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현장] 몸으로 새긴 역사의 기록
[촛불 현장] 몸으로 새긴 역사의 기록
  • 조성국 시인 <광주전남작가회의 사무국장>
  • 승인 2017.01.0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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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광주 금남로 촛불시민항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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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칠백 대의 버스가 서울 광화문으로 상경했다. 마을과 마을과 마을들이, 고을과 고을들이 관광버스 대절해 놀러 가듯 올라갔다.

무너진 국격을 다시 세워놓으려고 가는데, 참여자 수가 적은 마을은 조금 쪽팔려하면서 마을과 마을의 대소사나 애경사를 귀담아 들으며, 삶은 계란 또는 김밥을 나눠먹으며 왁자지껄 올라갔다.(쳐들어갔어야 했다.

ⓒ광주인

전남 해남의 ‘전봉준투쟁단’ 서군이 수십여 대의 대형 트랙터를 몰고 간 듯이 ‘연장’을 챙겨가야 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 인파로 때문에 서울길이 막힌 걸로 예견하고 전날부터 미리 올라간 사람들도 꽤 있어보였다.

그리하여 광주가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촐하게나마 벌어진 촛불 집회의 참여자 수가 지극히 저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견은 보기 좋게 빚나갔다. 금남로 알라딘 서점 앞에서 시작한 촛불집회는 급속도로 불어나는 시민들 때문에 재게 근동의 5•18민주광장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이즈음 5•18민주광장에선 광주민족예술총연합회가 기획한 ‘민족예술제’가 빚어지고 있었는데, 아니, 기획했다고 보기보다는 매년 ‘민족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진행해오던 행사가 ‘민중총궐기’대회(2016년 11월 12일)와 연동해 진행하는 것이어서 한편으론 색다른 공연집회가 될 거라고 기대도 했다. 그러나 행사의 서두부터가 왠지 어설퍼보였다.

미뤄 진작컨대 관객 동원이(100여 명 정도의 의자가 깔렸다) 마땅치 않은 ‘민족예술제’ 측에서는 ‘민중총궐기’대회에 탑승하지 못한, 여타의 사정으로 인해 상경하지 못한 시민들과 함께 어울리듯 관중석을 채워 행사를 치러보자는 속셈이 다분히 깔려 있는 듯 했다.

ⓒ광주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가를 탄압하는 정치검열을 중단 하라’는 명분도 좋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예술인들을 탄압한 것도 박근혜와 최순실 일당이 저질렀던 일이라서 충분히 설득력도 있어 보였지만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금남로 알리딘 서점 앞에서 밀려간 거대한 인파가 밀물 치듯 갑자기 들이닥쳤다고 해야 말이 맞겠다.)시민들은 여기저기에서 술렁거렸고, 우렁우렁 고함도 치기 시작했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사악한 추구에 이용당했다’는 것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미치겠는데, 시낭송이나 마당극이나 노래 나부랭이를 점잖게 앉아 귀담아 들을 여력이 추호도 없다는 뜻이었다. 귀담기는커녕 외려 이맛살만 잔뜩 찌푸렸다.

‘민족예술제’ 또한 이 분노의 여파를 감당치 못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써 십여 분에 걸쳐 떠듬떠듬 고천문도 읽고 전통춤을 추다 말고, 진행 방향을 확 바꾸었다. 나름대로 전문예술인이 모여 열심히 준비한 공연이라고 한들, 울분에 찬 시민들한텐 어디 가당키나 했겠는가.

급기야는 관중석의 시민들이 좌석을 박차고 일어서고서야, 예정된 문화공연 대신 ‘시민자유발언대로’ 급선회시켰다.

ⓒ광주인

칠천여명의 시민이 한 순간에 우르르 몰려든 거대한 분노의 명령에 따라 진행되는 자유발언은 한결같았다. ‘박근혜 하야 또는 퇴진’이 전부이었다.

특히 앳된 학생들의 언변이 뛰어났다. 위트가 넘친다. “마트의 일 프러스 일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대통령까지 일 플러스 일일 줄 몰랐다. 최순실은 역대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국민대통합을 이루었다.” “이럴라고 대통령했나 하는데, 이럴려고 공부했나 싶어, 자괴감이 든다.

또 요즘 초등학교에서 유행하는 놀이가 있는데, 최순실 게임이라고 하는 이 놀이는 연설문을 서로 고쳐주는 게임”이라며 거침이 없었다.

