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문학사, 값8000원, 160쪽>

고양이의 마술

우리 고장 고양이는 마술을 잘한다.
어떻게 암컷을 만났는지 그리고 역시나
도대체 어떻게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는지
네 마리는 엄마를, 다른 네 마리는 아빠를,
정확하게 닮았다. 밥집에서 밥도 오지 않았는데
일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친다.
그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우리들 배가 고파온다.
녀석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니야옹! 하는 소리로 온 것이다.
땅바닥에 엎질러준 생선 대가리와 밥을 말끔히도 치웠다.
얼마 후엔 암컷도 같이 왔다.
공장장만 빼고는 일하는 사람 모두 장가를 못 간
노총각들이어서 그런지 고양이 사랑이 엄청 크다.
자본주의가 결혼하라고 할 때 까지
부지런히 돈을 모으는 상중이가 밥 당번이다.
밥을 주면 수컷이 양보한다.
공장장은 한때 사업을 하다 안되어
이혼을 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본주의가 헤어지라고 하여
헤어진 것이 틀림없다.
사람의 새끼를 보면 한숨만 터지는데
고양이의 새끼를 보면 은근히 후회되는 것이다.
사람인 나는 못하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고양이의 마술이다.

▲ 시집 <고양이의 마술> 표지. ⓒ실천문학사 제공
먼저, 노동의 시들은 풋풋하다. 노동의 시는 노동으로 건져 올려 진 맑은 시어들이, 하얀 고봉의 쌀밥이 되어, 우리들의 영혼에 살을 찌운다. 그래서 노동의 시는 읽는 순간 행복을 느낀다. 거기에는 전도된 가치관이 없고 자본과 맞바꾼 문학의 천박한 자리가 없고 그저 함께 땀 흘린 흔적, 그것은 시인의 영혼과 함께한 독자의 낭만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고양이의 마술>을 읽으면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자본주의의 서러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서럽다는 것은 사실 너무 예쁜(?) 표현이고 자본주의의 잔혹사는 시인의 감성마저 뒤흔들고 있다. 고양이의 일반적 생태질서를 마술이라고 표현하는 극단적 표현은 작가의 민중적 역동적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어떤 마술을 부려야 작가가 <고양이의 마술> 끝 행에서 말한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사회를 꿈 꿀 수 있는 가?

공장장은 한때 사업을 하다 안되어 / 이혼을 했다고 하지만 / 내가 보기엔 자본주의가 헤어지라고 하여 / 헤어진 것이 틀림없다/ 시인의 놀라운 직관력을 우리는 발견한다.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기발한 시어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정치적, 역사적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가 성공하고 있는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 혹은 real

소설은 재미가 있다니까
내가 출근하고 없는 시간에
마누라 바람기를 막을 수 있을까?
세탁기에 세척기에 가정부까지도 없는
가난한 나의 아내는 불행할까?
불행한 나의 아내는 소설을 읽는다
부지런히 일 끝내놓고
세탁기에 세척기에 가정부도 두고
녹슨 살을 털어내려 헬스클럽에 가입하고
거기 강사와 짝하는 여자 얘기 들으며
나는 무엇 땜에 살고 있나
나는 불행한 여자야! 라고
소설 속으로 깊이 들어가
나오지 않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을 태워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 속에서는 그녀가 나올 것이다
자기야?
나 말고 누구 있나
그녀가 안 나온다면 더욱 잘된 일이다
소설적으로 살면 된다
새 마누라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설만 읽고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시를 더 많이 읽기를 바란다. 거리에 사람들이 김소월의 시집을 읽고 서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미에 끌려 이른바 베스트셀러라는 소설책 만 따라서 읽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관리하며 시를 많이 읽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는 생의 별이며, 시는 영혼의 정수이며,  시에는 영혼이 담겨있다. 시인은 최고의 지성, 데카르트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뛰어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라고 말 했다.

悲哀

나는 피곤하다
밤마다 나와 몸을 섞는 비애여
이불이 축축하구나
혀에 비늘이 돋게 하는 이 냄새는
그러니까
하나의 사랑이 썩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그리움이 증발하고 있는 것이냐
비애여! 너는 알고 있다
나의 피가 차다는 것을
너는 결빙하지 말라
세상이 증오 속에 곤두박질하여도
사랑보다도
신앙보다도
너의 몸은 눈부시게 빛나리라
悲哀여
나의 상처를 핥아달라
밤마다 生의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나 울부짖는다.

▲ 최종천 시인. ⓒ실천문학사 제공
그의 시들은 그의 울부짖음인가보다. 그의 상처를 보듬으며 그의 시가 더 울부짖기를 빌어본다. 그런 건강한 노동의 시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 사회는 행복하다. 거짓으로 노래하고 미사여구로 늘어진 저들의 치졸한 찬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들을 가리고 진실을 외면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지쳐있었는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우리 사회의 노동 현장을 투쟁의 현장으로 달구었던 한 때가 있었던 것처럼, 문학이 우리들에게 한 톨의 씨앗, 한줄기의 빛 같은 희망을 품어 줄 수 있다면 인간은 절망하지 않으리라.

며칠 전 유럽을 다녀온 어떤 사람이 유럽에서는 아빠가 7시에 귀가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이혼 사유 중에 하나라는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놀라웠다. 

생각해보니 요즘 이런 말이 있다. “책을 읽지 않는 남자와 만나지 말라” 그 말도 맞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바꿔 말하고 싶다 “시를 읽지 않는 남자와 절대 만나지 말라.” 

