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희 부모님의 뜻을 새기며

재단 설립 경과

1991년 당시 박승희열사는 전남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해 4월 29일, 앞서 쇠파이프에 사망한 강경대 학생의 죽음에 분노한 박승희는 오후 3시경 전남대학교 교정에서 “미국 반대” “민족 단결” “공안통치 반대” 을 외치며 분신하였고 전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1일간의 투병 끝에 5월 19일 낮 12시 35분 영면하였다.

우리는 박승희를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이라고 이름했다.

박승희의 분신은 젊은이들에게 경종이 되어 그해 봄 10명의 학생이 분신의 대열에 합류하였던바 역사는 1991년을 [분신정국]이라고 규정한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정부는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산화한 청연 학생들과 피해를 입은 인사들을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지정하였는데 박승희도 2006년 민주열사로 인정받았고 부모님은 약 1억 4천만 원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

▲ 박승희 열사 아버지 박심배(오른쪽)씨. ⓒ광주인

박승희의 부모님은 그 돈을 전액 장학회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았고 박승희 정신계승사업회는 그 기금을 종자돈으로 기금에서 나온 이자와 뜻을 함께 하는 박승희열사의 고등학교 동창과 대학 선후배 그리고 뜻있는 분들이 협조한 성금 5천 여 만원을 합하여 2013년 말 재단 설립의 기본 금액인 2억 원의 기금을 조성하였다.

또한 본격적으로 재단 설립을 목표로 한 해 동안의 준비 끝에 2014년 1월 재단 설립을 위한 인적 구성을 마쳤고,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지난 4월 21일 광주시교육청에 재단 설립 신청을 하였던 바 5월 13일 재단 설립 허가를 통보 받았다.

그리고 지난 6월 2일 재단 설립 등기를 마쳤으며 이어서 6월10일에는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 6월 21일에는 재단법인 계좌 계설을 끝으로 설립 절차를 완료하였다.

이제 관할 교육지원청에 설립 신고 절차가 남았는데 오는 7월부터는 재단이 법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박승희 장학 재단은 내년 신학기부터 가정이 어렵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찾아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장학재단의 의의

‘부모는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승희를 가슴에 묻은 승희의 부모님은 많은 승희의 선후배와 친구들을 자식으로 여기면서 수시로 전대를 찾아 학생들을 보살피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승희의 아버지 박심배씨는 공안정국에 반대하는 수많은 집회현장을 찾아 민주화로 가는 길에 민주 투사가 되어 동참하였다.

1998년 전남대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박승희 열사 추모사업회가 결성되었는데 자식의 뜻을 살리려는 그런 부모님의 뒷받침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자식이 죽어가면서 남긴 뜻을 살리기 위한 길은 여러 길이 있을 것이다. 그간 자식을 잃은 많은 부모님들이 길거리에 투쟁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식의 보상금 전액을 장학기금으로 출연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박승희 부모님께서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또 승희 고교 대학 동창과 선후배들이 보여준 마음 역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모범이라고 하겠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20여 년 전에 떠난 박승희의 뜻을 오늘에 다시 살리는데 동참하여 마음을 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장학 재단의 설립은 박승희 정신을 되새긴다는 점에서도 의의는 있다.

그러나 천박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내 것을 챙기기에 바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던지는 특별한 메시지라는데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자식 사랑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좀 더 어려운 사람을 기억하며 나눔의 길을 솔선한 사례라고 보기 때문이다.

많은 어린 학생들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시대에 박승희열사의 아버지 박심배씨와 어머니 이양순씨가 보여준 모습은 우리에게 살아가야하는 길을 보여준 또 하나의 선행이요 귀감이라고 하겠다.

승희와 개인적 인연

솔직히 아름다운 만남은 아니었다.

승희의 죽음을 앞둔 절박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나는 사회단체의 대표자격으로 승희의 분신배경과 과정에 초점을 맞춘 기록자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일간의 치열한 투병기간 그리고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면서 승희의 죽음은 독재와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려는 희생이었음을 확인하였고, 시대가 몰아간 죽음이라는 사실에 공감한다.