계획성 있게 준비된 집회가 아니었지만, 종이컵 두른 촛불이나 피켓도 턱도 없이 부족했지만, 자발적으로 필기한 피켓을 들기도 하고, 핸드폰 손전등 기능을 이용해 촛불을 켜기도 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열창하며 생각하건데, 광주는 80년 5월 내내 몸에 새겨두었던 분노와 항쟁의 대서사시를 다시 꺼내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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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명제를 따라가 보면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경악할만한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참담한 슬픔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1980년 5월 광주가 그랬다. “무등산이 얼굴을 가려 버리고 영산강은 호흡을 멈춰 버렸다.”(조진태 강의록, 「문화예술로 읽는 미시적 오월의 역사」, ‘분노’ 편) 인간의 존재로서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었다. ‘타인’은 바로 이웃이고 친구이자 형제였으며 자매였다.

그런데 그 ‘타인’이 받고 있는 ‘해악’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해악’이었다. 국민의 군대가 그것도 최전방에 투입되어야할 공수부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곤봉과 착검한 총으로 구타하고 찌르고 질질 끌고 가 마치 쓰레기자루 던지듯 차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 그것은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주인

가공할 폭력만행에 할 수 없이 현장을 도망치고 어딘가에 숨어버렸지만 인간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던 수치심은 자신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다.

인간의 또 다른 감정인 수치심은 분노와 교직되면서 저항으로 나서게 하였다. 대답은 간단하다.

“너희들의 눈이 눈이고/ 너희들의 머리가 머리일 때/ 우리들의 눈은 눈까리였고/ 우리들의 머리는 대가리였다/ 그리하여 너희들이 사람일 때/ 우리는 짐승이었다/ 짐승처럼 쫓기다 쫓기다 돌아보니 살기 흐르는 충혈된 눈빛/ 핏자국, 피 냄새를 따라 킁킁거리며 달려오는 무리들/ 바로 너희들이 짐승이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간단하다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피의 값은 외상이 없다!
(이원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중에서)

시적인 진술은 매우 격정적이다. 하지만 형상화된 분노의 감정은 80년 5월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광주 시민의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피 냄새를 쫓아다니며 학살을 자행하는 짐승의 무리에 맞서는 것에 대한 답은 간단한 것이다.

슬픔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키지 위한 ‘광주’의 행동은 분노의 표현이다. 분노는 광주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유지하도록 할 것이며 더 이상 인간 이하로 취급당하지 않을 저항의 모습을 취하게 한다.

그것은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를 간단하게, 매우 간단하게 재현하고 있고, 그 재현 하는 방법 또한 광주는 익히 알고 있었다. 80년 5월을 겪은 광주는 분노와 저항을 뼛속까지 뼈저리게 각인해 두었음으로.

5•18민주광장 원형분수대 위에서 타오르는 횃불(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밤에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에워싸고 열렸던 ‘민주화 대성회’를 연상케 했다.)의 매캐한 연기 냄새를 반갑게 들이마시며 몸이 시킨대로 ‘광주 출정가’도 저절로 따라 불러댔다.

ⓒ광주인

분노에 사무친 몸이 총을 들었던 항쟁의 손짓과 노래를 기억해 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36년 하고도 열한 달이 더 지난 2016년 11월 19일 밤, 금남로(약 삼키로 미터 길이의 왕복 6차선 대로이다. 역사와 만났을 때 6차선 도로는 비로소 금남로가 된다.

80년 5월 광주시민 80만중 30만 명이 매일 이 도로에 나왔고, 매일 도로가 끝난 분수대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와 분수대가 있는 가두의 5•18민주광장으로 돌아온 무수한 익명의 시민들의 몸속에서 분노와 저항이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노동자 풍물패를 앞세우고 ‘10만 광주시민’이 오는 금남로 길을 경찰들이 나래비 선 채 자동차를 막고 열어주었다. 그저 분노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할 만치 정당한 관용이 작동하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다만 정당들만, 광주가 열어 제친 금남로 한켠에서 패거리를 짓고서는, 정치적 잣대로 지들이 잘났다 읊어대니, 볼썽사납다. 당원들 말고는 누구 하나 귀를 열거나, 쳐다보지도 않은 채 횅하니 지나쳐갔다.

