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로 본 '호남판' 영화들

광주에서 촬영된 최근 영화로는 개봉을 앞둔 <화려한 휴가>이다. 80년 5월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극적 시공간이기에 세트장도 마련하고 광주시민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대중적 파급력 강한 매체인 영화를 통해 광주의 정신을 알리고 공유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광주의 지역성을 발현하고자 하는 작업은 이미 50 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지난 5월18일 '화려한 휴가' 광주 시사회에서 출연배우들이 인사를 하는 장면. ⓒ줌뉴스  
 
먼저 일제 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이름 없는 별들>(1959, 김강윤)을 들 수 있다. 전남 지역 출신으로 당시 ‘아세아영화사’ 대표였던 이재명이 제작한 이 영화는 완도 출신의 최금동이 시나리오를 맡았다. 출연배우도 호남 출신을 선발하기 위해 공개 모집을 했는데, 4~5명의 배우를 모집하는 연기 테스트에 5백여 명이 지원할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촬영할 당시 이 지역 출신의 학생들 4만 명이 무료로 엑스트라로 출연하였고, 광주시내 모든 제과점이 무료로 빵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3개월 반의 제작 기간을 거친 이 작품은 경기도 안양촬영소에서 세트 촬영을, 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서중학교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하였다.1959년 11월 31일 광주극장과 동방극장(무등시네마의 전신)에서 동시 개봉하여 1주일간 상영을 하였는데, 담양, 장성 등지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관람객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 광주학생운동을 주제로 배우 장민호.조미령씨가 열연했던 "이름없는 별들"의 한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이름 없는 별들>이 제작되기에 앞서 광주에서 또 하나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그것은 <옥단춘>(1956, 권영순)이다. 이조시대 작자 미상의 소설인 옥단춘전(玉丹春傳)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평양기생 옥단춘이 몰락한 양반 가문의 사대부를 도와 영광을 회복하고 우정을 배신한 자를 복수하며 벼슬아치의 횡포를 비판하는 내용의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춘향전’의 아류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당시 목포극장의 ‘기도’(극장 입구에서 표를 받거나 극장 관리를 하였던 사람)를 했던 흥행사 박복만이 제작하고 광주와 해남 등지의 풍광을 담아 촬영하였다. 당시 광주의 언론은 <옥단춘>을 오락성 강한 할리우드 영화를 대체하는 ‘진정한 향토적인 강렬한 뉴앙스’와 ‘건전한 영화문화에 기여’하는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광주 지역민들의 인기를 반영하듯, 개봉 이후 2년 동안 광주극장과 무등극장에서 재상영되었고, 이후 재개봉관 남도극장, 신영극장, 그리고 태평극장에서 연속 상영되었다.

   
  ▲ '이름 없는 별들'의 1959년 당시 포스터 ⓒ한국영상자료원  
 
1950년대 광주에서의 영화 제작 활동은 호남의 다른 지역에서 앞서 이루어진 영화 제작에 자극받은 것이었다. 즉, 해방 이후 정치적 격변기에 전북 군산시에서 <끊어진 항로>(1948, 이만흥)와 <성벽을 뚫고>(1949, 한형모)가 제작된 것이다. <성벽을 뚫고>는 황해가 영화배우로 정식 데뷔를 한 작품이기도 하다.

전북에서의 영화 제작은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가던 해에 <애정산맥>(1953, 이만흥)과 이후 <탁류>(1954, 이만흥)가 만들어졌는데, <탁류>를 통해 최무룡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전주시에서 제작된 첫 번째 영화는 <아리랑>(1954, 이강천)이다.

<아리랑>은 당시 전주시의 백도극장의 지배인 조진구가 시나리오를 쓰고 백도극장 대표인 김영창과 이석천이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이후 전주시에서의 영화 제작은 <피아골>(1955, 이강천)과 <선화공주>(1957, 최성관)로 이어진다. <피아골>은 전주극장의 김병기가 기획하고 제작하였으며, <선화공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16mm 총천연색 영화이다.

1950년대 1960년대에 들어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 제작 구조가 형성됨에 따라 광주와 전북 지역에서의 영화 제작은 중단된다. 하지만 해방 이후와 1950년대 기술 부족과 재정 압박, 그리고 영화 인력 부족이라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호남에서의 영화 제작 활동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 중흥의 계기를 마련한 고무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다.

* 위경혜님은 영상문화연구가로서 국내외에서 영화 및 동아시아 문화학을 연구해온 전문가입니다. ‘문화’ 담론의 소용돌이에 놓인 광주에 관심이 아주 많으며 현재는 중앙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위경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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