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달리 영화적 서사에서는 관찰자의 시점이 기본이다.

펜으로 인물의 내면을 묘사할 수는 있어도 카메라로 그곳을 비출 수는 없다.

주연이든 단역이든 렌즈 앞의 피사체이기는 마찬가지다.

ⓒ아트하우스 모모
ⓒ아트하우스 모모

그런 점에서 <여기는 아미코>가 지향하는 시점은 독특하다.

영화는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주인공 아미코와 그 가족이 겪는 비극을 다룬다.

강박행동, 문해력 결여 등 아미코에게서 보이는 특징들로부터 발달장애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영화와 원작이 되는 소설은 그를 병리적인 존재로 규정하지 않는다.

영화는 아미코를 관찰하는 대신 그가 관찰하는 세계를 향해 카메라를 비추는, 시점의 전회를 통해 아미코의 결핍과 소외를 드러낸다.

그렇게 재현된 세계는 아미코의 유아적(幼兒的) 감각과 환상이 투영된 세계이자 그 바깥에 실재하는 타인의 고통, 갈등이 틈입하지 못하는 유아적(唯我的) 세계이기도 하다.

동생을 유산한 새엄마가 우울증에 걸리고, 사춘기에 접어든 오빠 코타가 폭주족이 되고, 짝사랑 노리가 돌연히 마음을 닫아도 아미코는 자기 바깥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심경 변화를 헤아리지 못한다.

“오빠는 갑자기 불량스러워졌다. 그 이전과 이후가 있을 뿐, 아미코는 중간을 떠올릴 수가 없다. (중략) 오빠가 그렇게 된 것처럼 어머니도 갑자기 의욕을 잃었다.” (이마무라 나스코, 『여기는 아미코』, p.38)

아미코의 천진난만한 세계는 그가 떠올리지 못하는 이 ‘중간’의 세계와 영화 내내 크고 작은 불화를 일으킨다.

위로의 선물로 만든 동생의 위패는 의붓자녀에 대한 새삼스러운 모정으로 상실감을 극복해보려는 새엄마를 도로 주저앉히는 악의적인 장난이 되고, 죽은 동생의 유령을 피해 아버지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그럴수록 둘의 관계는 더 틀어진다.

노리를 향한 끈덕진 애정의 대가로 돌아온 것도 결국 주먹질 뿐이었다.

이렇듯 또래, 가족에서의 폭력과 배제를 고스란히 겪고도 아미코는 무방비한 채로 자신만의 세계 안에 꿋꿋이 머무는데, 이 속절없는 순수함이 <여기는 아미코>가 그리는 비극의 핵심이다.

ⓒ아트하우스 모모
ⓒ아트하우스 모모

<여기는 아미코>는 발달장애 아동에 대한 평면적 이해에서 벗어나 영화적 풍경으로 외화된 그의 내면을 응시하도록 관객의 경험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연출의 힘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경험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고백해야 하겠다.

다시 말해 피사체와 렌즈 사이의 끝내 좁힐 수 없는 거리에 대해, 그럼에도 내가 마주한 대상을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의 얄팍함에 대해.

관객의 대부분은 나와 같은 보통의 어른들이고, 아미코의 세계를 상상할 때 환기되는 우리의 동심과 유년의 경험도 사실은 예사로운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할수록 영화의 제한된 시점이 곧 우리 인식의 한계가 되고, 그러면 이번에는 아미코가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이 평면화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무정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노리, 험상궂은 오빠, 퉁명스럽고 무책임한 부모까지.

그러나 아미코의 눈에 비친 이들의 모습이 그들 각자의 전부일 리 없으며, 영화가 착목한 현실의 전부일 리는 더더욱 없다.

영화에서 정교하게 소거된 아미코의 시점 너머, 그러니까 시퀀스 사이의 빈틈과 프레임 바깥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기를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 너머는 짝 잃은 무전기 앞에서 아미코가 하염없는 신호를 보낼 때 그 부름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속한 곳이다.  

더 나아가서는 영화 밖에 실존하는 당사자들과 그 주위를 빼곡히 둘러싼 우리(어른)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도 한때 아미코였다.'는 식의 소박한 공감보다 '우리가 지금 아미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하는 자문이 우리에게는 더 적실한 것일지 모른다. 

섣부른 공감이나 피상적인 연민은 편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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