ⓒ광주인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촛불을 켜고, 똑같은 보폭을 내딛으며 내뿜는 숨소리와 육친적 정감의 체온이 만들어낸 동질의 연대감. 그리고 몸속 깊숙이 체화된, 도청을 점령하던 광주의 1980년 5월 20일과 다음날인 21일까지, 양 이틀 동안 빚어진, 순간적이었던 ‘절대 공동체’라는 충만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돌이켜보면 “그곳에는 사유재산도 없었고, 목숨도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고 시간 또한 흐르지 않았다. 그곳에는 중생의 모든 분별심이 사라지고 개인들은 융합되어 하나로 존재했고 공포와 환희가 하나로 얼크러졌다.

그곳은 말세의 환란이었고 동시에 인간의 감정과 이성이 새로 태어나는 태초의 혼미였다. 그런 곳은 실제로 이 땅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최정원, 「오월의 사회과학」, 123쪽, 오월의 봄, 2012)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획득하고 계급이 없고 죽음의 공포도 없는 시간과 공간, 어떤 희귀한 열정이 있어 일단 그것이 주체를 장악하고 나면 그 어떤 세속적 감각과 번뇌도 사라지게 하는 시간과 공간, 그 ‘신기루 같은 날’을 체화해 버린 광주가 금남로와 5•18민주광장에 다시 모여 촛불을 켰다면, 혼자가 아니고 우리와 뜻을 같이 한, 같은 구호를 외치며 같은 노래에 같은 몸짓을 발동하는,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힘이 솟는 저항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다만 총 대신, 독재 타도를 외치던 화염병 대신,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단결투쟁’이란 날선 한목소리 대신, 평화로, 조롱 섞인 풍자와 위트로, 개성 없이 한결같아서 다름이 없는 것에서 여러 가지의 양상으로 모양만 바꾸었을 뿐이었다.

ⓒ광주인

저항의 선두에는 항상 예쁘장한 아이들이 있었다. 무대에 올라가 자유발언을 하는 시민들 중 절대다수가 청소년들이었다. 수능 끝난 고교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다섯 살 된 동생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가 애써 써온 문장들을 또박또박 읽고 내려오는 초등학생이 있기도 했다.

어떤 남학생은 “정부 여당에 새누리당이 아니고, 우리도 모르는 당이” 있다며 바로 그 당이 “무당”이라 하였고, “닭대가리도 대통령을 하는데 개돼지가 대통령을 못하란 법이 없다”고 하였고, 또 어떤 여학생은 “여러분! 그네는 스스로 못 움직이죠? 바람이 순실순실 불면 된다고” 풍자를 해서, 오죽했으면 진행하던 사회자가 ‘박근혜가 청소년들의 논술을 완벽하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시민은 이걸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부끄러운 마음에 시민들이 주민등록증을 모두 모아 반납해 정부에 불복종하는 마음을 표현”한다는 듯이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써진 ‘박근혜 퇴진’ 손피켓을 불끈 치켜 올리기도 하지만, 단상에 올라온 5대 종단, 불교, 천주교, 기독교, 천도교, 원불교, 종교인들 또는 정당인들이 카랑카랑 시국선언도 하지만, 광주시장도, 교육감도, 광주까지 내려온 이재명 성남시장도 “광주시민이 자랑스럽다”며 “함께 싸우자”고 소신 발언을 해서 박수갈채를 받기도 하지만 광장의 청소년들은 촛불집회를 마치 축제의 놀이처럼 한껏 즐겼다.

ⓒ광주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 답답하던 교실에서 벗어나듯. 낙오할까 두려워 한 뼘 독서실 칸막이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온갖 스펙을 쌓겠다고 발버둥치던 습속에서 벗어나듯.

세월호처럼 침몰하는 나라의 박근혜나 최순실, 또는 정유라, 우병우 같은 사람들 앞에서 ‘노력’이 부질없음을 알았다는 듯이 셀카를 찍어 어디론가 전송을 했다.

휴대폰의 5인치 화면을 통해 광장에 모인 시민의 규모와 열기를 새삼 확인하고, 이 역사적인 ‘민주주의 학습장’에 나와 있는 제 모습들을 찍어, 기억으로 몸에 새기거나, 친구와 친지들에게 전송하기도 하는 것을 보며 마치 촛불이 횃불이 되고, 횃불이 들불이 되어 퍼져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광장의 저항이 휴대폰에 들어오고 휴대폰을 통해 저항의 광장을 확산시키는 이것은 밤 소풍 나오듯이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이를 중심에 두고 기념하는 젊은 부부의 셀카에서, 고갤 좌로 비틀며 얼굴에 오만상을 찡그린 채 전동 휠체어를 탄 뇌변병증 환자의 셀카에서,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팻말을 한 손에 들고 또 한 손으로는 강아지를 품에 안은 중년여성의 셀카에서, 팔짱을 꼭 낀 연인들의 셀카에서, 같은 직장 동료인 듯한 사람들끼리 어깨 겯고 해맑은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는 셀카에서 광주는 이미 역사적인 날의 광장에 넘실대는 ‘박근혜 퇴진’을 온몸으로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