승희와 그해 독재 정권에서 산화한 젊은이들의 추모제에 빠지지 않았던 까닭은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시대에 살았던 나 역시 그 안타까운 죽음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특히 승희 부모님과는 서로를 위해주는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그건 비록 아픔을 함께한 고통에서 시작되었으나 아름다운 인연이 되었다.

1991년 승희가 재학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노훈오를 중심으로 1997년 ‘박승희열사추모사업회’가 꾸려졌는데 그 모임의 대표를 맡게 된 사실도 그런 인연의 연속선상에서 맺어진 또 다른 인연이었다.

1월1일, 망월동 본 묘역의 청소와 참배는 우리 회원들이 한 해를 시작하는 의미를 담은 행사였다. 동학전적지 답사, 땅끝 문화유적지 답사, 분신했던 곳에 알림돌 놓기, 체육대회….

그러나 2천년 초, 후배들에게 일을 넘기고 나는 총회 행사와 추모제만 참석하는 것으로 미안함을 달래며 10여년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 박승희 장학 재단을 설립하면서 다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변명과 소회

승희 추모사업회 회장을 끝으로 나는 그동안의 개인적인 만남과 모임을 정리하였다.

▲ 박승희 열사 추모사진(앞줄 맨 왼쪽). ⓒ광주인

첫째는 나의 건강도 문제였지만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어 직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던 점도 커다란 이유였다.

일부 모임에서는 서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으나 가족과 나를 찾는 삶을 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처지였기에 광주 가까운 시골 땅을 찾았고 만 3년을 헤매던 끝에 마침내 2007년 숙지원이라는 정원 겸 텃밭을 설계하면서 가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급적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람을 초대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며 사실상의 은둔생활을 고집했다.

그러다가 2012년 2월말로 정년, 그리고 그해 봄과 여름에 걸쳐 숙지원에 집을 지어 아예 광주를 떠났다.조용히 텃밭이나 일구고 또 책을 보고 글이나 쓰며 살겠다는 노년의 꿈을 시작한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많은 지인들의 애경사까지도 외면했던 생활이었다.

그러나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대표를 맡아달라는 후배들의 요청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승희 부모님의 뜻까지 외면할 수 없었다.

재단이 자리 잡기까지 내 인생에서 마지막 봉사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일하고자 한다.

재단의 과제와 전망

장학 재단의 기금을 키우는 일이 최우선의 과제라고 본다. 현재의 기금으로는 많은 사업을 하기에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승희 정신을 알리고 승희 부모님과 뜻을 함께 할 수 후원자들을 찾는 일을 적극 추진할 것이며, 장학생 선발과 지급은 공정하고 신선한 방법을 찾아 실시할 것이다.

또 미래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기 위한 강연회, 회원의 친목을 다지는 문화사업 등을 추진하고자 한다.

그리고 공권력과 맞서 의롭게 산화하였으나 사실상 추모사업회조차 없는 민족민주 열사들을 기억하고 뜻을 기리기 위한 모임을 우선 광주 전남지역에서라도 시작해볼 계획이다.

맺음말

재단의 설립은 법인(法人)을 창조하는 과정이라 준비해야할 사항도 많았고 절차도 전문적인 지식 없이는 쉽게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재단 설립 논의에 주도했던 준비위원들, 그리고 등기 과정에서 협조해주신 이사님들, 재단 설립 신고에서 등기까지 어렵고 힘든 과정을 실수 없이 처리해준 박상희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남긴다.

그리고 딸의 희생에 대한 보상금을 전액 기금으로 내놓으신 부모님의 뜻을 잊지 않을 것이다.

특히 승희 아버지께서는 현재 폐암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 중이다. 그런 중에도 승희 아버지는 몇 번이나 광주를 오가며 재단 설립에 힘을 주셨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쾌유를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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