이번 시집 <고양이의 마술>이 아닌 지난 시집에서 재미있는 시들을 3편 올린다. 시에 나온 시어들이 두릅에 엮인 굴비들처럼 맛깔스럽다.

십오 촉 

익을 대로 익은 홍시 한 알의 밝기는
오 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내 담장을 넘어와 바라볼 때마다
침을 삼키게 하는, 그러나 남의 것이어서
따 먹지 못하는 홍시는
십오 촉은 될 것이다
따 먹고 싶은 유혹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마찰하고 있는 발열 상태의 필라멘트
이백이십짜리 전구를 백십에 꽂아 놓은 듯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떨어지지 않는
십오 촉의 긴장이 홍시를 켜 놓았다
그걸 따 먹고 싶은
홍시 같은 꼬마들의 얼굴도 켜져 있다



못견디게 예쁜 여자의 매력에는
독소가 있을 듯
거기다 계산이나 학력 사회적 지위까지
이토록 화려하고 보면 그녀는
독버섯이거나, 독거미이거나, 헌데
그런 여자들이 의외로?
애인이 없다고, 독은 독인데 孤獨이군
高毒, 그녀의 미소는 얼마나 농도가 짙은지
그녀의 눈빛은 다이옥신이 타는 듯 보이지 않는
불꽃을 가지고 있다 푸르스름한 그녀의
孤毒. 사내들은 모른다. 독은 독으로 치유해야 한다
그녀의 毒을 미량만 훔쳐서 나의
孤獨에 타 마시자 나의 사십 오년이나 된 실업에 타 마시자
그녀의 毒을 나의 獨에 타 백신을 제조하자
요컨데, 에이즈 백신을, 쾌락 백신을, 우울증 백신을
모든 孤獨한 여자는 毒을 품고 잔다
呱獨하지 않은 예쁜 여자는 독보다 더 위험하다
약효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毒은 없고 獨만 있다
이런 여자가 독버섯이다 독거미이다
이 지긋 지긋한 가난을 견디는
차별을 견디는 천대를 견디는
대한민국의 마누라들이여
대한민국의 졸장부들이여
그대 마누라의 씁쓸한 입술 맛은
뽀뽀가 끝나고 조금 지나면 달지 않은가
독이 병을 치료한다
세상의 절반은 병이다

그의 시 사랑이여를 읽으니 가진것 없는 나또한 행복하다


사랑이여

사랑이여 네가 왔다는데 눈보라처럼 혹은
먼지처럼 이 지상에 내렸다는데
와서 어디에 있는가
나의 가난한 방에 있는가
교회나 성당에 있는가
사랑이여 네가 있다면
물은 왜 더러워지며
공기는 왜 희박해지는가
어디엔가 있긴 있을 것인데
소설이나 시속에 있는가
어린이의 눈 속에 있는가
네가 있다면 사랑이여
사람들은 너 때문에 죽어야 하리
너 때문에 살아야 하리
남자는 여자를 사기 위해
여자는 남자를 사기 위해 태어난다
소녀는 벌써 낙태를 경험하고
여아의 탄생은 저지당하는
이 지상에서 사랑이여
네가 있다면
탄생의 조건은 없어야 하리
목숨을 구걸하고 거래하는 일도
없어야 하리
또 없어야 하리
친구들과의 사귐을 젖혀두고
내가 이렇게 시를 쓰는 일도
이 황홀한 햇살을 거절하고
처박혀 상상에 골몰하는 일도
없어야 하리
사랑이여 너는 가난하고 소박한 삶에서
도망쳐 나와
그 찬란하고 화려한 사치향락 속에 숨었느냐
영화 속에나 혹은 연속극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가
사랑이여 너는 어디에 있느냐
죽었느냐 살았느냐
오늘도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교회나 성당 불당에 나가
십자가 앞에서 석가의 앞에서
아들 딸들의 합격과 출세 성공을 기도한다
나는 노동자다 나는 보았다
일요일날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내 옆에서 묵묵히 노동을 하는 예수를
그는 말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자기에게 주문서를 놓고 간다고
그 많은 것들을 해 주기 위해
일요일에도 일해야 한다고 했다
소녀들은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몸을 판다
아버지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딸들과 매음을 하고 있다

가난하다는 것
고독하다는 것
이것이 축복이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사랑이며 행복이라는 사실을
전태일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는, 타락으로 치닫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비치는
하나의 성좌다

저자소개
최종천 시인은 1954년 전남 장성 삼서면에서 한 농사꾼의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삼계중학교 졸업을 학력의 전부로 마감하고 17살에 무작정 상경. 1968년 김신조가 내려왔던 해. 마장동 뚝방, 성동극장 옆골목에서 2년간 구두 닦고, 조선호텔 뒤 중국집 외백, 명동 피자집, 신설동 맥주집 등등을 전전하며 낮엔 입을 의탁하고 밤엔 등을 뉘였다. 그러면서 새벽에 청계천 학원에 나가 용접을 익혔다.

<눈물은 푸르다>는 16만에 낸 첫시집. 현재 용접공으로 일하는 노동자 시인. 아직 미혼이다. 1986년 시 “되는 것일까”, “섬”, “지상의 척도” 세편으로 <세계의 문학>을 통하여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눈물은 푸르다>,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등이 있다. 첫 시집 <눈물은 푸르다>로 2002년 신동엽창작상을 수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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