“박근혜 체포” “박근혜 구속” 등의 구호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피의자’로 확인된 박근혜가 검찰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 내용을 ‘사상누각’이라고 헐뜯으며 검찰 수사를 거부한 모습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수사도 거부한 박근혜의 행태에, ‘퇴진’, ‘하야’를 넘어 '박근혜 체포' ‘박근혜 구속’이라는 피켓과 함성이 일었다. ‘박근혜 체포’란 말에 새삼, 광주 5월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을 체포하러 가던 결사대가 상기된다.

ⓒ광주인

수십 명씩 조를 편성해 결성한 ‘체포결사대’가 서울 연희동에 쳐들어가고, 학살자가 기거한 강원도 백담사에까지 쳐들어가던 기억이 났다. 법이 처벌하지 못하면 우리가 한다는 명제가 뚜렷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슬부슬 겨울비가 내린다.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쓴 채 종이컵 두른 촛불을 들고 차가운 아스팔트에 여기저기 앉아있던 깃발들이 가만히 흔들거렸다. ‘바람 불면 꺼진다는 촛불’의 열기가 뜨겁다.

(촛)불은 추울수록, 추워질수록 더 강렬하게 타오르는 모양이다. ‘아리랑 목동’을 개사한 ‘하야송’이 나올 때마다 어깰 들썩, 들썩거리며 촛불을 흔들며 함께 넘실댔다. 아주 크게 ‘박근혜 체포’와 ‘우리가 주인이다’ 문구가 적힌 대형 펼침막이 헹가래치듯 촛불 위로 띄워지며 파도쳐갔다.

ⓒ광주인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가 양쪽으로 도래한 금남로 1가에서 금남로 5가까지, 아니 광주 전역을 쭈욱 밀물처럼 밀려갔다 썰물처럼 쓸려왔다. 긴 줄에 큰 양파망 다섯 개를 달아 맨 주머니가 쓸려간다.

집회 비용 시민모금함이다. 비가 내려 불편할 만도 한데, 주머니를 뒤져 정성껏 성금을 넣는 손들이 많았다. 저걸로 깔판과 촛불과 오늘의 비옷도 마련했으리라.

밀물처럼, 썰물처럼 80년 5월 가족을 잃은 오월 어머니의 소나무합창단들에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도 청아하게 밀려가고, 80년 5월 27일 새벽 옛 전남도청에서 고교생 시민군으로 최후 항쟁을 하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고 문재학 군의 어머니의 이런 다짐도 쓸려갔다.

“박근혜 정부가 옛 전남도청의 흔적마저 지우고 있어 81일 동안 농성 중”이라며 “우리 오월 어머니들도 함께 나서서 박근혜를 꼭 끌어내리겠습니다”라는 목소리에 화답한 박수소리도 밀려왔다. “기성세대로서 ‘흙수저’밖에 물려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도, 금도, 은도 땅속에 묻혀 있다. 그러니 흙수저가 주인이다. 젊은이들이 절망하지 말도록 박근혜를 하야시켜야 한다”고 발언한 중년의 사내도, 최순실 게이트를 풍자하듯 “엄마가 말은 못 사주지만 바른 세상 만들자”고 목청을 높인 비정규직의 노동자의 외침도 밀려가고.

노란 세월호 우산을 받쳐 든 사회자가 “박근혜를” 선창을 하면, 시민들은 “감옥으로”, “땅속으로”, “지 애비 곁으로” 자유롭게 후창으로 화답하는, 짧고 극명한 자유발언도 길게 밀려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들도 “직권남용죄는 형량 법정상한이 5년이고 집행유예가 가능하지만 뇌물죄는 1억 원 이상이면 특별법에 따라 무기징역까지 처벌할 수 있고, 뇌물의 5배를 벌금으로 매길 수 있다.

