필요하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무표정 속의 표정. 공산국가에 살았던 사람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말랑말랑한 속살을 들켜서는 안 되는 사회. 베트남 주인아주머니를 빗대서 한 말이지만 체코 사람들도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나이든 분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들은 익혔을 것이다. 오랫동안 강대국 사이에서 처신하는 법을. 무표정뿐만 아니라 성격이 ‘유’해서 이러저러한 상황을 빨리 받아들여서 현실화 해버리는 자세 등도. 강대국 사이에 있는 국가, 즉 유럽의 심장에 위치한 지리적 영향은 그 나라의 국민성뿐만 아니라 근대에 무기제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생산해서 운반하는 데에 최적의 장소였으니깐. 이런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외교 능력과 연결되지 않았을까.

콧속으로 쏙쏙, 가루를 집어넣던 남자가 5분 조용하게 있다가 일어난다. 그 새벽에도 볼록한 가방 두 개를 발 아래에 둔 상태다. 가방 하나는 매고 하나는 들고 밖으로 나간다. 젊은 남자는 컴퓨터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나는 중간 탁자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밖에 나갔던 그 야인이 들어와 이제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젊은 그와 나이든 그는 동행이 아니다. 룸이 따로 있다. 하지만 수컷들의 본능적 서열다툼으로 서열이 정해진 듯했다. 금방 젊은 남자가 나이든 남자한테 자리를 양보하고 커피를 끓인다.

따닥, 따닥, 키보드 누르는 소리. 씩, 씩, 물 끓는 소리가 휴게실 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내 머릿속을 비워낸다. 사람들을 내 잣대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여행지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치기 마련이다. 다들 제 철학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여행자’이다. 여기에서 나는 ‘나’를 책임지면 된다.

나는 무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한다. 강대국 사이의 체코랄까. 그렇다고 기가 꺾일 내가 아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새벽의 7인>에서 베트남의 미니 슈퍼마켓이라는 주제의 글을 마무리한다. 변수의 묘미를 즐기면서 말이다.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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