ⓒ광주인

검찰은 대통령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가 아니라 포괄적 뇌물혐의에 대해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한, “그가 대통령의 신분을 벗는 순간 뇌물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지적한 발언에, 시민들은 “와~”하는 함성도 함께 밀려갔다. 그야말로 금남로는, 세상을 바꿔야 할 때면 광주의 눈[眼]이었고, 바다였다.

다행히 겨울비가 그쳤다. 저녁 8시 30분경, 저녁이 다 되어서 ‘박근혜 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광주의 모든 시민사회단체가 거의 다 모였다.)가 주관한 진행 순서대로 ‘촛불 대행진’이 시작됐다. 집회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거리행진이다. 평소에 자동차만 다니던 대로를 당당하게 걸으며 자기주장을 말한다.

유독 ‘우리 아이들이 명령한다. 박근혜 체포, 박근혜 구속’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세월호 3년 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 17개 마을’의 촛불이 눈에 뛴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는, 그 기억 안에 오래 머물고자하는 바람이 서려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행진은 분명 분노에 따른 저항의 행진인데도, 표정이 밝았다. 어린 자식을 고개에 얹혀 무등태우고 가는, 운동화 끈을 질끈 맨 발걸음은 경쾌했다.

금남로를 따라 걷는 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금남로3가를 출발해 충장로, 광주천변로를 거쳐 금남로 5가 사거리 코스를 따라 ‘왼쪽 길’을 걷는다. 누군가 “박근혜를~”하고 선창을 하면, “처벌하라”라고 뒷소리를 달곤 했다.

ⓒ광주인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한, 엄마의 유모차에 실린 아이로부터 백발성성한 어르신들까지 함께 걸어갔다. 해맑은 얼굴의 중고생들이 신나게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린다. 또 누군가 “이제 그만, 말 좀 들어라~”라고 외치자, 함께 걷던 이들이 “와~”하고 웃었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에 수치심을 느꼈던 시민들은 구호로 이를 조롱했다. 그리고 “처벌”을 요구했다.

비단 처벌은 박근혜 처벌만이 아닐 거다. 동시에 박근혜의 충복으로 권력에 기생해온 새누리당이나, 국민들을 무한히 착취하고 탄압하고 억압했던 것들, 이런 저런 권력의 부패와 전횡을 견제하지 못한 무능한 것들에 대한 질책도 끼어 있을 거다.

광주천에 이르러서는 ‘아리랑’을 부른다. 꽹과리가 장단을 맞춘다. “수치심과 분노감이 커서” 초등생아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3주째 촛불 집회에 나왔다”는 이제 마흔이 갓 넘은 듯한 중년의 여자가 아리랑을 따라 부른다. 광주시민치고 아니 대한민국국민치고 누구 하나 자발적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광주일고를 지나고 금남로5가에 들어서니 ‘오른쪽’길로 돌았던 촛불대열이 보였다. 서로 박수를 친다. 그들은 금남로3가를 출발해 한미쇼핑 네거리, 대인교차로를 지나 금남로5가까지 각각 행진하여 금남로1가 집회 장소로 되돌아오는 중이었다.

ⓒ광주인

화물차 연단에서 “내려와라, 당장”하는 ‘하야송’이 들린다. 귀에 익은 ‘훌라송’도 들려온다. 80년 5월 광주가 “전두환이 물러나라, 물러나라~ 좋다 좋다”하던 이 ‘훌라송’가사가 “박근혜는 퇴진하라~ 좋다 좋다”로 바뀌었다.

두 갈래 길을 에돌아서 금남로로 들어선 시민들은 좌우로 나눠 구호를 외친다. 왼쪽 대열에서 “박근혜를~”하고 운을 띄우면, 오른쪽 대열에서 “처단하라”고 외쳤다. 천만 번을 외쳐도 지겹지가 않는 함성이다.

멀리 5•18민주성지 1호인 옛 전남도청이 보인다. 80년 5월 시민군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사수했던 광주의 상징공간이다. 그 때의 광주는 고립무원의 광주였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전체다.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없이 한평생 싸우’자는 이 금남로 대열의 행진곡처럼 ‘오월의 광주’가, ‘혁명의 광주’가, 영원한 청춘의 도시’가 힘차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며 자랑스러웠다.
 

** 조성국 시인은 광주 염주마을 출생. 1990년 <창작과 비평>봄호에 ‘수배일기’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2015년 <문학 동네>여름호에 동시 ‘구멍 집’외 1편을 발표하며 동시도 씀. 시집으로 <슬그머니> <둥근 진동> 동시집 <구멍 집>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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